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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나무가 쌓이는 눈에 꺾이듯…"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17>]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도보순례를 한다. 일차적으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독려하는 목적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분열의 역사를 되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내면의 용기를 회복하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순례단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지난달 30일 팽목항을 떠나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들은 순례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을 <프레시안>에 싣기로 했다. 도보순례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304명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오열하는 듯 비와 바람과 물살이 휘몰아치던 팽목항을 떠난 지 어느덧 17일이 되었습니다. 길 위에서 세월호 참사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로 얼룩진 고통의 십자가를 여럿이 가슴에 품고 갑니다. 그래서 이 길은 슬프고, 억울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동행하는 평화와 생명을 잇는 순례의 길입니다.

▲ⓒ성공회 생명평화도보순례단
침묵하며 마음속으로 '주님의 현존' 이라는 짧은 경구를 되뇌며 묵주알을 어루만지며 걷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는 나의 지향과 마음을 깨워 애통해하고 고통으로 지새우는 이들의 마음과 합일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디선가 김민기의 '친구' 노래가 나지막하게 들려옵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과연 바다와 하늘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렇게 쉽사리, 허무하게, 마침내 처참하게 허물어 질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죽음으로 가라앉은 그 시간 피눈물로 사랑과 용서와 미안함을 절규했던 이들과, 단 한사람도 구조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 중 과연 누가 죽은 자요 누가 산자입니까!

이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죽어가는 짐승처럼 울부짖는 제 모습을 봅니다. 억울함과 비통함에 어쩔 줄 몰라 눈물 흐르는 아이 같은 저를 봅니다.
다시 순례의 길을 걷습니다. 그동안 안일하게 관성적으로 살아온 무지한 저를 되돌아봅니다. 그렇게 저를 다시 자각하게 하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인도하기에 이 순례는 생명의 길임을 느낍니다.

한걸음 한걸음씩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딛는 발걸음처럼 이 시간만큼은 가장 밑바닥에 나를 내려놓아봅니다. 그래서 이 길은 화해와 평화의 길임을 느낍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 나아가 자연을 섬기는 일 그렇게 사람과 하늘이 서로 통하는 일은 우선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통해야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늘이 서로 통하고, 화해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이 길은 진정 평화의 길입니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발도 부어오르고, 몸과 마음이 쉬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쉬는 중에도 거침없이 달리는 차량들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순간 저의 작은 발걸음, 우리들의 더딘 발걸음이 초라하고 허망해 보입니다. 기운도 빠지고 마음도 약해집니다. 마지막 유혹 같은 좌절감과 무기력함이 엄습해옵니다.

다시 힘을 달라고, 포기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봅니다. 마음속으로 울리는 소리입니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기어이 꺾이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울림입니다. 바보처럼 미련하게 오직 이 순간, 한 걸음만 생각하며 걸으라는 울림입니다.
길 위에서 다시 길을 묻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발걸음이 비록 미약할지라도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가장 밑바닥에 내려놓으며 걷는 순례의 길은 결국 사람과 자연과 하늘과 소통하는 하느님의 길임을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진정 죽음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서는 평화와 생명의 길임을 다시 묻습니다. 이 길에 함께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


<1> "팽목항에 내려가며 느낀 흐린 날의 여운"

<2> "우리는 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3>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걷는다"

<6> "강변 꽃길 대신 매연 가득한 길을 걷는 이유"

<7> "자식 잃은 부모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8> "세월호 희생자 이름 적은 공책을 품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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