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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살다 왔는데, 영어 강의 못 알아듣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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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 살다 왔는데, 영어 강의 못 알아듣겠어요"

[대학평가, '등수 놀이'의 그림자·②] '등수'에 목매는 대학, '교육'은 나 몰라라

"rules of origin이 뭘까? 이게 '원산지 규정'이야. 상품에도 국적이 있는데 국적에 따라 처우가 달라져. FTA의 주목적이 관세 철폐잖아. 그럼 'made in China'인지 'made in Korea'인지에 따라 관세를 붙일지 안 붙일지 정해지는 거지…."

서울 소재 A 대학의 외교 통상 교과 '영어 강의' 시간. 교수의 친절한 '한국말' 설명에 학생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필기한다. 한 시간 동안 교수가 주어 술어 골격을 제대로 갖춰 말 한 영어는 단 두 문장. 나머진 몇몇 토막 단어뿐이다.

"이름만 영어 강의인 수업이 되게 많아요. 완전 사기죠. 근데 별수 없는 것 같아요. 영어로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까요."

▲서울 소재 A 대학교 영어 강의 시간. 교수가 주어 술어 골격을 제대로 갖춰 말 한 영어는 단 두 문장에 불과하다. ⓒ프레시안(서어리)

이 강의를 수강하는 김종민(가명) 학생은 "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늘리려고 별 수를 다 쓴다"고 했다. "이게 3학점짜리 전공 수업인데 B 학점 이상이면 1점을 더 줘요. 그 정도는 해 줘야 애들이 듣죠." 학점 추가라는 이점 덕분인지, 강의실은 빈 자리 없이 학생들로 꽉 찼다.

미국에서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김 학생은 2학년 때 들은 수업에선 F를 받았다고 했다. "'콩글리시'라서 진짜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첫 시간은 오리엔테이션이었으니까 다음 수업 땐 괜찮겠지 했는데, 본 수업 땐 더 심한 거예요. 충격받아서 그냥 수업 포기했어요."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영어 강의인가?

언론사 대학평가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국제화' 지표다. <중앙일보>는 지난 2006년 "사회 현실을 반영하겠다"며 국제화 지표를 신설했다. 2006년 총점 500점 중 70점(14%)이었던 게 2014년엔 300점 중 50점(16.6%)으로 비중이 차츰 늘었다.

<중앙>은 무엇이 '국제화'인지 설명은 생략한 채 외국인 교수 비율, 학위과정 등록 외국인 학생 비율, 교환 학생 비율, 영어 강의 비율 등 세부 지표들을 제시했다. 지난달 대학평가 거부 선언 스타트를 끊은 고려대 총학생회는 "'무엇이 국제화냐'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의 국제화를 양적으로만 측정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대 총학이 꼽은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바로 영어 강의다.

김종민 학생이 전한대로 영어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많지만, 교수들의 원성 또한 높다. 서울 소재 B 대학에 3년 전 채용된 강하영(가명) 교수는 "학생마다 영어 실력 편차가 너무 커 어느 수준에 맞춰야 하는지 고민"이라며 "잘 못하는 학생들 기준에 맞추는 편인데, 그럴 경우 수업 진도도 느려지고 잘하는 학생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영어 강의로 인한 교수와 학생들의 고충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지난해 홍지영 부산시의회 연구위원과 이광현 부산교대 교수가 논문 '대학 영어전용강의 실태와 학습효과성 연구'를 통해 대학생 24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 결과를 보면, 37.1%는 강의 이해도가 60% 미만이었다. 80% 이상 알아들었다고 답한 학생은 27.4%에 불과했다. 영어 실력이 좋아졌다는 학생도 25% 정도에 그쳤다.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학교는 영어 강의를 종용하고 있다. 고려대 총학에 따르면, 2014년 3월 기준으로 고려대 안암(서울)캠퍼스의 모든 단과대학, 독립학부는 5과목에서 10과목의 외국어 강의 수강을 졸업요건으로 내걸고 있다. 모든 고려대학교 학생이 적어도 5과목 이상의 영어 강의를 들어야 하는 셈이다.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대 정년 트랙 전임교원의 신규임용 계약서 특약사항에 따르면, 특약사항이 적용되는 모든 신임교원은 임용 기간 내지는 임용 이후 3년 또는 5년 간 모든 학부 및 대학원 강의를 영어 또는 그 밖의 외국어로 진행해야 한다.

교수나 학생 모두 울며 겨자 먹기로 영어 강의를 하는 셈이다.

▲고려대학교 홍보 책자. "고려대학교는 전공교과목의 영어강의 비율을 점차 높여가는 한편, 졸업에 필요한 영어능력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모든 졸업생들이 글로벌 리더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려대학교

대학은 왜 영어 강의에 집착하는 것일까. 서울 소재 B 대학에서 대학평가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전문 영역에 대한 원어 강의 필요성을 느끼는 교수, 학생들이 실제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측면이 있고, 영어 강의는 대학평가 지표에서 외국인 교수를 임용하거나 외국인 학생 등록률을 높이는 것보다 비용이 크게 들어가지 않고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대학 입장에서 영어 강의를 늘리는 게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이란 얘기다.

고려대 총학 측은 "학생도, 교수도 고통 받는 작금의 상황을 만든 게 누구냐"며 "학생들의 만족도와 같은 질적인 부분에 대한 고려나 영어 강의의 성과와 같은 교육적 효과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영어 강의의 비율만으로 영어 강의를 평가하는 <중앙>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학은 '꼼수' 부리고, 교수는 강의·연구에 '이중고'

"워낙 권위 있는 언론사인 데다가 오래됐기도 하고, 알만한 대학은 다 평가를 하니까요. 학부모들은 이제 <중앙> 평가 결과를 거의 배치표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대학에서는 가능한 기를 쓰고 순위를 올리려고 하죠."

<중앙> 평가가 발표되는 시점은 대학수학능력시험 한 달 전인 10월 중순이다. 학교 정보에 갈증을 느끼는 학부모들과 고3 수험생들에게 <중앙> 평가는 필수 참고 매뉴얼로 통한다. 좋은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발을 구르는 대학들로선 <중앙> 평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발표 순위에 따라 대학마다 희비가 교차한다.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는 C 대학 홍보팀 관계자는 "늘 열심히 하는데 매번 떨어지는 걸 보면 우리 대학이 변변한 재단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학생들 등록금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 괜찮은 재단을 구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 적이 있다"고 했다.

결과에 대한 각 대학의 분석이 끝나면, 대학 구성원을 향해 총장, 재단, 동문회 차원에서 닦달이 시작된다. 직원뿐 아니라 교수들도 몹시 바빠진다. 강의 준비하랴, 연구 실적 올리랴 교수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며 하소연이다.

C 대학의 송진태(가명) 교수는 "각 교수 직급별 승진 기준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며 "교육 비중을 높이는 대신에 연구 부담을 덜 준다든지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지금은 교육도 연구도 둘 다 잘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능률도 떨어지는 걸 느낀다"고 했다. 그는 "실적 평가, 승진 등 기준들이 실제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어 바뀐다기보다는, '어떤 대학에서는 얼마만큼 높였다더라'라고 하면 그 얘기가 근거가 돼서 괜한 경쟁 심리에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따라서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꼼수들도 난무한다. 중앙 언론사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대의 경우 특히 그렇다. 여러 지방대에서 강의하는 안지상(가명) 강사의 증언이다.

"취업률을 올려야 하는데 안 되니까 학교 교직원 정직원 자리 하나를 없애고, 그걸 2년짜리 계약직 4명으로 쪼개서 동문을 뽑습니다. 그렇게 10곳을 뽑으면 졸업생 40명이 취업을 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교수 1인당 학생 수 비율을 낮추려고 학생을 줄이기도 하고요. 교수를 늘리면 돈이 드니까요."

학생 복지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예산이 책정되는 일도 허다하다. 안 강사는 "어떤 학교는 학생당 강의실 수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일단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2년째 그 건물은 아무도 쓰질 못 하는 '유령 건물'이 됐다. 건물 내부 시설을 갖출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난 6월 준공한 어느 대학의 캠퍼스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함. ⓒ연합뉴스

언론사가 '갑'이다 보니, 광고비도 만만치 않게 든다. 고부응 중앙대 교수는 논문 '대학 순위평가와 대학의 몰락'에서 대학평가의 부작용들을 지적하면서, 대학광고 시장의 급성장에 주목했다. 그는 "1995년 이전에는 언론매체를 통한 대학광고가 거의 없었지만, 대학의 광고비 예산은 1996년 214억, 1997년 526억, 금융위기를 겪던 1998년에도 618억으로 증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사가 사적 이윤 추구를 위해 대학을 상품화했다"고 지적했다.

C 대학 관계자는 "광고비는 책정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돈인데, 그 돈으로 학생들한테 장학금을 주거나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하는 데 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대학평가 그만하자"… 학생·대학 보이콧 조짐

<중앙>이 자부하는 '대학가에 심은 경쟁 코드'는 학내 구성원들의 피를 말리고 있다. 대학 교육 수요자인 학생들이 대학평가 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지적이다.

송 교수는 "소위 경쟁력 높인다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복지 증진에 힘을 쏟기보다는 지표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데, 정작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평가 거부 운동은 정당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학을 양적으로 평가하고 줄 세우는 제도가 있는 한 이런 문제 제기는 계속될 것이므로, 대학평가를 주도하는 언론사가 학생들의 요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독자 노선'을 고려하는 대학도 나오고 있다. 서울 유명 사립 대학인 D 대학 내부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대학평가에 대한 여러 문제가 제기되면서 '대학평가에 초연해지자'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 대학 기획 부서 관계자는 "일부러 대학평가 지표에 맞춰서 학교를 뒤집고 바꿀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개혁하자는 주의"라며 "언론사 측과의 관계도 있으니 그쪽에서 요구하는 자료 제출은 하지만, 일부러 연구 양을 늘리기 위해 편법을 동원한다든지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는 2011년 법인화 이후 다시 <중앙>에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한때 지표 신뢰도 문제 등을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한 바 있다.

송 교수는 "대학마다 학풍이라든지 특수한 상황이 있고, 종합대인지 사립대인지, 지방대인지, 여대인지 공대인지 등에 따라 사정은 천차만별"이라면서 "왜 모든 대학이 천편일률적인 기준에 맞춰야만 하는지 반성을 할 때"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연 이게 진정으로 우리 대학을 우리 학생들을, 그리고 나아가 학문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일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 6일치 <중앙일보> 1면. 대학평가 기사 아래 대학 광고가 실려 있다. ⓒ중앙일보

<대학평가, '등수 놀이'의 그림자>

고대생들이 <중앙일보> 대학 평가 거부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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