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잃어버린 5년' 동안 김대중과 임동원이 한 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잃어버린 5년' 동안 김대중과 임동원이 한 일

[김기협의 냉전 이후]<55> 김대중-임동원의 평화통일 구상

"성심껏 모시고 연구활동을 돕겠습니다."

1995년 1월 23일 김대중을 자택으로 찾아가 처음 만난 임동원이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했다는 말이다. 간단한 표현에 많은 뜻을 품은 말이다.

김대중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활동 아닌 연구활동을 돕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활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연구활동을 돕겠다는 것이다.

통일방안의 연구는 물론 임동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다. 공직생활을 통해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해온 일이다. 그러나 통일부차관에서 물러난 후 2년 동안 그 일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민간에서 그 일을 다시 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김대중의 뜻에 따라 일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김대중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면 언제든지 물러서겠다는 의지가 "돕겠다"는 말에서 느껴진다. 자기 일이 아닌 김대중의 일이니까,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할 때는 물러설 수밖에.

이 만남이 있었던 1995년 1월은 김영삼 정권이 2년을 채웠을 때고, 제1차 북핵위기가 수습된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임기 말까지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은 갈팡질팡을 계속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전향적인 입장이라 할 만한 것이 4자회담 제안이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외교는 그 중요성이 컸다. 그리고 미국은 남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

96년 봄 클린턴이 일본 공식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정상 외교 문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시 미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궁핍한 경제상황과 불안한 정세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일관성 없고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둔감하기까지 한 김 대통령의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는 남한에 들르는 것이 상례처럼 돼 있었지만 클린턴은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 측 내부 논의에 참여했던 미 행정부의 한 관리는 클린턴이 이미 한 차례 남한을 방문했고 김 대통령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당초 남한 방문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

남북관계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던 레이니 당시 주한 미 대사는 한반도 평화 구축에 유익한 이야기가 나올 만한 여지가 없다면 클린턴이 시간을 내어 남한에 들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재차 청와대 측에 통보했다. 결국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과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양국 대통령이 그와 같은 성격의 제안을 채택하고 발표하도록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554-556쪽)

일본 방문 뒤에 한국에 들르는 관례를 클린턴이 등지겠다고 한 것은 김영삼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3년 11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김영삼의 '행패'를 클린턴이 잊을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다.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 타결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도. 대북관계를 어렵사리 풀어가는 고비마다 쓸데없이 고춧가루를 뿌린 김영삼을 만나기 위해 아무 대책 없이 관례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레이니 대사 등을 통해 '4자 회담' 의제를 확정해놓은 뒤에야 한국 방문을 결정했다. 4자 회담은 1995년 7월 김영삼의 워싱턴 방문 때 한국 측이 선물처럼 내놓고 8월 15일 공식 발표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의 귀국 직후 북한이 한국 쌀 수송선의 진입을 막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영삼은 미국에 아무 협의나 통보 없이 이 계획을 취소했다. 정책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런 식으로 뒤집어버리는 데는 클린턴이 질려버렸을 것이다. 4자회담 약속을 단단히 받아놓고도 클린턴은 서울까지 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도 한 꼬장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4월 16일 제주에 와서 5년 전 노태우가 고르바초프를 만난 호텔방에서 김영삼을 만난 다음 그날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엄밀히 말해서 '한국 방문'이 아니라 일본 가는 길에 들러서 김영삼의 영접만 받고 지나간 것이다.

한-미 공동의 4자 회담 제안에 중국은 물론 북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극한적인 식량난 때문에도 그 정도 온건한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함사건이 터지자 김영삼은 다시 극단적 적대정책으로 돌아섰다. 북한 경수로 건설을 위한 KEDO 활동을 중단시키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을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래 전작권 환수에 가장 접근했던 상황이 아니었을지.

한-미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남한에 있던 미국 관리들은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견해 차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달라진 분위기를 상징하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 장교들이 북한 잠수함 조사를 위해 현장에 파견된 한 미국 무관에게 조사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마지못해 허락한 후에도 조사를 마치고 잠수함을 떠날 때 몸 수색을 받게 한 것이다. 이에 미국 대사관은 즉각 항의했다.

또 96년 10월 중순 중앙일보는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 육-해-공군 차원의 보복 공격을 가하기 위해 한국군이 북한 내 12개 공격 목표를 선정해 놓았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원칙적으로 한국군에 대해 전시 '작전 통제권'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돼 있는 주한미군 사령부는 이 기사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

그러던 중 11월 초 김 대통령이 갑자기 공로명 장관을 해임하면서 미국 측의 우려는 증폭됐다. 공로명이 김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 정책에 이견을 표시했다는 보도가 떠돌고 있을 때였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장관의 사임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내던 남한과 미국의 관리들은 안기부가 김 대통령에게 건넨 공로명의 발언 기록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믿었다. 전화 도청을 통해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발언 기록에는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정책에 공로명 개인적으로 이견을 표시했던 내용이 들어 있었다. (<두 개의 한국> 565-566쪽)

1993년의 집권 초기 몇 달간을 제외하고 김영삼은 남북관계에서 극단적 대결정책을 추구했다. 레이건이 대결정책을 통해 소련을 붕괴시킨 업적을 그대로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의지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인정할 수 있고, "갈팡질팡"이란 표현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바란 대결정책은 현실적 타당성이 없는 것이었다. 대결정책을 원래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비교적 현실주의적인 클린턴 행정부가 정권을 맡고 있어서 김영삼의 의지를 억눌렀다. 김영삼의 의지는 5년 동안 남한이 북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맡지 못하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정책은 '갈팡질팡'이라기보다 '현실부적응'이었다.

정부의 힘에 비해 민간 영역이 미약한 한국 상황에서 아태재단의 역할은 연구의 영역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1995년 2월 초 아태재단 사무총장(겸 재단 부이사장 겸 아태평화아카데미 원장)에 취임한 임동원은 연구 영역에서 아태재단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김대중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 도움이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었다고 나는 본다. 김대중의 기존 구상을 확인하고 뒷받침해 주는 것을 넘어 수정까지 시도했던 것이다.

내가 제시했던 이러한 문제점들은 토론 과정을 통해 대부분 그 내용이 더욱 충실한 것으로 발전되었으나 한 가지 문제점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나는 '남북연합' 단계로 진입하는 데도 한반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상당한 준비기간을 거쳐야할 것임을 지적하고, 그 이전의 단계로서 '화해협력' 단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나는 화해협력단계 역시 통일의 중요한 한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1990년대 초부터 주장해온 것으로서 1993년에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수용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구태여 '연방제' 단계와 '완전통일' 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즉 1단계 화해협력 단계, 2단계 남북연합 단계, 3단계 연방제통일 단계로 정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3단계론, 즉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이라는 단계공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제시한 '화해협력' 단계를 통일의 과정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으며 "남북 간에 합의만 되면 화해협력 단계 없이도 '남북연합'은 언제든지 즉각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대통령이 된 후에는 '남북연합'의 즉각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따라서 남북연합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에 화해협력의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화해협력을 지향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화해협력' 단계도 '남북연합' 단계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분명한 한 과정임을 인정하게 된다. (<피스메이커> 322쪽)

▲ 임동원 전 장관(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화해협력' 단계의 별도 설정을 둘러싼 두 사람의 이견은 전문연구자와 정치가의 입장 차이를 비쳐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연구자로서 임동원은 이 과제와 관련된 현실조건을 엄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현실조건은 양쪽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1990~1992년간 임동원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중에서 북한과의 실질적 접촉을 가장 많이 가진 대표로서 북한 상황, 특히 북한 지도부의 상황에 가장 정통한 남한 관리였다. '남북연합' 단계를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장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북연합' 단계를 곧바로 바라보기보다 '화해협력'의 단계를 거쳐야 하겠다는 그의 판단은 북한의 적응력만이 아니라 남한사회의 적응태세도 고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극적 긴장완화라 할 수 있는 '화해협력'의 중간단계 없이 적극적 통합의 길인 '남북연합'에 곧바로 뛰어드는 데 불안을 느끼는 남한 내 세력과 계층의 존재를 노태우 정권에서 일하는 동안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소극적 중간단계를 통해 긴장완화의 이점을 확인함으로써 반대세력의 범위와 반대의 강도를 줄일 필요를 그는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한편 정치가로서 김대중은 '화해협력'의 자세 정도는 정치적 지도력을 통해 쉽게 갖춰질 것으로 보고, 별도의 단계를 설정할 필요를 부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정작 대통령이 된 후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정권 획득조차 김종필의 보수세력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던 현실조건을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초기의 중간단계 설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종단계의 성격이었다. 목표를 낮춰 잡고자 한 임동원의 입장이 지식인의 자세에 부합하는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분단이라는 불행한 상황은 몇몇 사람의 의지로 빚어진 것이 아니고,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이런 거대한 역사적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만한 마음을 피해야 한다. 분단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완전통일'을 너무 앞세우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연방제를 바라보는 것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은 성실한 자세보다 화끈한 자세에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임동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기도 했고, 큰 행운이기도 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