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도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영혼 없는 관료들, 그리고 빈곤한 철학으로 관료들의 청부를 수행하는 학자들, 부패한 토건 족들이 하나로 뭉쳐 철도를 파탄 내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파탄 내고 있는 철도를 다시 복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전거를 제외한다면, 철도는 인류가 만든 것 중 가장 위대한 '탈것'이다. 육상 교통수단 중 가장 적은 토지 파괴를 수반하고, 대량수송이 가능하다. 에너지 효율성, 친환경성, 교통혼잡비용 절감, 최고의 안전성 등을 장점으로 한다. 철도가 인간에게 주는 효용은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뛰어나다.
한때 도로교통에 밀려 사양산업 취급을 받던 철도는 지구온난화와 에너지 위기 시대를 맞아 새로운 대안 교통수단으로 부상한 지 오래다. 이미 유럽 국가들은 사회적 투자 순위에서 도로를 밀어내고 철도를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원한다면 철도는 선택 가능한 여러 대안 중의 하나가 아니라, 최우선적으로 채택해야 할 사회적 자산이다.
철도가 가진 장점을 갉아 먹는 철도역 설계
철도가 다른 교통수단이 따라올 수 없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다. 바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다. 이른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서비스가 안 된다는 점이다. 현관문을 열고 몇 발자국 나서면 탈 수 있는 자동차의 편리함을 따라잡을 수 없다. 철도가 아무리 좋은 교통수단이라도 이용의 편리함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철도 수송 분담률을 높일 수 없다. 따라서 철도 정책을 입안하는 담당자들은 이런 철도의 단점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역으로 가야 한다. 그 때문에 역은 도시의 중심지나 교통의 요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통과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유럽의 중앙역들이 도시 교통의 핵심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새로 신설되는 역이 철도이용자들의 손쉬운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진행된 고속철도 사업이나 신설 건설 사업, 기존선 개량 사업들을 보면 철저하게 철도의 기능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돼 온 게 사실이다.
경부고속철도 신경주역과 울산역을 보자. 첩첩산중에 건설되었다. 역에서 나오면 주변은 산자락이다. 도심에서의 접근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기는커녕, 반대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고속철도가 갖는 빠른 이동성이라는 장점을 갉아먹도록 철도역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고속철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경주 지역이야 문화재 보호를 위해 역의 도심 진입을 유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의 신경주역이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자리한 것은 아니다. 신경주역과 울산역의 문제만이 아니다. 새로 생기는 거의 모든 역이 도심에서 추방되고 있다.
경전선 개량 공사를 하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역들이 도심에서 밀려났다. 도심에서 이전된 진주역은 산이 에워싸고 있다. 역을 중심으로 오일장이 서 사람들로 북적이게 했던 함안역이 이전한 곳은, 주변이 온통 논과 밭이다. 정부가 철도수송분담률을 높이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인구 밀집 지역에서 밀려난 철도역이 정부가 말하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신선 개량 공사가 진행된 장항선이라고 다르지 않다. 삽교, 홍성, 서천, 장항역 등 구 역사에서 이전한 수많은 장항선의 신 역사 주변에는 제대로 된 민가조차 보이지 않는다. 새로 신설되는 호남고속철도도 고속철도 이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치인 역을 무력화시켰다. 공주역의 경우 허허벌판에 역사를 만들어 도심에서 승용차를 타더라도 30~40분이나 이동해야 한다. 택시를 탈 경우 2만 원이나 되는 요금이 나오는 거리다. 공주역의 문제점이 불거지자 국토부가 내놓은 해명은 더 기가 막히다.
국토부 철도산업과는 "KTX 호남역 위치는 전문기관의 연구 용역, 공청회, 관계 기관의 협의와 전문가 위원회 자문 등을 통해 호남 KTX 건설 기본 계획으로 확정된 사항이며 인접 도시의 균형적인 접근성과 열차 운영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위와 같은 해명은 국토부를 비롯해 연구용역을 수행했다는 전문 기관, 자문을 했다는 전문가 위원회 같은 기관들이 갖고 있는 철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철학이 천박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정부기관에서 마련한 적지 않은 공청회는, 규정된 공청회 횟수를 채우는 데 급급했을 뿐이다. 그런 공청회가 시민 의견을 수렴했다는 증거로 활용되기 위해 요식적으로 열려왔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동안 철도에 대한 수요 예측이나 정책 연구를 수행한 한국교통연구원 등 소위 전문기관들이 자행한 일들은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힘겨울 지경이다.
이미 건설된 고속철도를 비롯해 기존선 개량 노선이나 신설되는 철도 노선들을 보면, 철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수용하기 편하고 땅값이 싼 곳의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줄을 그어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철도 전문가라 자청한 사람들이 현재 들어서는 철도노선과 역을 지정하는데 참여했다면, 전문가 명찰을 내던져야 할 정도다.
철도 민영화의 단추가 철피아를 만들어냈다
철도역이 이렇게 설계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국토부가 한국 철도를 개혁하겠다며 추진한 상하분리 정책에서 시작된다. 관료들은 시설과 운영이 통합된 체제에서, 시설 부분을 담당하는 철도시설공단과 운영을 담당하는 철도공사로 시스템을 이원화시켰다. 국토부는 정부가 시설을 책임지고 철도공사는 운영에만 매진할 수 있어, 적자를 줄이고 경영 효율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철도시설공단은 정부가 위탁한 사업을 수행하는 대행기관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철도시설공단이 국토부 관피아의 전진기지가 된 꼴로 변했을 뿐이다.
역대 시설공단 이사장 자리는 국토부 고위관료들의 낙하산 착지점으로 변질됐다.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재직 시절 고속철도 궤도공사 납품업체로부터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전직 이사장이, 투신자살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설공단 이사장을 지낸 뒤 국회로 진출한 새누리당 조현룡 의원도 검찰의 '철피아(철도+마피아)' 비리 수사 대상이 되었다. 시설공단은 국토부 고위관료들의 퇴직 후 정거장이 되면서, 철도 마피아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철도 시설을 책임지는 시설공단과 운영을 맡은 철도공사는 유기적 협조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국토부 직할대가 되어 버린 시설공단은, 이명박 정권 당시부터 추진되던 KTX 민영화에 찬성하면서 철도공사 흔들기에 앞장섰다. 두 철도 기관이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현실이 국토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상하분리 정책의 현주소다.
철도역을 허허벌판으로 밀어내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철도정책을 총괄하는 국토부와 이를 실행하는 시설공단에, 한국철도의 현실과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당장 예산 절감을 위해서는 도심지보다는 토지 수용비가 싼 외곽 지역을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한 번 설치하면 영구적으로 사용하게 될 역사인데, 상대적 비용 절감을 이유로 외곽에 유치하게 된다면 철도 이용 활성화나 경영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
과거에는 철도역이 새로 들어서면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고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근대 초기의 일이다. 지금은 신설된 역으로 도심이 이전하거나 상권이 형성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국은 더이상 부동산 개발이 황금알을 낳는 사회가 아니다. 도심 외곽으로 이전된 철도역은 이용이 불편한 외딴 섬일 뿐이다. 철도역을 도시 바깥에서 힘겹게 찾아가야 하는 공항 꼴로 만들어놓고 있는 현실은 한국철도의 미래 전망을 암울하게만 할 뿐이다.
국토부는 철도공사의 부실을 질타한다. 그러나 실상은 바로 그 국토부가 철도공사의 구조적 부실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이 한국철도의 비극이다.
개인이 자영업을 벌인다고 해도, 사업 당사자는 직접 주변 입지와 유동 인구 등을 고려해 영업 장소를 선택한다. 그러나 정작 철도 운영기관인 철도 공사는 자신이 사업을 벌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역을 설치하는데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없다. 국토부가 결정하고 시설공단이 건설해서 넘기면 그냥 받아서 운영하는 형국이다. 만약 개인사업자에게 제삼자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 지역에 가게를 지어주고 영업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이가 어디 있겠는가?
철도 민영화, 새누리당이 앞장서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난 9월 19일 새누리당이 공기업 혁신 방안이라고 내놓은 철도공사 개편방안의 첫 번째 안이, 철도 시설과 운영의 완전한 분리이다. 시설과 운영이 분리된 것은 오래전이지만, 지금까지는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철도 노선의 유지 보수 및 관제 업무는 철도공사가 맡아왔다. 그런데 이를 시설공단에게 모두 이전한다는 방침이 새누리당의 안이다. 시설공단이 유지 보수 업체를 선정하면서 또 무슨 이권을 챙기게 될지 모르겠지만, 더 큰 문제는 철도 안전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시스템은 이렇다. 열차가 달리는 중 기관사가 선로의 이상을 감지하면 무전기를 통해 역에 통보하고, 역에서는 바로 관제실과 유지 보수를 책임지는 팀에게 연락해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유지보수 기능이 분리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로 연락하는 팀이 서로 다른 회사 소속이 돼 버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식 절차를 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상대 기관에 공문을 보내야 하고 이를 접수 받은 기관은 현장을 확인해 실제 보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 후 지정된 업체를 파견해 보수를 완료할 때까지, 열차는 위험을 안고 달려야 한다. 공문처리가 지연되거나 누락되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위험은 더 증가한다. 영국에서 철도 민영화 이후 분리된 기관들이 사고 책임을 놓고 법정 분쟁을 벌이면서 로펌들의 주머니만 채워주게 되었던 일이 한국에서 재현될 수 있다.
프랑스 철도는 왜 분리됐던 시설과 운영 기관을 통합했을까. 왜 독일 철도는 철도공사 아래 시설 부문을 두었을까. 새누리당과 국토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신설된 일본의 고속철도역 대부분은 왜 기존 역들과 나란히 존재하거나 일반 열차와의 연계 환승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을까. 이들이 바보여서일까?
새누리당이 철도 개혁방안이라고 내놓은 안의 상당수는 국토부가 그동안 준비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집권 여당이 관료들이 추진하는 잘못된 정책을 국회의 이름으로 세탁해 주는 것은, 항상 국익을 생각한다는 당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먼저 할 일은 수십 년간 왜곡된 채 유지되었던 한국철도 정책 입안 체제의 개혁이다.
철도정책을 총괄하는 국토부, 또 이와 연결된 철피아의 카르텔에 대한 개혁이 선행되지 않으면 철도가 우리 사회의 중추적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는 일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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