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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초의 반미 데모는?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40년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군정 (1)

1945년 8월 한민족은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한민족의 힘으로 해방을 성취한 게 아니었기에 외세에 의해 38선을 따라 국토가 분단되고 독립으로의 길은 험하고 멀었다. 이와 관련해 한반도가 언제 왜 분단되었는지 잘 모르거나 김일성에 의해 분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왜곡된 반공교육에 따른 오해와 편견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이승만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는 듯하다. 미군의 통치를 신탁통치와 혼동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1945년 9월 미군들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자 한인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문학예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일 시인 노천명은 미군을 '천사'로 찬양했고, 좌익 시인 오장환도 지구 반대쪽 "맨 끝에서 오는 동지"들에게 환영의 노래를 바쳤다.

그러나 ‘해방군’에 대한 열렬한 환영 분위기는 그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직후부터 싸늘하게 식어갔다. 1945년 9월 8일 약 500명의 한인들이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에 모여들 때 일본 헌병이 총을 쏴 한인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다쳤다. 이틀 후에는 2명의 한인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의 충돌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하지 (Hodge) 미군사령관은 미군 '상륙작전'에 한인들이 방해될 수 있으니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본 헌병에 지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인들이 한인들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처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35명의 한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죽은 반면, 단 1명의 일본인도 한인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일은 없었다.

게다가 하지 사령관은 군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총독을 비롯해 한인들로부터 극도로 증오 받고 있던 일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결정적 실수'에 대한 항의로 미 군정 최초의 반미데모가 일어났다. 매카써 (MacArther) 연합군 총사령관이 "미 점령군에 대한 어떠한 적대 행위도 사형선고를 포함한 중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지만, 한인들의 항의데모는 그치지 않았다. 나아가 하지 사령관이 공언했듯 한인들의 즉시 독립이 승인되지 않고 38선을 따라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하자, 미군 점령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시위가 9월 중순부터 격렬해졌다.

'해방군'이 억압자로 바뀌는 가운데 한인들에게 일본 식민통치자들과 미군들의 실질적 차이점은 피부색뿐이었다. 일본 식민통치 체제의 연장에 불과한 미 군정은 많은 한인들로 하여금 반미감정을 갖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미군들은 대개 과거에는 친일파였으며 영어를 잘하는 부유한 한인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비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간이 흐를수록 다수의 한인들이 반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 군정은 문학예술 속에서도 점점 부정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1. 공개서한과 평론에 그려진 미군통치

한반도의 독립이 지연되고 분단이 굳어지자 한인들은 1946년부터 미국과 소련 당국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기영은 1946년 남쪽의 하지 장군과 북쪽의 치스티아코프 (Chistiakov)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군 사령관에게 1905년의 '태프트-카쓰라 비밀협약'과 관련해 한인들이 미국에 원한을 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일본보다 분단된 한반도가 훨씬 더 불행하다고 한탄하며 미군과 소련군이 될수록 빨리 떠날 것을 촉구했다.

참고로, 태프트-카쓰라 비밀협약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7월 태프트 (Taft) 미국 육군장관과 카쓰라 (桂太郞) 일본 총리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05년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맺고, 서양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1882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던 미국은 가장 먼저 조선을 떠났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조차 1946년 8월 31일 사설을 통해 하지 장군에게 한인들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보다 미 군정 아래서 더 고통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미국의 한반도 이해 부족과 통역가들을 앞세운 행정을 비판하며 여론에 귀 기울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참고로, 1945년 9월 매카써의 포고령 1호에 따라 영어가 미 군정의 공식 언어가 됨으로써 영어는 한인들을 고용하는 데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따라서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미군들의 측근이 되었고, 이에 따라 미 군정은 '통역가 정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것이다.

정모는 1946년 미군정에 대한 반대가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민중의 참된 소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일제 치하에서 한인들의 생활은 매우 열악했지만, 미군 점령 아래서의 생활은 더욱 비참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6년 4월 미 군정 정보부의 여론조사에서 일본 식민통치보다 미 군정을 선호한다는 한인들은 절반을 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만 실시한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9%가 미국에 의한 해방에서 오는 고통보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오히려 선호할 정도였다. 이에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인들의 비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한보영은 1947년 미 군정의 현실이 일본의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쁘다면서, 일본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한인들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충격적 내용의 글을 썼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1946년 3월부터 일본에 불법 입국한 한인들이 3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고, <뉴욕타임스>는 1946년 9월 14일 일본에서의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 고국을 떠나는 한인들의 '대규모 밀항' (wholesale smuggling) 을 막기 위해 미국 전투함들이 일본 서해안을 순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갑섭은 1947년 미 군정이 실패한 근본적 이유가 한반도에 대한 지식과 준비 부족이라고 분석하면서, 해방된 한반도에 '개혁'보다 '질서'를 앞세운 게 잘못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트루먼 미국 대통령도 1956년 펴낸 회고록에서 미국 '점령군들' (occupation forces)'이 1945년 9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상륙할 때까지 조선을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밝혔듯,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훈련과 준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 장군이 선언했듯 미군들의 임무는 오로지 질서 유지였고, 미국 관리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한인들의 요구와는 반대로 일본의 식민통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이다.

한인 지식인들은 미국 문화와 정치이념도 비판하거나 거부했다. 김용곤은 1946년 강대국은 약소국들을 침략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데 문화의 기만적 특성을 이용해왔다고 비난하며, 겉으로는 아무리 매혹적일지라도 계급갈등이나 사회 불평등을 초래하는 자본주의나 사유재산제에 기반을 둔 외국 문화는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해방된 한반도에서 민주적 문화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문화혁명을 이끌어가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무렵엔 38선 이남에서든 이북에서든 지식인들이나 민중이나 압도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호했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었다.

오상용은 1947년 미국 문화에 대해 조금 온건한 주장을 폈다. 미국의 이념이 개척정신, 자유, 평등, 독립, 현대 민주주의 등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황금만능주의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가 독립되면 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절충점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설의식은 1947년 미국과 소련 대표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인들 최고의 과업은 통일이라며 악마 같은 38선은 무조건 제거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소련식 공산주의 독재나 미국식 자본주의 독재 모두 한반도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응진은 1948년 미국과 소련 국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국의 문화적 침투를 비판하며, 특히 미국이 한반도를 분단한 데 이어 민주화와 원조의 구실로 내부 갈등을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미군 점령 말기엔 더욱 급진적 내용의 글이 발표되었다. 정진석은 1948년 미 군정의 통치를 새롭게 등장하는 제국주의라고 간주하며, 문인들에게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 그리고 새로운 외세 식민통치에 맞선 자주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해방 운동에 기여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한인들에겐 해방이 독립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독립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지속적 투쟁과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이동훈은 1948년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들이 세계평화라는 미명 아래 약소국들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적들이라고 간주하면서, 한인들이 그 적들에 맞서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주적 해방운동을 전개해나갈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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