삶의 일상에서 진보적인 행동을 하거나, 시민들을 상대로 계도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 쉽게 두 가지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과격하다거나 “싸가지 없다”는 비난이 하나라면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가르치려 한다는 힐난이 그 두 번째이다. 자신이 맞서 싸워야할 괴물이 크면 클수록, 또 그 괴물이 숨어있거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을수록 그 괴물을 지적하고 그와의 싸움을 말하는 사람들은 쉽게 이런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접하게 된다. 상대방이 웃으면서 도저히 생각하기조차 힘든 인간 같지도 않은 짓거리를 할 때 과격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우리도 웃으면서 싸워야 하나? 사람들이 현혹되고 미혹되어 그 속에 숨은 의도와 속임수를 알지 못할 때도 가르치려 든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잘 모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따위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해야하나?
과연 우리는 과격하지 않게 “싸가지 있게” 말하고 행동해야하나? 어떻게 행동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중립이란 없다는 말처럼 싸워야할 괴물이 난폭하고 교활할수록 그에 맞서는 싸움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중립도, 품위도 자리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허상과 욕망을 깨는 계몽과 자기비판도 있어야만 한다. 물론 니체의 말처럼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막아야 하지만 말이다.
우리 정치를 보면 참... 뭐라 할 말을 잃는다. 정말 깡그리 “싸가지”를 잃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맞서고 고발하는 행동은 사그라지고 있으며, 비판과 대안은 동력을 잃고 허공을 헤맨다. 사람들은 체념하고 있으며 ‘어차피 그래’라고 말한다. 각자 살 길을 찾거나 ‘그래 봤자 뭐가 달라져’라는 심정으로 일상으로 더욱 골몰하고 있다.
어려운 정치학적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대의 민주주의란 우리의 권리를 그들에게 잠시 위임했으며, 그들은 그 위임을 재현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원과 시의원, 지자체와 정부,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조차도 국민의 권리와 의사를 대신하여 그 임기동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공약은 그런 위임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공약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선거 때는 무슨 말인들 못해”라는 전직 대통령이나, 강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여권 실세 입에서 태연하게 거론된다. 그래도 아무런 제재나 비판도 받지 않는다. 더욱이 현직 대통령은 아예 온 몸으로 그 말을 실천하고 있다. 지켜진 공약보다 깨버린 공약이 비교도 안 될 정도이다. 그래도 지지자가 남아도는 모양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며 반민주주의이며, 위헌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걸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사대강이 죽어가고, 그 뒤에 수많은 비리와 부패,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혈세란 말, 그 혈세를 제 주머니 같이 사용한 인간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국민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 이대로 간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더 계속하실 것 같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생다지로 죽어갔는데도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수없이 바꾸겠다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는가? 대선 과정에서 수도 없이 했던 말 “반드시 약속은 지킨다”는 말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고 있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대선에 개입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국민을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정황이 있어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 나라를 지키라고 임무를 맡긴 군이 선거에 불법으로 개입해도 전선은 이상이 없다. 전시작전권 환수를 포기하고, 그 뒤로 미국과 군수산업 등등의 이익이란 말이 거론되는 순간에도는 “반드시 전시작전권을 환수하겠다”는 약속에 대해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의 이른바 “사자방” 비리와 “100조”에 달하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순간에도 세상은 조용하다.
이런 시간에 어떻게 하면 “품위 있고 기품 있게”, 또 자기 자리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자기 일에만 충실할 수 있을까.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은 그들을 보기가 정말이지 죄스럽기 그지없다. 실질적 청년 실업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취준생, 공시생, 취포생, 이태백, 경단녀, 사오정” 등의 말이 일상적으로 회자된다. 비정규직은 1,000만 명에 이른다. 그런데 저 위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부를 누리며 정말이지 품위 있고 기품 있게 살아가고 있다. “천한 것”들이 사는 각박하고 처절한 삶에 대해 그들은 꿈에서도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투쟁이 필요하다. 그 투쟁이 반드시 시위를 벌리고,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에 맞서는 그런 행동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것은 때로는 기억투쟁으로, 담론투쟁으로, 때로는 계몽의 투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앎을 통한 각성과 계몽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알고 행동해야한다. 노동이 무엇인지, 왜 노동이 일과 구분되는지,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사악하기까지 한 체제인지, 왜 사회와 국가, 심지어 대학과 종교조차도 기업화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왜 우리가 그런 논리에 함몰되는지 알고 비판하고, 그래서 거기에 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품위 있고 기품 있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는 속지 않고 살 의무가 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천한 것”들이 될 것이다. 속여도 계속 속아주는 사람을 누가 존중할 것인가. 우리는 존중받는 존재로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 모욕 받지 않고 살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는 그 전말을 알고, 그 속내를 드러내고, 그 모두를 기억하고 단호하게 거기에 맞서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알지 못하고 말하지 않으면 결코 인간다운 삶은 가능하지 않다. 계몽은 인간이란 존재의 운명적 과제이다. 자신의 지성으로 알아야 할 것, 말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 가장 훌륭한 노예는 자족하는 노예, 자기가 노예인지 모르는 노예이다. 우리는 자본의 노예인가, 우리는 권력의 노예인가, 우리는 그 어떤 이념의 노예이며, 그 어떤 국가에 사는 노예인가? 그런 국민은 그런 정부를 가질 것이며 그런 시민은 그런 공동체를 가질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고 싶다면,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길 원한다면 알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웃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자. 그것이 계몽이 아닌가. 왜 계몽은 두려워하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알아야 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도 계몽 되어야 한다. 당신에게 계몽이 필요한 그만큼 나도 계몽을 필요로 한다. 완전히 계몽된 사람은 없다. 삶의 끝까지 우리는 계몽되어 가는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I. Kant)는 계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스스로에서 비롯된 미성숙을 벗어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칸트는 계속 말한다.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능력”이라고.
이제 말하자, 아주 싸가지 없이 단호하게, 아주 처절하고 절박하게 말하자. 그래서 그렇게 알고 행동하며 계몽되자. 인간다운 품위와 기품을 갖추고 인간답게 존중받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 길을 가야만 한다. 어떤 권위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스스로 나의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인간답게 성숙되어 가야한다. 그것은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이다.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내팽개치는 자는 노예가 될 뿐이다. 노예인지도 모르는 노예. 자신의 욕망 때문에 노예가 된 삶을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계몽될 때만이 가능하다. 신분으로서의 노예제가 사라진 현대에서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자각하고 계몽되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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