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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농민들이 미군 '캔디'를 거부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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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농민들이 미군 '캔디'를 거부한 까닭은?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3)

I.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3. 1940년대 시와 해방 이후 최초의 필화 (筆禍)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소설보다 시에서 더 직접적이고 더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첫째, 미군정의 식량 정책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박석운은 1945년 <포복의 시>에서 미국인들이 식량으로 들여오는 강냉이와 밀가루를 먹고 한인들이 배탈이 나 고통 겪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미군정의 식량 정책을 비난한다. 조남령의 <트루만 대통령에게> (1947)와 황철연의 <양과자> (1948) 역시 조선인들의 입맛에 맞이 않는 밀가루와 과자 등으로 식량을 배급하는 미군정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미군정은 1946년 5월부터 옥수수와 밀가루 등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배급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쌀을 거두어들이면서 이에 응하는 농민들에게 고무신, 양말, 비누 등의 생활필수품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나중엔 쌀 수집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에서 수입해온 캔디를 보급하다가 한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예를 들어 1946년 5월 제주도의 중고등학생 1000여 명은 "양과자는 조선을 서서히 파멸시키는 해독"이라며 미국 캔디와 담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12월엔 서울 근교 강화군이 발칵 뒤집혔다. 쌀을 수집하면서 그 보상 물자로 100만 원 어치의 캔디가 배당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청은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2500만 원 어치의 캔디를 필수 물자로 도입했다. 참고로 당시 비료 한 포대에 400원이었다. 강화군 농민들은 격분해 캔디 받기를 거부했고, 이는 경기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용인군을 제외한 20개의 모든 군에서 캔디 수령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유진오는 1946년 9월 1일 약 10만 명이 모인 국제청년의 날 기념식장에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를 낭송했다. 그리고 이틀 뒤 체포 구금되었고, 1946년 10월 미군정 재판에서 1년 징역 선고를 받았다. 해방 이후 최초의 필화 (筆禍)였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일제 치하도 아닌 해방 정국에서 시 한 수로 감옥에 갇혔는지 알 수 있도록 아래에 몇 대목 (聯)옮긴다.

"왜놈의 씨를 받아 /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 머리를 숙여 / 생명과 재산과 명예의
적선을 받고 있다 / 누구를 위한 /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
그러나 오늘날 또한 /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 / 삼천오백만 불의 빚을 걸머지고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 무리들에게 짓밟혀 / 가난한 동족들이
여기 눈물과 함께 우리들 앞에 섰다 (...)
핏발서 날뛰는 / 외국 주구들과 / 망령한 영감님들에게
저승길로 떠나는 노자를 주어 /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

미군정에서 내세운 죄목은 유진오가 미군정 정책을 왜곡하고 비방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선배 시인 오장환은 1947년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길지만 몇 대목 인용하니, 그 무렵 문예활동에 대한 탄압의 실상을 살펴보기 바란다.

"작년 9월 1일 다만 시 한 수를 읽었다는 죄명으로 1년 징역을 사는 동무 유진오를 보라. 그리고 연달아 작년 12월 29일 (모스크바) 삼상 결정 1주년 기념대회 때 어리석은 내가 시를 읽은 것으로 인하여 나를 찾으려고 내가 없는 틈에 원고를 압수해 갔고, 또 금년 1월 10일 종합예술제 때에도 극장에 임석한 경관이 사전에 원고를 검열하고, 낭독에서 삭제할 곳을 일러준 다음 낭독한 여배우 문예봉 씨가 당국에 불려가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시, 아니 문학작품을 읽었다고 잡아간 일은 그 지독한 일제시대에도 없던 일인데, 지금 민주주의를 외치고 또 민주 건국을 원조하려고 하는 미군정 하에서의 이 불상사는 어인 일인가? 시의 내용에 있는 말씀은 어느 정치연설이나 회합에 가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다(...)

일찍이 우리 시가 이처럼 문제된 일은 없었는데 이처럼 빈번한 당국의 관심과 수십만, 아니 연인원 수백만의 대 관중 앞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 만일에 유진오가 유죄라면 그의 시를 듣고 열광하여 외치는 군중은 무엇인가? 수만의 열광자도 공범이 되어야 하느냐? (...) 오늘 내리눌리는 부당한 억압을 참지 못하여 일어선 우리 문화인들이여! 우리 앞에는 열 백번 결의를 다시 해야 할 크나큰 싸움이 있을 뿐이다. 우리 인민의 벗인 젊은 시인 유진오를 즉시 석방하라"
참고로, '해방 공간'으로도 불리는 미군정 시대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전위 (前衛)시인 유진오 (兪鎭五)는 1946년 당시 24세의 젊은이로, 1950년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1960년대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던 소설가 유진오 (兪鎭午)와 다른 사람이다.

둘째, 미국의 퇴폐적 문화나 그 영향 또는 백인들의 인종차별 등이 비판받았다. 1947년 발표된 박인환의 <인천항>이나 1948년 발표된 김수영의 <아메리카 타임지> 등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박인환은 미군 부대 주위로 성조기가 펄럭거리고 빨간 네온사인이 빛나는 인천항을 지켜보며 영국 국기가 펄럭이는 홍콩을 떠올린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라면 인천은 미국 식민지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랄까.

배인철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1946년의 <인종선 (인종선)-흑인 쫀슨에게>, 1947년의 <노예 해안>, <흑인녀>, <쪼 루이스에게> 등을 들 수 있다. 점령군이지만 비인간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흑인 병사들을 보며, 약소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동정심을 넘어 동지애까지 보여준다. 백인을 '허연 놈'이나 '원수'로 표현하고 조선을 '창살 없는 우리'로 묘사하는 <흑인녀>의 일부를 소개한다.

"뉴욕 거리에, 시카고에, 시애틀에 / 아니 항구마다 길이 뚫린
촌 주막 뒷거리에서도 / 고향 잃은 딸이여 / 시퍼런 눈알 무지한 사나이
술 취한 힐쓱한 허연 놈에게 / 값싼 알코올에 네 살결 맡기는구나 (...)
이 땅에서도 우리의 누이들 / 낯설은 이토 (異土: 이국)에서
원수에게 꺾인 꽃들이 / 해방이 되었다는 고향에 다시금 창살 없는 우리에
네 몸을 함부로 던지는구나"

이러한 배인철의 시에 대해 이상하고 새로운 내용을 써서 문학계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시도라고 깎아내리거나 비판하는 문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위협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나 결국 1947년 5월 남산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셋째, 외세의 의한 분단에 대한 반대나 이념적 적대감도 시에 표출되었다.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갈망했던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여상현의 <칠면조> (1947)와 양운한의 <8·15에 부치는 노래> (1948) 역시 외세에 반대하는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며 민족적 자각을 고취시킨다. 이에 반해 김상오는 1948년 <우리는 모멸로써 그것을 돌려보낸다>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더욱 강렬한 반미감정을 토해낸다. 미국인들을 '제국주의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벌서부터 똑똑히 / 원쑤를 가려냈다(...)
너희들로 하여 우리땅 남쪽에서는 / 테로의 선풍과 칼바람이 몰아치고
쌀을 빼앗기고 인민들은 / 기아에 해매고 있다(...)"

넷째, 좌익 전위 시인들은 미국의 점령에 한인들이 항쟁할 것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했다. 김상훈은 1946년 <나의 길>에서 "착취와 탄압과 기만과 군림"에 "불끄럼이를 던지는 내 용감한 방화 범인이 되리라"고 맹세한다. 이병철은 1946년 <뒷골목이 트일 때까지>에서 다음과 같이 가족과 친구들을 죽인 원수들을 잊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나의 아우와 아우의 어진 동무들과 그리고
끼니때마다 아비를 찾는다는 어린것들의 엄마까지를
삼팔식 보병총으로 앗아갔다는데 (...)
눈망울마다 감고 간 원수의 모습을 잊지 않으리
너희들 매운 채찍에 멍들어 쩔름거리는 / 젊음을 오히려 시퍼러니 앞세우고
나는 간다 뒷골목이 트일 때까지 나는 간다"

조남령은 1947년 <나의 눈물 나의 자랑>에서 1946년 가을의 인민항쟁을 기리며 미군정의 탄압과 유린에 복종보다 저항하는 게 적절한 대응이라고 선언한다. 상민은 1948년 <비라>를 통해 미국인들을 '식인종'으로 부르며 미군정의 감시를 피해 "악질 테러를 뚜드려 부시자!"는 삐라를 붙이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역시 1948년 발표한 <다시 황혼>에서 미군정을 '재생하는 나치스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상황과 그에 대한 인식을 잘 살펴볼 수 있어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내 아직 자랑스럽지 못한 / 식민지의 아들로 (...)
마을 육십 호 / 사나운 발길에 헐려 넘어지고 / 아낙네들 모조리
머리를 깎였다는 / 잦게 들려오는 흉한 소식과 함께 / 다시 어두워지는 남조선 (...)
약탈과 살육과 단정 (분단) 정부와 / 그리고 재생하는 나치스의 화신과
아아 우리의 위대한 힘만이 / 황혼에 견디어 / 황혼을 물리치리라 / 동포야
곡성과 환멸을 중지하고 / 밝게 타는 이 횃불 아래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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