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외교안보수석을 맡은 임동원은 5년 동안 어느 직책에서든 대북정책의 사령탑 노릇을 했다. 특히 정권 출범 초기 IMF 사태로 인해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전념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동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깊은 신뢰는 임동원의 활동에 든든한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임동원은 외교안보수석실의 기존 인원을 가급적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외교안보수석실도 구조조정의 영향을 받았으나 4개 비서관직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개혁 차원에서 비서관급 간부를 모두 교체하고 직원의 대부분을 교체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부인원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전문성을 중시하여 파견공무원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렇게 하여 나는 재임기간 중 외교비서관으로 권종락과 송민순, 국제안보비서관으로 이상철, 통일비서관으로 조건식과 이봉조, 그리고 국방비서관으로 임충빈 준장 등 탁월한 공무원들로부터 훌륭히 보좌를 받을 수 있었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332쪽)
5년 전 통일원 장관에 취임한 한완상이 당시 차관이던 임동원을 유임시키지 못했을 때 외부 인사를 영입하지 않고 통일원 내에서 발탁했다가 후회한 일이 있다.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목적의식-비전-철학은 나와 비슷하거나 같아야 했다"는 것이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60-61쪽) 과연 한완상이 당시 발탁한 송영대가 5년 후 임동원이 김영삼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인물들에 비해 확연하게 "냉전근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코드가 맞는" 인사를 외부에서 끌어들이기보다 기존 관료를 설득하려 한 태도는 한완상이나 임동원이나 모두 훌륭한 것이었다. 정책을 수립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면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실행까지 하려면 중립적인 관료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동원이 여기에 성공한 데는 그의 군인-관료 경력이 한완상의 학자 경력보다 유리한 점도 작용했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배경도 중요했을 것이다.
임동원은 대북정책의 기조를 처음부터 '포용정책'으로 확정했다.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은 세 가지였다. 그 하나는 북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 위한 '적대적 대결정책'인데, 이는 전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어 채택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관정책'인데, 북한으로 하여금 대외적 폭발이나 내부적 폭발을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공존하며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도모하는 '포용정책'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
화해-협력-변화-평화가 새로운 대북정책의 4가지 키워드였다. 이것은 북한이 조만간 붕괴될 것이라는 '붕괴임박론'이 아니라 북한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진적 변화론'에 토대를 둔 정책이다. (<피스메이커> 333-334쪽)
임동원은 취임 직후인 3월 초 미국 관리들과 정책협의를 가진 자리에서 점진적 변화론에 기초한 포용정책의 타당성에 대한 양국 정부의 공감대를 확인했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4자회담 대표인 찰스 카트먼 국무성 부차관보,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대사와 잭 프리처드 NSC 국장이 찾아온 자리였다.
나는 보스워스 대사와 카트먼 부차관보 일행을 맞아 국민의 정부의 대북시각과 대북정책 기조를 설명하고 4자회담에 대한 입장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들은 새 정부의 정책과 입장에 대해 "잘 이해했으며 새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와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첫 번째 정책협의가 되었다. (…)
그날 면담에서 우리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이미 8년 전에 "북한이 1~2년 내에 루마니아처럼 갑자기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3년 전에는 "늦어도 2~3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점을 상기하며 "오히려 최악의 상태는 넘긴 것 같다"는 의견을 함께 나누었다.
물론 정보기관의 판단이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하여 정책결정자들이 예방, 또는 미리 대처하도록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든 북한이 붕괴되는 경우 예상할 수 있는 두 가지 상황, 즉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는 '대외적 폭발사태'나 내란이 일어나거나 수백만 명의 탈북난민을 발생케 할 '내부붕괴사태'는 모두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 자리에 모인 우리는 "이러한 위험한 사태를 예방하는 데 치중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막연한 희망사항인 '붕괴 임박론'에 기초한 정책은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공유했다. (같은 책 342-344쪽)
클린턴 정부는 1994년 6월의 위기 이후 공화당 정권에 비해 대북 포용정책을 기조로 삼아 왔다. 그런데 대북정책에 앞장서거나, 최소한 보조를 맞춰줘야 할 한국 정부가 협조는커녕 방해를 일삼아 왔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공화당의 심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 위에 언급한 자리에서 실무자급 미국 관리들이 새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노선에 쉽게 공감을 표한 것은 미국 정부의 정책노선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북정책 추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임동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운영을 외교안보수석실로 넘겨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국가안보회의는 군사 부문에 치중해 온 기구였는데, 이것을 외교-안보-대북정책을 관리하는 상설기구로 만들어 사무처를 두고, 관계 장관으로(통일, 외무, 국방, 안기부장, 외교안보수석)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매주 열기로 한 것이다.
임동원은 1998년 3월 7일의 제1차 NSC 상임위원회 내용을 <피스메이커> 347-352쪽에 소상히 적었다. 이후 추진할 대북-대외정책의 기본 과제들이 망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개 의안이 처리되었다고 한다.
(1) 경수로 비용 부담. 당시 총 사업비가 약 52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었고, 한국이 70%인 36억 달러를 맡을 계획을 김영삼 정부가 승낙해놓고 있었다. 이 계획을 김대중 정부가 승계하기로 결정되었다.
(2) 4자회담 대책. 1997년 8월의 예비회담으로 시작한 남-북-미-중 4자회담이 임박해 있었다. 4자회담은 대북관계에 무성의한 김영삼 정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미국이 강압적으로 끌어들인 회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대중 정부는 4자회담 참여를 넘어 별도의 남북대화를 함께 추진할 방침을 세웠다.
(3) 대미 방위비 분담 조정. "주한미군 유지를 위한 직접비용의 1/3 수준을 분담한다"는 원칙으로 1989년 4500만 달러로 시작한 방위비 분담금이 1998년에는 약 4억 달러까지 늘어나 있었다. IMF 사태로 환율이 두 배 이상 오른 상황에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4) 대북 식량 지원. 김영삼 정부는 세계식량기구를 통해 식량지원을 행해 왔는데, 김대중 정부는 직접 지원할 것과 민간 차원의 지원을 적극 권장할 것을 결정했다.
(5) 대북정책 기조. 김대중과 임동원이 준비해 온 정책노선을 통일부 기안 형식으로 검토하여 다음 주 회의에서 채택할 준비를 하였다.
(6) 국가안보회의 운영개선안. 임동원이 준비한 방안을 채택하고 관계법령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돈 오버도퍼는 김대중 정부의 초기 대북정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이 추진한 대북 정책들은 그의 전임자이자 정적인 김영삼 대통령이 추진했던 정책들과는 전혀 상이했다. 1970년대 초반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때부터 김대중은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북한을 포용하는 정책을 공공연하게 옹호해왔다. 또한 군사정권 하에서 오랫동안 용공분자라는 비난을 받아오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 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어떠한 무력 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 정권을 와해시키거나 북한을 흡수할 의도가 없습니다. 셋째, 우리는 가장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부문에서부터 시작해 남과 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
그 무렵 북한과의 공식적인 관계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의 햇볕정책은 쓰라린 시련을 겪었고, 실패로 끝난 또 한 번의 북한 잠수정 침투 기도에 이어 3주 후 남한 해안선 부근에서 북한 특공대원들의 시체가 발견되자 국민들 또한 깊은 실망에 빠졌다. 여러 달 동안 정부 차원에서 눈에 띄는 진전의 기미가 없는 듯했음에도 김대중은 포용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취임 1개월째 되던 98년 3월 필자가 대통령이 된 김대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북한이 어떤 의향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지금 북한 지도부에서는 한창 대남 정책 수정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달 북한의 제안으로 공식적인 양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
김대중의 햇볕정책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남북 정부 간의 관계 진전 여부에 상관없이 남한 사업가가 북한과 거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관점은 더욱 폭넓은 접촉의 길을 트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 개의 한국> 589-590쪽)
10여 년이 지난 지금 초기 햇볕정책의 어려움은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김대중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포용정책이 각광을 받으며 2000년의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큰 흐름이 내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적지 않은 곡절이 있었다. 김영삼 같으면 정책을 홀라당 뒤집어버릴 만한 '도발'들도 있었다. 햇볕정책의 성공은 그 내용이 좋아서 만이 아니라 추진과정의 꾸준한 인내심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공의 가장 큰 조건 하나가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경 분리의 원칙이었다. 민간 접촉의 권장도 정부의 남북관계 독점을 푼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조치였다. 남한 정부는 건국 이래 북한과의 관계를 독점해 왔다. 적십자회담처럼 민간 접촉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정부의 통제를 확실히 했다. 대북정책이 민심에도 경제논리에도 역행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이 독점과 통제를 푸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새 대북정책이 민심과 경제논리에 맞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정책의 추진력을 재계와 민간에서 일으키는 방향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는 장관(壯觀)이 이 덕분에 펼쳐질 수 있었다. 10년 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의 독점과 통제를 다시 시도했지만, 한 번 풀린 독점과 통제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자신감을 갖고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경제력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남한이 누리고 있던 확고한 우위에 있었다. 북한의 국민총생산(GNP)은 90년대 들어 반 토막이 나서 1997년 약 103억 달러로, 남한의 약 4670억 달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GNP 전체가 남한의 국방비(약 160억 달러)에0도 미치지 못했다. 무역규모는 200 대 1로, 더 차이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포용정책은 유화정책이 아니라 강자의 공세적 정책으로서 '부전승전략'을 추구한 것이라고 임동원은 설명했다. <손자병법>의 "부전이승(不戰而勝)"을 말한 것이다.
이렇듯 남북 간의 국력격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궁지에 몰려 '죽기 아니면 살기' 또는 '이판사판' 식으로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남북이 보유한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쌍방이 입을 참화인 것이다. 우리가 승리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수많은 인명과 산업능력을 파괴할 민족적 대참화는 반드시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국력과 남북 간에 심화되고 있는 국력격차를 배경으로 북한의 도발과 모험을 억제하는 한편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내어 순화시키고 잘 관리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안보를 튼튼히 하여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는 한편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관리하여 평화를 만들어나가면서 공존공영하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해나가려는 것이 곧 '화해협력정책'의 요체인 것이다. (<피스메이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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