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핵무기 개발을 놓고 미국 등 관련국들과 옥신각신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과 이란이다. 북한은 공공연히 핵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고, 기술적으로도 세 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이다. 반면 이란은 자신의 핵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전력 생산과 의료 목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국제사회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주목할 점은 북한과 이란 핵문제를 대하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태도이다. 11월 24일 협상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서 오바마 행정부는 협상 타결을 위해 그야말로 '올인'하고 있다. 공식적인 협상 대표인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은 물론이고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나서 이란 관료들과 수시로 만나고 있다. 지난달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이니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협상 타결의 필요성을 강력히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무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북미 직접대화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겠다"던 대선 유세와 집권 초기의 공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전략적 인내'라는 알쏭달쏭한 표현에 대북정책을 가둬두고는 협상다운 협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최근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들의 극적인 석방으로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는 상태이다.
자의적이고 너무나도 안일하다!
미국이 이처럼 북핵과 이란 핵문제를 구분해서 대응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북한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한 사실상의 핵보유국인 반면에, 이란은 아직 핵보유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 핵문제는 협상을 통해 해결을 시도할 가치가 있는 반면에, 북핵 문제는 협상을 통한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
또 하나는 '핵 도미노' 가능성에 대한 다른 판단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핵무장을 하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들이 핵 개발을 시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이른바 '중동의 핵 도미노 현상'이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가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 내에서 핵무장 여론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대규모의 미군 주둔, 핵우산 제공, 미사일방어체제(MD) 강화 등 미국의 안보 공약과 동맹 강화를 통해 동북아의 핵 도미노 현상을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판단은 대단히 안일하고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무기화'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것은 그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유는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협상 회피의 구실이 아니라 보다 집중적이고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할 동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과거 핵보유국들의 핵문제도 협상을 통해 해결한 전례들도 있지 않은가?
미국의 태도에서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것이다. 미국은 외교적인 협상을 회피하려고 할 때에는 북핵을 '톤다운'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MD 등 군사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에는 북핵이 마치 '존재론적인 위협'인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이중성이 계속되면, '미국은 무기상'이라는 혐의도 더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은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핵 도미노가 없으면 괜찮은 건가?
동북아 핵 도미노 현상에 대한 인식도 달리해야 한다. 필자 역시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선택하거나 미국이 이를 용인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러나 이게 곧 안심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한국과 일본이 핵보유로 가지 않더라도 북핵 문제를 방치하면 한반도와 동북아는 극히 불안정한 상태가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와 연결된 동북아의 전략적 불안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고, 또 앞으로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정전체제의 불안정성 심화 및 한반도 군비경쟁 격화, 그리고 동북아 4강 사이의 전략적 불안 증대가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 가지는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북핵과 연계된 동북아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의 전략적 불안의 매트릭스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지역 차원에서 중국과 일본의 갈등 관계이다. 또 하나는 보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이다. 끝으로 미·일 동맹(해양세력) 대(對) 중·러 협력체제(대륙세력) 사이의 대립 격화이다. 북핵 문제 및 이에 대한 한미일의 MD 구축 시도는 이러한 갈등 구조를 더욱 격화시키고 또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북한위협론을 이유로 추진되어온 MD는 미·일 동맹의 결속을 다지는 핵심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 주도의 MD는 냉전 시대 적대적이었던 중·러 관계를 우호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준 군사동맹 관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에서 악화되고 있는 전략적 갈등은 냉전 시대 미·소 관계와 비교해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시대에 극심한 이념 대결, 세력권 확장 경쟁, 군비경쟁 등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전략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냉전(cold war)은 긴 평화(long peace)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1972년 체결된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이 결정적이었다. 양국이 사실상 MD를 하지 않기로 약속함으로써 전략적 안정의 두 축인 위기관리와 군비경쟁 억제 및 군축에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국제 평화와 안정의 초석"이라고 칭송받았던 ABM 조약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를 틈타 파기함으로써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능력을 갖춘 미국의 '방패 만들기'와 이를 무력화하려는 러시아와 중국의 '창 만들기' 사이의 경쟁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에선 이러한 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동북아 4강뿐만 아니라 남북한까지 가세해 한미일 대(對) 북중러 사이의 MD 갈등이 전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북핵 문제가 5자를 결속시킨 사유였다면, 이제는 MD가 6자를 분열시키고 헤쳐 모이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냉전을 그나마 불안한 평화로 유지케 했던 ABM 조약이 오늘날에는 없다. 오히려 한반도에서 북핵과 MD가 적대적으로 동반성장하면서 그 파장은 동북아 전체로 번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적어도 오늘날의 동북아 질서가 냉전 시대보다 질적으로 좋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과 MD의 적대적 의존관계를 혁파하지 않은 한, 동북아의 전략적 안정과 평화는 공허한 구호로 끝날 것임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오바마 행정부는 더 늦기 전에 북핵 해결을 위한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북핵이 늘어나고 강해지는 상황은 예방할 수 있다. 남은 임기 2년, '오바마 행정부가 달라졌어요'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를 촉구하고 또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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