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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삼팔선'이 금지곡 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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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삼팔선'이 금지곡 된 사연은?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4)

I.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4. 미술 속의 미군 통치

미 군정 아래서 미술가들은 38선에 의한 한반도 분단, 농민과 노동자들의 가난하고 힘든 모습, 미군부대 주변의 매춘부들, 도시 유흥가의 퇴폐적 모습 등을 그림으로써 미군 통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1945년 9월 10일 하지 장군이 일본 관리들로 하여금 질서를 유지하도록 선언하자 조선인들은 항의 데모를 벌였다. 다음날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때 건물 벽들은 항의 포스터로 뒤덮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알려진 뒤 서울엔 일련의 항의 포스터가 흩뿌려졌다. 신탁통치에 저항하며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포스터도 있었고, 미 군정에 대해 총파업을 벌이자는 포스터도 있었다.

박문원의 1946년 작품 <감방>은 세 명의 젊은 남자가 감방에 누워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초라하고 불행한 모습을 통해 미 군정 아래서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느끼게 한다. 망치로 쇠사슬을 끊고 있는 노동자를 스케치한 손영기의 <노동자>(1946),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자르는 젊은 남자를 형상한 김만술의 조각 <해방>(1947) 등은 미군 점령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조선인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정산이 1946년 만화식으로 그린 <38도선>은 국토 분단에 따른 조선인들의 좌절감을 드러낸다. 김규택의 만화 <미·소 회담>(1946)과 김용환의 만화 <해방 후 2년>(1947), 그리고 1947년 "미·소 공위 (공동위원회) 속개하라"는 구호가 담긴 익명의 벽보 등은 조선에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두 나라가 무성의하게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이 벽보엔 다음과 같이 영어로 표기된 부분도 있다.

"AMENTS HER ILL FATE! EFFECTIVE STEPS BE TAKEN BY U.S.A. & U.S.S.R. TO ENSURE KOREAS INDEPENDENCE!" 영어 표기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 "조선의 비참한 운명을 개선하라.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효과적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이다.

사실, 미국과 소련은 1946년 3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기 위해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가졌다. 여기서 조선 사람들 가운데 누구와 협의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미국은 남북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참가시키자고 주장했고, 소련은 신탁통치에 관해 협의하는 자리이니까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정당과 단체만 참가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1947년 5월 열린 제2차 회의에서도 두 나라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겼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미국이 비난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소련과의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떠넘긴 이유는 그리스나 터키 등의 공산화를 막는 데 힘을 쏟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그 무렵 전략적으로 훨씬 중요한 유럽 지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어서 한반도 문제에 신경 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발을 빼자니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이에 국무부는 1947년부터 한반도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으면서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다. 고심 끝에 나온 계책이 바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유엔을 통해 한반도를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미술가들의 작품이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미국이나 미 군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미술 건설본부>의 활동이 친미 반공 쪽으로 기울어진 것과 달리, 1945년 9월 창립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건설하고 '일체 반동적 미술'을 배격하겠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리고 1946년 1월 1일부터 '반 파쇼 길거리 전시회'를 열었다.

1947년 1월부터 미 군정이 진보적 문화운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자 진보적 문화예술가들은 2월 '문화옹호 남조선 문화예술가 총궐기대회'를 갖고 "야만스런 반동 지배자들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결의했다. 나아가 진보적 미술가들은 미 군정의 탄압에 맞서 문화예술인들과 대중을 궐기시키기 위해 1947년 5월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7월 60여명의 테러단이 대전의 전시장에 난입해 작품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바람에 더 이상 전시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미술가들은 1947년 11월 미 군정청이 개최한 '조선종합 미술전시회'에 공식적으로 출품을 거부함으로써 미 군정의 야만적 탄압에 대한 항의와 미군 통치에 대한 반감을 표했다.

5. 음악 속의 미군 통치

미 군정 기간 동안 불렸던 노래 가운데 적어도 3곡의 민요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외세에 의혹을 품으며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노래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자. 일본놈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해라". 미국이든 소련이든 조선의 독립보다는 자신들의 국익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니 외세에 의존하지 말자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노래인 것이다.

"국제 관계에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익뿐이다"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특히 한민족은 국가 간의 관계를 개인적 관계의 연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왔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의리도 귀중하고 사랑이나 우정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도 있는데,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그런 의리나 우애를 기대하는 것이다. 요즘도 볼 수 있는 미국에 대한 짝사랑의 배경이다.

다른 두 곡의 민요는 미군 점령에 따른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현상을 담고 있다. 특히 미군들을 상대하는 창녀들을 모욕하거나 그들 사이의 관계를 빈정거리는 내용이다. 고상하게는 '양공주'나 '양색시'로 불리고 속된 말로는 '양갈보'라 불렸던 미군부대 주변 매춘부들의 이질적 외모와 행위는 그 무렵 조선인들의 성 윤리를 비롯한 행동 규범에 크게 벗어났기에 경멸당했던 것이다.

몇 곡의 유행가 역시 분단에 따른 한민족의 비애나 좌절을 드러내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발표되어 '해방가요 제1'호라 할 수 있는 <가거라 38선>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분단에 대한 한탄과 통일에 대한 기원을 노래한다. 1절에서는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며 원망하고, 2절에서는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고 다짐하며, 3절에서는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고 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부풍이 작사하고 남인수가 부른 이 노래는 급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유행했는데, 나중에 이승만 정부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반공을 내세운 독재정권에서는 분단의 한조차 마음대로 노래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47년 박남포가 작사하고 역시 남인수가 노래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는 제목이 가리키듯 달도 하나고 해도 하나인데 왜 조국과 민족은 둘이냐며 분단을 원망하고 있다. 1절과 2절 가사를 그대로 옮긴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 이 나라에 바친 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물도 하나 배도 하나 산천도 하나 / 이 나라에 뻗친 혈맥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민족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 모두야 이 겨레의 젊은 사나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음악가들의 활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음악인들은 1945년 10월 노동 쟁의에 참가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이에 맞서 우익 음악가들은 같은 날 미군들을 환영하는 음악회를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을 두고 좌우 이념 대립이 전개되어오지만 치졸한 경쟁엔 씁쓸함을 떨치기 어렵다. 아무튼 좌익 음악가들은 소작농들과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 현실을 그들의 음악 활동에 지속적으로 반영하려 했으며, 이른바 '민족주의적 좌파' 음악인들은 반일 반미 성향의 독립적 민족음악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6. 연극 속의 미군 통치

일제 치하에서부터 미 군정에 이르기까지 연극은 진보적 문화운동의 선두를 지켰다. 짧은 기간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대중을 일깨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 연극이었던 것이다. 해방 전후 조선인들 가운데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했던 사람은 0.5%도 되지 않았고, 학식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소설이나 시를 읽을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만 미술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이하고 겨우 5일이 지난 1945년 8월 20일, 일부 연극인들은 전국적 집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9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을 만들어 농민과 노동자들의 항쟁을 극화하기로 결의했다. ‘혁명적 사실주의’에 입각해 민족해방과 독립에 연극의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사실주의'란 문학이나 예술에서 이상이나 주관을 배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표현 방식을 뜻하므로, 이러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연극을 만들자는 다짐이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1947년 7~8월 23개 극단이 공동 주최한 연극 경연대회에서는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제의 연극만 공연할 수 있었다.

7. 영화 속의 미군 통치

해방 직후 조선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자금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미군정은 미국 영화를 배급하기 위해 <중앙영화사>를 설립하고 극장에서 강제 상영까지 하게 하는 등 다양한 종류의 특혜를 베풀었지만, 조선인 영화 제작자들은 생필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영화 제작자들은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제의 기록영화를 몇 편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서울 키노'(Kino)가 1945년 제작한 16mm 기록영화 <경방>은 한 방직공장에서의 노동쟁의를 묘사했다. 참고로, '키노'는 독일어로 영화를 뜻하는데 '서울 키노'는 일제시대인 1920~30년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KAPF) 소속 영화인들이 만든 단체이며, <경방>은 일제하에서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방직 주식회사'를 줄인 말이다.

미국인 관리들은 기술도 없고 유치한 조선 영화가 관객을 끌지 못할 것이라며 조선인 영화 제작자들을 비웃었다. 사실 그 무렵 미 군정의 가장 중요한 문화 정책은 미국 영화를 수입해오는 것으로, 영화 수입은 미국과 조선 사이에 가장 큰 무역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1946년 10월 미 군정이 영화검열 제도를 채택하자, 진보적 문화단체들은 미 군정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조선 영화의 민주주의적 재건을 저해하고 영화 상영의 자유를 압박하는" 정책을 폐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영화인 김한은 1947년 2월 '문화옹호 남조선 문화인예술가 총궐기대회'에서 "저열한 미국영화 수입과 강제상영 절대 반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미군 점령 기간 동안 조선인들이 반미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거나 불가능했지만, 조선인 영화 제작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수입된 미국 영화를 비판함으로써 반미 성향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한원래는 1948년 미국 영화 속의 '양키 문화'를 비꼬면서 미국 영화들이 조선 영화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조선 영화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분노를 표출했다.

나아가 조선인들은 미국인들이 조선을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간주하는 것에 더욱 분노했다. 일본을 통해 미국 영화에 일본어 자막을 붙여 수입했기 때문이다. 1947년 중반 몇몇 극장 운영자들이 미국 영화 상영을 거부하자, 미군 관리들은 그들에게 반미사상을 품고 있느냐고 물으며 미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8.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 군정 요약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문인과 예술가들은 미 군정 3년 동안 그들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반미 감정을 활발하게 표출했다. 반미 의식의 뿌리는 미국에 의한 분단과 미군 점령에서 생긴 좌절감과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분노에 있었다.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되자 민족 독립에 대한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민족 독립이 지연되자 기대는 좌절로 바뀌었고, 분단이 굳어지자 '해방군'에 대한 따뜻한 환영은 '점령군'에 대한 반대와 분노로 변했다.

미 군정은 비민주적이었고 조선인들의 여론을 무시하는 반혁명적이었다. 조선에 대해 무지했던 미국인들의 정책은 대체로 실패했다. 38선 이북에서 실시되었던 소련의 정책에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 인사 정책에서 일본인 관료들과 조선인 부역자들이 북쪽에서는 처벌받았지만 남쪽에서는 다시 고용되었다.

토지정책에서 북쪽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철저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지만, 남쪽에서는 토지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 군정 아래서의 남쪽 조선인들이 북쪽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게다가 많은 조선인들은 미 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또는 그보다 더, 비참하다고 느꼈다. 해방 이후 미군 통치하의 남쪽 조선인들이 해방 이전 일제 통치에 비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맛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렇듯 미 군정 아래서 조선인들의 좌절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미국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자아냈고, 이는 궁극적으로 반미주의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1940년대 조선인들의 반미주의는, 많은 제 3세계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군 점령과 통치에 맞선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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