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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앗아간 '아씨'의 산실, 그 달콤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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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앗아간 '아씨'의 산실, 그 달콤한 추억

[프레시안 books] 정범준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정치사회적 격동기였던 1960∼1970년대, 엄혹한 독재 정권과 TV의 황금시대가 동전 앞뒷면처럼 공존했다.

1964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도착한 날, 민간 상업방송 TBC(동양방송)가 개국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한 뒤, 1980년 11월 30일 TBC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On Air'를 박탈당했다.

저자 정범준은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알렙, 2014년 9월 펴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박정희는 영원한 대통령일 줄 알았고, TBC는 아직도 채널 7이라고 연상될 만큼 독보적으로 재미있는 방송이었다. 그 시기는 경제개발과 독재가 겹쳐 있고 화려와 빈곤이, 성장과 소외가, 웃음과 울음이 중첩된다." (104쪽)

신군부에게 빼앗긴 On Air

ⓒ알렙
저자는 유년 시절 TV에 대한 추억을 한국전쟁 직후 만들어진 KORCAD(1956년에 탄생한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와 TBC에 국한해 방송사(史) 형태로 정리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사실 '테레비'에 대한 추억을 운운하는 것은 주제넘고 새삼스러운 일"이라면서도 "TBC를 중심으로 살펴본, 그 시절 '흑백 테레비'의 추억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10·26과 12·12 사태를 거치면서 실권을 잡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1980년 계엄을 선포하고, 모든 언론을 검열했다. 보안사 정보처에 언론반을 신설하고 언론인을 회유했으며, 민주화 여론을 부정적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언론 공작도 펼쳤다. 특히 언론의 공정성·공공성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언론을 통폐합했다. 이 과정에서 TBC는 KBS로 강제 통폐합됐다.

2010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지난 1980년 11월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해직된 언론인만 15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중 30여 명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서울의 봄'이 짧았던 건 TBC도 마찬가지였다. 압박은 외곽에서부터 몰아쳤다. 1980년 6월호 월간중앙에 실린 특집 좌담 '전후 세계가 말하는 통일 전망'이 문제가 되어 이 잡지는 무기 휴간을 당했고 7월 언론 통폐합 조치의 일환으로 강제 폐간됐다. 신군부가 동양방송을 통폐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를 손볼 것이다. 아니다 TBC를 뺏을 것이다. 신군부가 여론을 떠보기 위해 지어낸 소문일 뿐이다' 하는 식의 이야기가 오가곤 했다." (253쪽)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12월 1일 JTBC 개국 특집 다큐멘터리 'TBC, JTBC로 부활하다 - 언론 통폐합의 진실'을 통해 TBC 통폐합과 관련해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흑백 TV 속으로

TBC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TBC는 오늘날 방송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며 존재감과 영향력을 잊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프로그램이 이때 TBC를 통해 대부분 방영됐다. 자, 이제부터 흑백 TV를 켜볼까.

지금까지도 쇼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불리는 <쇼쇼쇼>는 1964년 12월 12일 시작돼 1983년 7월 17일까지 방송됐다. 책에서 인용한 <한국 TV 40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13년간 <쇼쇼쇼> 사회자를 맡은 곽규석은 인기인의 대명사"였다. "이런 까닭에 1980년 신군부는, TBC를 KBS에 통합시켰으나 <쇼쇼쇼>를 없애지 못했다"고 한다.

"최백호, 윤수일, 옥희, 나미, 정종숙 등도 <쇼쇼쇼>로 등장한 가수들. 특히 만년 신인에 머물렀던 윤시내가 '열애'란 노래를 연 4주 계속 <쇼쇼쇼>에서 열창하면서 일약 스타로 부상했으며, 무명 신인 조용필을 처음 브라운관에 선보인 것도 바로 <쇼쇼쇼>였다." (222쪽)

1980년 1월 시작된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은 코미디 황제 이주일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헤이!" 하고 외치며 머리 위로 손가락을 올린 다음 오리걸음인 양 뒤뚱뒤뚱 걷는 그의 액션은 '저질 연기'로 손가락질 당해 방송 출연이 정지됐었다.

TV 뉴스가 길어야 30분이던 1972년 <TBC 석간>이라는 이름으로 40분짜리 뉴스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처음에는 평일 오후 6시 대에 방송을 했으나, 시청자의 호응을 얻자 오후 10시로 옮겨 방송됐다. 그러나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보도의 자유가 제한되면서 '한국 최초의 앵커맨' 봉두완 대신 아나운서가 진행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이 서울에서 풀려나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특히 드라마 인기가 대단했다. 1970년 3월부터 1971년 1월까지 방송된 <아씨>는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한국 여인상을 그렸다. <아씨>는 일일극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TV 단일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가수 이미자의 <아씨>라는 주제가도 큰 인기를 얻었다.

"<아씨>가 방영되는 동안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하여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꼭 잠겼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한 뒤에 이 프로그램을 시청해 달라는 내용의 이색 스포트가 방송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158쪽)

또 1979년 6월 18일 첫 방송된 <야 곰례야>는 "호화 생활의 상류층 중심 드라마가 보편적이었던 당시의 제작 풍조에서는 상당히 엉뚱한 기획"이었다. 당시 최창섭 서강대 교수는 "(<야 곰례야>는) 웃음이 각박한 세상에 따뜻한 웃음을 준 민중 드라마"라고 평했다. '곰례'를 연기한 정윤희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진 서민 드라마 <달동네>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딸인 '똑순이' 역할을 한 배우 김민희가 아역 스타로 떠올랐다.

TBC는 일본 만화와 미국 드라마 등 우주와 지구의 평화를 수호하는 영웅물을 꾸준히 선보였다. <황금박쥐>·<우주 삼총사>·<독수리 5형제>·<원탁의 기사>·<그랜다이저>, <슈퍼맨>·<원더우먼>·<600만 불의 사나이>·<두 얼굴의 사나이> 등.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은 "완제품이 아니고 보세가공 식의 한일 합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일본 작품을 도입했던 케이스들"(1970년 4월 22일 자 동아일보)이었다.

새마을운동 등으로 "우리도 잘살 수 있다. 하면 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무렵 방영된 해외 로케이션 다큐멘터리 <뿌리>는 1977년 에미상 14개 부문 가운데 9개 부문을 석권하는 등 국내 프로그램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조상'이라는 말 대신 '뿌리'가 자연스럽게 쓰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시인 박목월이 <뿌리> 방영 하루 전 타계했는데 <뿌리> 방영 시간 전후로 문상객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정치권력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1980년 11월 TBC와 KBS의 통폐합을 결정한다. 계엄 당국은 '고별 방송에 대한 지침'까지 전달하며 일사천리로 통폐합을 진행했다. 당시 황인용 아나운서는 마지막 전파가 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야속하다"고 울먹이며 동양라디오의 호출부호를 부르는 것으로 방송을 끝냈다.

"TBC가 쏘아 올린 마지막 전파 역시 결국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시절 TBC를 보며 울고 웃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이 땅에 TBC가 있었다는 작은 증거이자 추억이다."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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