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시대 희생양이 되어 피해자의 모습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경쟁 패자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차별하고 멸시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오찬호 연구원은 지난해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지금의 20대가 괴물이 되었다고 했다. 학력 위계주의 사회 속에서 20대는 피해자였다가, 금세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대학생들은 대학평가를 주관하는 <중앙일보>를 향해 '대학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마음, 대학을 기업화해도 무방하다는 마음을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에선 <중앙> 평가에서 '오버 더 스카이(SKY)'를 한 어느 대학 학생들을 조롱하고 멸시한다.
그래서 오 연구원은 고려대 총학부터 시작한 대학평가 거부 선언이 '반쪽짜리'라고 혹평한다. 그는 지난 15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대학생들이 "대학평가만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명예박사 학위와 맞바꾼 건물을 들락날락하면서 삼성을 거부하고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지금의 20대에 있는지, 많은 이들을 열패감으로 몰아넣는 '고연전' 혹은 '연고전'을 거부할 수 있는지.
그는 다만 이같은 물음이 20대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으로 흐르는 건 경계했다. 점점 기업화되는 대학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오 연구원을 학생들이 초현실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고 했다. 경쟁의 완전체로 자라난 학생들이 거대한 담론이 아닌 일상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 서열화를 조장하는 <중앙>은 비판하면서 '고연전'은 거부하지 못하는 지금 대학생들의 모습은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는 암울한 증거다. 오 연구원과의 대화 속에서 확인한 학력 위계주의의 그늘은 생각보다 더 넓고, 어두웠다. 편집자.
"자본주의 비판하니까, 초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봐요"
프레시안 : 언론사 대학평가로 대학의 기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올해는 급기야 대학생들이 대학평가 거부 선언을 했다. 대학 사회 분위기가 어떠한가.
오찬호 : 지금 <진격의 대학교(가제)>라는 책을 쓰고 있는데, 이제 대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차원에서 이 책을 쓰고 있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수업에서 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가르치는 나를 대학 사회에서 점점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모든 대학이 대학평가를 중심으로 목표로 움직인다. 언론사 대학평가뿐 아니라 교육부가 하는 대학기관평가인증도 산업계 요구에 얼마나 맞췄는지가 쟁점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기업 실무와 상관없는 인문사회 철학적인 과목들을 없앤다. 과목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대학마다 글쓰기 수업이 있다. 예전엔 인문학 책 읽고 글을 쓰는 수업이었는데, 이제 시대 변화에 발맞춘 글쓰기를 한다. 중간고사로 자기소개서 쓰기 시험을 보고, 압박면접 모의시험을 본다.
그러니 수업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 모습이 굉장히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나를 초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제가 신기한 거다. 그래서 정규 수업을 하는 데도 매번 특강하는 것 같다. 해가 갈수록 학생들과 계속 멀어진다는 느낌이다.
학생과의 관계뿐 아니라, 교수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수들이 다들 대학평가 심사관들 접대하고, 외부 펀드를 따온다. 강사들도 예외 없다. 그런데 나는 참여를 안 하니 공동체에 기여 안 하는 것 같고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지방대에서 강의전념교수를 뽑는다기에 지원해볼까 했다. 근데 그 학교에서 아주 웃긴 조건을 내밀더라. 이 학교의 특정 학과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제가 거기 교수가 되면 사감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거다. 애들을 아침 5시에 깨우고 운동시킨 다음 6시 반에 토익 수업에 가게 지도하라는 거다. 요즘 대학들이 이렇다.
모든 대학이 기업화되면서 기존 학문을 정체된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학문은 정체돼 있을 때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이 사회 변화에 맞춰야 하긴 하지만 변화에 꼭 맞출 필요 없다. 그런데 지금 대학은 모든 게 기업 실무 위주, 경영학 위주다. 취업 안 되는 과는 밀어주지 말아야 한단 얘기가 대학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나온다. 그러니 철학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도 공격적으로 변한다. 철학 얘기를 한마디라도 하려고 하면, '선비 납셨네, 유토피아 좋죠' 이런 식이다. 대학을 떠나고 싶다.
"대학평가 거부 선언, 대학 간 양극화 심화시킬 수도"
프레시안 : 대학생들이 대학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나.
대학평가가 과열되면서 경영학과만 살고 나머지 학과는 개편되거나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들의 학문의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 교양 수업을 들으면 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건지, 그리고 그런 게 인생에서 왜 중요한지 모른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되면 의미 없는 걸로 본다. 돈 안 되는 건 나쁜 거다. 그러니 몇몇 대학 학생회가 대학평가 거부를 한다 해도 찻잔 속의 태풍이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몇몇 대학에서 대학평가 거부 선언을 하면서, 각 대학 총학마다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오찬호 : 사실은 이미 두 학교 총학에서 나한테 상담을 요청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저는 "뜻은 좋지만 뒷감당을 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고 했다. 고려대가 처음 시작하면서 이미 대학평가 거부 선언은 고려대의 것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해봤자 아무도 기억 못 한다. 총학 차원에서야 '우리가 이런 업적 세웠다'하고 자랑할 거리가 생기겠지만, 나머지 같은 대학 학생들에게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취업난이라는 엄연한 현실이 눈앞에 있지 않나. 취직할 때 티끌 하나라도 거슬릴까 싶어서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도 세탁하는 세상이다.
거부 선언한 학교 재학생 중에 졸업 학기에 있는 학생들이 면접장에 간다고 생각해보자. 이른바 '스카이(SKY)' 출신이면 똑똑한데 문제의식도 가진, 깨어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학교 출신은 '살생부' 명단에 올라간다. 안 그래도 사회적으로 평가가 안 좋은데 더 역효과가 나는 거다. 거부 선언이 대학 간 양극화를 더 양극화시킬 수도 있다. 총학이라는 게 결국 학생들을 대표하는 주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학교 이름을 달고 거부 선언을 하는 게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을 일으킬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고려대, '고연전' 공론화해본 적 있나"
프레시안 : 처음 거부 선언을 한 고려대의 경우, '성대에 뒤지니까 이제야 거부 운동 하느냐', '<중앙> 평가는 나쁘고 다른 평가는 착한 평가냐' 이런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오찬호 : 사회학을 공부하는 나로선 "대학 평가를 하는 너희의 시도는 참 좋았어. 그런데 너넨 반쪽짜리야"라고밖에 할 수 없다. 왜냐. 고려대 학생들은 <중앙>이 불필요하게 대학에 등급을 매긴다고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일상에서 서열을 거부하느냐고 물으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학력 위계주의 사회에서 큰 이득을 본 집단이다. 지금까지 누릴 것 누려왔던 건 어떻게 할 건가. 그런 물음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서열화를 조장하는 <중앙>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고대 총학은 '민족 고대'라는 말을 버리지 않았다. '민족 고대'란 말은 곧 본인들이 국가대표란 소리 아닌가. 또 고려대 로고가 크게 박힌 점퍼를 입고 다닌다. 또, 고려대 같은 큰 학교에선 기업이 건물을 지어주고, 그로 인해 서열이 더 올라가기도 한다. 다른 작은 학교에선 건물 하나 짓겠다고 동문들 돈 끌어오는데.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한테 명예박사 하나 주고, 건물 올리고 그렇게 해왔지 않나.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된다. 일상에서 삼성에 대한 비판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연전' 혹은 '연고전'이다. 선배들한테서 물려받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또 축제니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즐기는 게 누군가에게는 박탈감을 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한국사회의 고질병을 더 악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면 재고해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고연전에 대한 문제의식은 한 번도 고려대와 연세대 안에서든 밖에서든 공론화된 적이 없는 것 같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비판할 힘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꿀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게 기업이다. 그런데 대학이 기업화되는 걸, 그렇게 일상에 기업이 침투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가. 과연 내 불편을 감수하면서 비판할 수 있는가. 힘들다.
대학평가 선언한 학생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진정성을 일상에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다. 고려대 학생들이 이 사회에서 '고대생'이란 타이틀만으로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학생들이 한 언론사 평가만 거부하는 게 이중적이라고 보인다면, 그건 학생들이 사고를 확장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 테다. 그렇기에 탓할 수도 없다. 학생들은 그런 걸 배우지 못하고 자라났다.
<중앙>을 비판하는 동시에, 학생들이 스스로 어떤 걸 공부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교양 수업이 너무 줄어들지 않는가, 경영학 수업에 밀려 예술 전공 학과가 사라지지는 않는가. 학생회는 그런 걸 신경 써야 한다.
"세월호 사고가 신자유주의의 문제?" 경쟁의 완전체로 자라는 아이들
프레시안 : 고려대 총학 측에 '고연전' 비판부터 해보라는 얘기는, 대학생들이 학력 위계주의 사회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로 들린다. 저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이 책이 나름대로 화제가 되면서 "자기 안의 차별 의식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 많았는데, 이 책을 읽은 학생들에게서 실제로 변화를 감지했나.
오찬호 : 언론에서도 꽤 소개가 됐고, 서점에서 사회과학계열 판매 순위 상위권에 있긴 했다. 그래서 내 책으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웃음). 그런데 그 정돈 아니었다.
내 책을 읽고 뭔가 많은 걸 느꼈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은 내 책을 읽고 난 후 더 큰 혼란을 느끼는 것 같다. 그 책도 결국 문제의식만 있지 해결책이 없지 않나. 그래서 그게 옳은 지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마주한 현실을 보면 '멘붕'이 오나 보더라. 순간적으로 공감은 불러일으키지만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는 암울한 증거인 셈이다. 이 책을 쓴 게 잘 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현실 세계와 내 수업은 전혀 동떨어진 두 개의 세계다. 마찬가지로 수업 시간과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세월호 사건'은 별개다. 나는 그 두 사건 이후 너무 슬퍼서 한 번쯤은 수업에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두 문제가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하면 학생들이 이해를 못 한다.
연결이 안 된다면, 그게 왜 이어지는지를 알려주면 된다. 그런데 학생들은 두 사건과 신자유주의를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불순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한테는 큰 충격이었다. 20대를 싸잡아 욕하자는 게 아니다. 결국 경쟁이 낳은 결과다. 예전엔 인권 교육을 딱히 안 해도 어떤 것이 '비인권'인지 대충은 알았다. 그런데 경쟁으로 인한 잣대가 너무 힘이 세지니 비인권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20대가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 이런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언제는 안 그랬냐'고 묻지만,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는 크다. 두 배 만큼의 차이가 나는 거니까.
과연 대학생만 문제일까. 앞으로 더 심해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경쟁의 완전체가 되어간다. 지금 내 딸이 일곱 살이다. 유치원에서 다문화 교육을 받는데 나는 정말 의미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학부모들끼리 모였는데 엄마들이 우리 유치원이 너무 공부를 안 시키는 것 같다고 수업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더라. 할 말이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철학, 시민정신, 공공성을 배울 수 있을지 암담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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