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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하나의 큰 '부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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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하나의 큰 '부엌'입니다

[귀농통문] 섬사람들의 밥과 살림과 삶

지난해 말이었나,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처럼 살러 떠나온 이주민이 많은 제주처럼, 지리산 자락처럼, 남해도 그러하다고. 그리고 그곳에서 그런 새로운 유입과 삶의 물결 속에서 소규모 독립출판물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는 소식.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김상현 지음·찍음, 남해의봄날 펴냄)도 그중 하나일까. '남해의봄날'이라는 낯설지만 고운 출판사의 이름과 책 날개에 나열된 또 다른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니 맞나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도시에서 출판이나 문화기획 쪽 일을 하다 그리 흘러들어 간 '도시내기'가 쓴 책일 줄 알았는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김상현은 통영 토박이로 지역의 신문기자 출신이다. 잊혀가는 지역의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기록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삶의 씨앗' 시리즈로 기획한 이 책은, 통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섬 570개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섬 여덟 개를 추려, 섬을 둘러싼 바다와 땅이 그곳 사람들에게 생존과 동시에 생계수단으로 주는 선물 같은 먹을거리와 그에 얽힌 생활문화를 담았다. 글쓴이가 섬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그네들의 음식을 맛보고 엮어낸, 2012년 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3년의 취재노트이다. 섬은 곧 하나의 큰 부엌이다.

▲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김상현 지음·찍음, 남해의봄날 펴냄) ⓒ남해의봄날
이 책을 집어 든 열에 몇이나 제목을 읽어내리다 '단디'라는 단어에서 머뭇거릴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경상도 출신인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 '단디'는 '단단하게', '제대로'란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표준말로 바꿔 말하자면 '통영 섬 부엌 심층 탐사기' 정도. 읽기 전 책 제목만 보고선 통영의 다양한 섬 요리, 음식 이야기가 가득 담긴, 예를 들어 철철이 나는 물고기나 해초를 이용한 전통 조리법을 엿보고 배울 수 있는, 그런 글맛 좋은 요리책에 가까운 인문서일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건 ‘부엌’이라는 단어를 너무 단편적으로만 좁혀 이해한 것.

이 책에서 말하는 부엌은 섬사람들의 세끼 밥과 살림살이, 한 가정의 삶과 협업이 필수불가결한 섬마을 공동체의 삶 모두를 품어 안는 하나의 상징이다. 밥때가 되면 집집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작불에서 연탄, 석유곤로에 이어 가스레인지로, 밥불을 지피는 방식이 변했다. 이제는 그런 불마저도 지피지 않고 밥을 짓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밥물이 끓어 넘치지도, 누룽지도 만들지 않으면서 ‘가마솥맛’ 밥이 완성되는 세상.

과거에는 뭍에서 먹고 살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이 척박하나마 어떻게든 살아보려 섬으로 찾아들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섬을 떠나고 노인들만이 섬에 남았다. 점점 빈집이, 빈 아궁이가 늘어나고 있는 섬. 섬의 부엌은 바다에서 난 해산물과 산과 들에서 난 푸성귀가 어우러진 섬 특유의 제철밥상으로 풍요로운데 더이상 이어갈 사람이 없어 섬마을이 다시 '섬'이 된다면. 이럴 때 누군가는 눈 돌려볼 일이다. 육지보다 한 박자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는 섬에서 반농반어하며 생태적으로, 자립적으로 살 수 있다면. 대개 섬 하면 바다로 인한 단절을 떠올리지만 작가는 그것을 다르게 바라본다. 바다를 통해 그 어디와도 이어진다는 섬. 그 섬들의 부엌으로 떠나보자. 우도의 부엌 - 파래김과 톳밥, 한데 부엌과 배 부엌

제주에만 있는 줄 알았던 우도가 통영에도 있다. 예전부터 물이 귀했던 우도는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바다에 생선은 지천이지만 생선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섬 아낙들은 톳에 보리쌀을 조금만 넣어 양을 불려서 먹는 '톳밥'을 지어 먹었다. 우도는 김으로도 유명한데 보통 김은 100장이 한 톳, 우도 김은 두툼해서 한 톳이 40장, 파래김은 열 장이 한 톳이다. 파래김은 한겨울 바다에서 훑어온 파래를 맑은 민물로 씻어 네모난 파래발 위에 건져내 돌담이나 밭둑 사이에 말려 만든다.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아궁이 부엌이 아니라 마당에 임시로 거는 부엌인 '한데 부석(부엌)'이 우도에 있다. 한낮에 고동이며 따개비 등을 가득 잡아 저녁이면 한데 부석(부엌) 가마솥에 불을 피워 시원한 갯바람 맞으며 뜨거운 고동을 까먹었을 우도의 한여름 밤.

그 밖에도 주로 배 뒤편 갑판 위에 있었다는 ‘배 부석(부엌)’은 나무로 상자를 짜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붉은 황토를 부어 불이 옮겨 붙는 걸 막았다. 몇 끼를 쫄쫄 굶다 바다에 둥둥 떠서 먹는 그 뜨신 밥은 반찬 없이도 정말 꿀맛이었을 것이다.

▲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앞바다에서 이 마을 해녀들이 갓 잡은 성게를 손질하고 있다. ⓒ연합뉴스

욕지도의 부엌 - 고등어와 간독

봄부터 가을까지 욕지도 앞바다는 회유하는 고등어로 가득했다. 고등어를 따라 전국에 몰려든 고등어잡이 배로 밤바다는 대낮처럼 환했고, 고등어가 돈이 되니 그 돈을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창 때는 통영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기도 했다. 고등어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간고등어도 발달했는데 이 간고등어를 저장하는 독을 '간독'이라고 한다. 욕지도에는 아직도 '간독'이 남아 있는 마을들이 있다. 집집이 된장독, 고추장독이 있듯 간독이 있었다. 한창 잘나가던 욕지도의 고등어는 1970년대 남획과 지구온난화로 인한 수온상승으로 사라졌다가 '원형 내파성 가두리 양식'의 성공으로 다시 부활했다. 고등어구이, 고등어조림 말고도 고등어내장젓갈, 싱싱한 고등어회가 욕지도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추도의 부엌 - 대나무 통발로 잡는 물메기

겨울 추도는 물메기 섬이 된다. 추도 사람들 먹고사는 일이 모두 물메기에 달렸다. 서해에선 잠뱅이, 물잠뱅이, 동해에선 곰치, 물곰이라고 하는 물메기. 짧고 통통한 몸매에 네모난 얼굴로 '못생긴 생선'의 대명사에다 전국적으로 많이 잡히는 흔한 생선이 '추도 물메기'로 대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물메기를 잡는 도구인 '대나무 통발'에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플라스틱 통발로 바꿨지만 추도는 여전히 '대나무 통발'을 고집한다. 플라스틱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가벼워서 잘 뜨고 자연소재라 통발 속에 잡힌 물메기의 신선도를 유지해주어 폐사율이 낮다. '대나무 통발'을 제작·수리할 기술자가 없는 다른 섬과 달리 추도는 아직 실력이 좋은 기술자들이 남아 있어 가능하기도 하다.

매물도의 부엌 - 제주해녀와 성게미역국

남자들이 목숨 걸고 배를 타듯 여자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고 낯선 바다에서 물질에 나섰다. 제주 해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매물도에서는 뭍과 가까운 해안은 '갱문', 가까운 바다나 먼 바다 모두 '바당'이라 부른다. 제주 해녀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매물도 앞바다에서 전복과 성게, 미역, 우뭇가사리같이 돈 되는 해산물을 채취하며 돈벌이를 하고 갔고 더러는 남아 정착했다. 바로 지척에 두고도 거센 물살과 깊은 수심으로 채취할 엄두를 못 내던 해산물을 해녀들이 대량으로 채취하면서 마을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매물도에서는 제주 해녀들이 고향을 그리며 먹던 성게알미역국(성게미역국과 같다)이 자리를 잡았다. 질 좋은 매물도 돌미역과 성게알을 넣고 끓인 성게알미역국은 그 맛이 고소하고도 달다.

ⓒ남해의봄날

학림도의 부엌 - 영등할매와 조개

섬사람들에게 공동체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작은 배로 하는 조업보다 큰 배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공동어획을 하면 수확량은 늘어나고 위험은 줄어든다. 그래서 섬은 함께 일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생활공동체성이 짙다. 바람의 여신 영등할매가 내려온다는 음력 2월 초하루가 되면 학림도 사람들은 바다에서의 무탈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갖가지 제물을 차려 극진히 정성을 올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섬을 빠져나가면서 영등할매를 기리는 할만네의 전통은 사라지고 '위산제'라는 이름의 마을제만 남아 학림도의 당산과 공동우물, 용왕에게 축원을 올리고 있다.

'위산제'는 마을 모든 사람을 비롯한 삼라만상의 평안을 위한 기원이다. 통영에서 조개가 가장 많이 나는 섬이기도 한 학림도. 학림도의 원래 이름은 ‘새섬’이다. 조개밭에서 조개를 캐보면 조개밭을 자주 찾는 새들과, 그 새들을 닮은 조갯살 모양을 발견하게 된다. 조개가 그득한 바다가 학림도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부엌이다.

죽도의 부엌 - 남해안별신굿과 삼치

통영에서 유일하게 남해안별신굿의 전통을 잇는 섬 죽도. 보통 굿판이 개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데 반해 남해안별신굿은 마을의 안녕을 먼저 기원한다. 남해안별신굿이 펼쳐지는 죽도 입구에는 '죽은 자'를 위한 거리밥상과 '산 자'를 위한 손님밥상이 차려진다. 거리밥상은 집집이 밥과 나물, 떡과 과일, 고기를 정성껏 차리는데 그렇게 집집이 정성이 모여 줄줄이 밥상이 이어진 모습은 먹기에도 보기에도 장관이었다. 척박한 섬 환경 특성상 큰 비용이 드는 별신굿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 비용을 감당할 만큼 부를 축적하게 해준 것이 바로 '삼치잡이'였다. 가을 찬바람이 부는 추석 전후로 삼치 풍어가 들면 마을이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삼치는 죽도 사람들의 부엌과 바깥 살림을 책임지며 생활에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주로 먹는 삼치구이, 삼치조림 외에도 죽도에서는 삼치를 회나 초밥으로도 먹는다.

용초도 - 포로수용소와 미역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섬 안에 포로수용소가 세워지고 그로 인해 강제이주를 해야 했던 용초도 사람들. 하루아침에 생활 터전을 빼앗기고 강제철거령에 따라 주변 섬으로 이주하는 시련을 겪었다. 100여 채 집을 잃은 700여 명 주민.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용초도 사람들은 곧바로 마을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번엔 국군귀환포로수용소로 사용된 것. 이마저도 끝나고 돌아왔을 때 주민들을 맞이한 건 황량한 포로수용소 건물과 폐허였다. 괭이와 삽으로 돌과 자갈을 넣어 다져 놓은 땅을 파서 논과 밭을 다시 일구었다. 전쟁은 용초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사람들은 살아야 했고 그 살 길을 땅과 바다에서 찾았다. 수중암초지대인 덕이 많은 용초도 바다는 질 좋은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던 곳. 이것을 미역양식으로 돌려 품질 좋은 미역을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부드러운 물미역과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단단한 마른미역이 용초도 앞바다에서 나온다.

두미도 - 돌담과 도다리쑥국

길에서 만난 어머니의 봇짐을 짊어드리고 어머니가 끓여주신 도다리쑥국을 얻어먹는 풍경. 길에서 만났어도 내 어머니, 내 자식 같은 정겨움이 묻어난다. 정월에 잡은 도다리와 겨울을 이겨내고 막 올라온 어린 쑥으로 끓여내는 도다리쑥국은 생명력이 가득하다. 도다리가 많이 잡히는 두미도는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이기도 하다. 지붕이 날아가기도 하는 거센 바람 때문에 두미도 사람들은 돌담을 높이 쌓았다. 아이 키를 넘어서고, 어른 두세 명 키를 넘어설 만큼 훌쩍 높이. 돌담 기술자 할아버지는 '바람과 물이 통해야 산다'는 선조의 지혜를 이어 돌 하나하의 모양새를 보며 엇박자로 쌓아올려 바람에 길을 내어주며, 하지만 단단하게 돌담을 쌓는다.

ⓒ남해의봄날

조금은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섬을 읽는 시간

책 따라 이야기 따라 여행한 통영의 크고 작은 섬들. 책을 덮고 나니 그 섬들의 어제와 오늘이 맞물려 떠오른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껏 이어져 내려온 것들에 대한 고마움과 귀한 마음이 동시에 차오른다. 짧게 머물다 떠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잠시나마 섬사람이 되어 살듯 조금은 긴 호흡으로 머무는 여행을 통영의 어느 섬에서 한 철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도톰한 파래김을 널어 말리고 대나무 통발로 잡은 물메기를 깨끗한 우물물에 씻어 널다 보면 정말 시간이 천천히 흐를까.

그렇게 살다 보면 그 섬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섬마을 사람들의 짙은 공동체성이 외지사람에게 배타성으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농촌이고 어촌이고 생업을 기반으로 하는 강한 결속력은 너와 나를 가르기도 하니까. 섬이어서 척박하기도 하고 섬이라 풍요로운 모습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제주와 참으로 닮은 통영의 섬들. 개발이나 발전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섬의 생활문화와 부엌의 문화가 이어져갔으면 좋겠다. 한 박자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섬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조용조용 모여들어 땅과 바다에 기대어 꾸릴 소박한 일상이 먼 미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4년 9월 현재 71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 전국귀농운동본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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