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글리시'를 하는 교수 때문에 조기 유학파 학생이 영어 강의 수업에서 F를 맞는 현실은 촌극에 가깝다. 그러나 함부로 조소를 흘릴 수도 없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 시 외국어로 연설을 하고 언론사가 국제화 명분을 내세워 대학 '등수 놀이'를 하는 사이, 우리말은 병들어가고 있다. 교수들이 영어로 학문을 하는 사이, 우리말은 말라 비틀어져 간다.
구 교수는 지난달 30일 출간한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를 통해 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특히 우리말로 학문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언어는 평등하다'는 관점에 '학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더해 내린 결론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학의 영어 강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영어로 학문하기를 강제하는 대학 당국과 언론사,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진행됐다. 편집자.
"대통령 불어 연설? 왜 함부로 우리말을 무릎 꿇리나"
프레시안 : 책 제목이 불편하게 들린다. 어떻게 지은 건가.
구연상 : 제목 짓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처음 지은 제목은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었다. 밋밋한데다 이렇게 쓴다고 해도 중앙일보가 바꿀 것도 아닐 것 같았다. 다시 고민하면서 역사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병신'이란 말의 유래를 알게 됐다.
병신은 원래 아픈 몸이란 뜻이다. 조선 시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몹쓸 몸이 됐다. 그런데 다친 이들이 무리 지어 행패를 부리면서 병신이란 말의 가치가 뚝 떨어졌다. 배척당하고 저주 받게 됐다.
돌봄이 필요한데 버려지는 그들처럼, 우리말이 배척당하고 있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어렵다는 점을 물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이 왜 그렇게 돼 가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한번 물어보고 싶다. 정말 우리말이 '병신 말'이냐고, 아마 이런 질문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뭔지 자문해봤으면 좋겠다. 대통령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우리말에 책임감을 느끼는지 묻고 싶다.
이번에 국제학술대회에서 카자흐스탄 분을 연사로 모시는데, 힘없는 소리로 영어로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더라. 관례가 그러니까. 그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 동시통역을 해드리겠다고 하니 굉장히 감격하셨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먼저 영어로 한다. 그렇게 해야 더 능력 있어 보이는 줄 아니까. 우리말은 무슨 쓸모가 있나.
"외국어 연설 하는 대통령, 은연중에 언어에 계급 만들어"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도 해외 순방 시 연설을 통해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뽐내곤 한다.
구연상 : 대통령이 외국어로 연설하는 것은 방문국 국민에 대한 배려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연설을 듣는 한국인은 대통령이라는 직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우리를 대표해 외국에 갔다. 우리를 대표한다는 것은 우리말과 글과 문화와 정신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대통령이 외국 언어로 연설을 하면 언어적 차원에서는 한국어가 불어에, 중국어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물론 어떤 외교적 목적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는 언어를 무릎 꿇리게 해도 되는 건가. 말레이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국제행사에서 말레이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를 사용할 경우 처벌받도록 하는 법이 있다. 그 정도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말은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함부로 낮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외국말을 사용하면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려면 혹은 어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영어로, 불어로, 중국어로 연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다. 은연중에 언어에 계층, 계급을 만드는 거다.
"세계를 지배하던 네덜란드, 그러나 지금 아무도 네덜란드어로 학문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어떻게 하면 우리말이 학문 세계에서 배척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구연상 : 계속 쓰면 된다. 박태환도 원래 그렇게 수영을 잘했겠나. 계속 하다 보니 잘하는 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말로 학문한 지 60년도 안 됐다. 영어도 잉글랜드 소수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데이비드 흄이라는 학자를 만나 학문어가 됐고, 그 언어를 통해 민주화를 이루었고, 그 언어의 꽃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러고 나서 400년 지나고 나니까 모든 영역이 완전히 영어로 재편됐다. 우리말이라고 성장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한국어가 완벽하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잘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언어의 세계를 펼쳐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낱말의 사슬이라고 하는데 낱말들이 죽 이어져야 개념 전체가 묶여 드러난다. 그런데 이 사슬에서 어떤 부분은 영어, 어떤 부분은 일본어. 어떤 부분은 불어, 이런 식이다.
우리말이 학문하기에 아주 불편하다면, 낱말을 만들어야 한다. 외국어를 대체할 우리말이 없다면, 말 만드는 법을 창안하면 된다.
타자 치는 사람을 우리말로 뭐라고 할까. 영어로는 'typewriter'다. 'type'에 'er'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거다. 달리는 사람이란 뜻의 영어 'runner'도 'run'에 'er'을 붙인 거다. 접미사 하나만 있어도 단어가 무궁무진하게 생긴다. 나는 '무엇 하는 사람' 접미사로 사람을 뜻히는 '이'를 붙인다. 그럼 타자 치는 사람을 '타자치미'로 쓸 수 있다, 혼자 앉은 사람은 앉으미. 여럿이 앉아있으면 여럿앉으미. 이렇게 하면 모든 동사와 형용사는 무한대로 명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복합어를 만들어 내면 100년 이내에 영어를 다 따라잡을 수 있다. 말이란 것도 역사를 갖기 때문에 노력만 하면 키울 수 있다. 영양분을 줘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우습게 보거나 조급해한다. 충분히 우리말로도 할 수 있는데, 귀찮다고 번역하는 것을 포기하고. 외국어로 모든 학문어를 대체해버린다. 적어도 문장에서 동사와 형용사 정도는 우리말로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장 전체를 영어로 바꿔버리면 우리말을 되살릴 길이 없어진다. 그럼 제 언어를 잃고 영어를 쓰는 필리핀처럼 되는 거다. 네덜란드는 16세기엔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였는데 지금은 지원금을 준다고 해도 네덜란드 사람들이 네덜란드말로 학문을 하려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말을 어떻게 할지는 우리들에게 달렸다. 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부모에 비유한다. 먹고사는 게 바빠 아이를 방치했다. 그러다보니 애가 병이 생긴 걸 나중에야 알았다. 어떻게 할 건가. 아이를 버릴 건가. 아니면, 병을 고치기 위해 헌신할 건가. 우리말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거다. 우리말은 누구도 키워줄 수 없다.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언어 선택의 자유를 뺏는 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학문어로서 한국어가 살아야 남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썼다.
구연상 : 나는 한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나의 외침이다. 많은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고, 영어로 논문을 쓰라고 교수에게 강요한다. 학문어를 영어로 하라고 못 박는 것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다. 특히나 인문학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말이 다르면 내용도 바뀐다. 말을 바꾸면 인문학의 역사를 어떻게 추적해갈 수 있나. 인문학자에게 영어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은 학문을 추구하는 사명을 저버리라는 말과 같다. 삶에 대해 묻고 그 의미를 밝혀서 사람다움의 길을 찾으라는 것인데, 뭘로 살필 건가. 언어 선택의 자유를 뺏는 것은 곧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사실 해결 방법은 쉽다. 번역을 하면 된다. 학문 번역은 필수다. 한국어로 쓴 걸 영어로 그대로 번역해서 해외학술지, 국내학술지 두 군데 다 싣는 거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하나의 학문 성과에 대해 두 개의 언어가 만들어진다.
물론 우리말로도 쓰고 영어로도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국립언어원이든 어디서든 정부 보조를 받아 번역기를 개발해야 한다. 물론, 개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전 국민이 토익을 배우느라 거의 1000억 원을 쓴다. 국가적으로 보면 엄청난 시간 낭비, 돈 낭비다, 어쨌든 뭐든 배우면 좋지 않으냐고 하지만, 방학마다 학원 수업을 듣느라 학생들이 독서를 게을리하거나 여행을 못 간다. 창조적 활동에 대한 기회비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화, 국제화라는 미명 하에 영어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았다. 이제 긴 눈으로 우리를 되돌아봐야 한다.
어떤 학교는 '우리의 목표는 10년 안에 노벨상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강의를 하고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0년 안에 상 타려고 우리말을 다 버리면,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사나. 100년 뒤에 우리말로 받으면 안 되나.
영어 잘하는 분들은 의외로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어의 생명은 바로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문자다양성살리기 선언을 서울에서 한다. 말 그대로 문자 다양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행사다. (☞관련기사 : "문자 생태계 100년 후를 읽는다…'세계문자심포지아 2014'")
모든 언어는 평등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사람이 우리가 동등하고 평등하다고 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가 쓰는 말도 평등하다는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언어의 평등권이 나온다. 언어 차별은 인종 차별이고 민족 차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어 다양성의 문제를 인권으로 안 보고 경제 문제로 본다. 영어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영어를 우월한 언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권을 포기한 것이다.
언어 평등이 사라져 어떤 언어가 주도권을 쥐면 그게 권력이 되고 돈이 된다. 더 내려가면 언어가 계급을 만들고, 양극화를 만든다. 그로부터 모든 문제가 빚어질 수 있다. 그러니 언어 평등의 문제는 사회 정의 관점에서 볼 문제다.
"영어 강의 강요하는 대학, 졸업할 때 갖고 나오는 건 열등감"
프레시안 : 영어 강의,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나.
구연상 : 우선, 영어 강의에서는 앎이 없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다. 배우는 것은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다. 스승에 대한 존엄을 깔고 있다. 그런데 서양에선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대학들은 서양의 대학 모델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모델에 충실하려면 지식을 창조해야 한다.
대학에서 앎을 생산하는 자리는 두 군데다. 강의실과 논문이다. 전수는 어디서도 할 수 있다. 강의를 하지 않아도 전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의는 전수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모름이 고백돼야 한다. 물음 없이는 모름은 절대 고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앎의 핵심은 물음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어 강의를 생각해보자. '마네킹 강의'다.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수업을 듣는다. 고개 숙이면 감점한다고 해도 안 고쳐진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소통이 안 되고, 질문이 안 나오는데, 앎이 있을 수 있나. 침묵하기 위해서 대학에 오는 게 아니지 않나. 앎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오는 거다. 시험 보려고 오는 게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건데 영어 강의는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렇게 4년간 말라 비틀어져서 졸업할 때 갖고 나오는 건 열등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왔는데 영어의 노예가 된다. 자유는 타협의 대상이 된다. 학교에서는 '영어 강의 듣기 싫지? 그럼 절대평가로 해줄게' 이렇게 나온다. 결국 학생들은 자유를 헌납하고 이득을 챙겨간다. 자유를 빼앗아간 사람도 문제지만 빼앗긴 사람도 책임이 있다. 스스로 자유로울 권리를 찾아야 한다.
"<중앙일보>를 저절로 구르는 마차로 만든 게 누구?"
프레시안 : 학문의 자유를 빼앗은 게 누구인가. 최근 대학교 총학생회 차원에서 <중앙일보> 대학평가 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평가 기관인 언론사에 책임이 있다며 규탄 기자회견도 벌이고 있다.
구연상 : 대학평가 이후 대학에서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떤 지방대의 경우 매년 정원 충족이 어려웠다. 그래서 등록금을 반값으로 받고 중국 학생들을 많이 데려왔다. 그래서 중국어로 강좌를 많이 개설했다. 그래서 이듬해 순위가 껑충 뛰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 신뢰가 떨어졌다. 그래서 <중앙>이 다시 '다양성 지수'란 걸 만들었다.(<중앙>은 본래 '학위 과정 등록 외국인 학생 비율(10점) 하위 지표였던 '학위 과정 등록 외국인 학생 다양성 부분(5점)'을 2013년부터 따로 떼어놓았다. 편집자) 여러 국가 학생들이 많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거다. 그래서 그 학교 순위가 다시 뚝 떨어졌다. 땜질하듯 매년 지표가 바뀐다. 이 자체로 평가가 엉터리라는 게 드러난다. 분명 <중앙> 평가는 문제다. 그러나 언론사 대학평가는 언론사의 권리이다. 이걸 비난할 수는 없다. 나는 대응의 문제라고 본다.
총장들은 이 문제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다. 특히 상위권 대학은 앞장서서 중앙일보를 지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학평가 결과는 총장으로서 명예와 직결된 일이다. 그래서 학생이 어떻게 되든, 우리말이 어떻게 되든, 일단 우리 대학 순위만 올라가면 된다는 식이다. 총장들이 묵인·방조를 하면서 이제 대학평가 자체가 사회적 권력이 됐다. 누구도 그 권력을 제어할 수 없다. <중앙> 자신도 제어 못 한다. <중앙> 평가는 이제 저절로 구르는 마차가 되어버렸다.
프레시안 : 총장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대학평가를 묵인·방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구연상 : 어떤 문제가 공동체를 훼손하고, 자신에게도 부당한 피해를 일으킨다면 당연히 문제제기해야 한다. 다만, 책임을 묻기 위해선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한다. 대학평가로 피해를 입는 집단인 학생들이 대학평가로 인해 대학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감 없이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평가를 하는 것은 사기업인 언론사의 자유 영역에 있는 일이므로 인정해줘야 한다. 그들에게 고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대학이 거부를 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대학평가, '등수 놀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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