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언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파릇파릇한 청춘의 나이다.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무모함'이, 이것저것 다 해봤다는 '원숙함'보다 훨씬 어울린다. 그러나 스무 살 참여연대는 이미 한국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되었고, 매달 회비를 내는 1만4000여 회원들의 힘으로 '정부 지원 0퍼센트'라는 기적 같은 실험을 계속해 오고 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그들의 믿음은 어쩌면 시작부터 무모했고, 지금도 여전히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차병직 변호사가 생생히 기록해 낸 지난 20년의 '사건들'을 통해 그들의 꿈과 믿음이 결코 무모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건으로 보는 시민운동사>(창비, 2014년 9월 펴냄, 이하 <시민운동사>)는 한국 시민운동에 관한 기존 저작이나 논문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차병직'이라는 당대의 글쟁이가 참여연대를 무대와 주인공으로 삼아 지난 20년의 한국 시민운동사를 써 내려 갔기에, 말 그대로 책 읽는 맛이 보통이 아니다. 수많은 주인공들과 이야깃거리가 등장하는 단편 소설집 같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참여연대가 내걸었던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해 보라. 이제는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하는 '1인 시위'라는 것이 처음 시작되었던 그날, 그 순간을 이 책보다 상세히 묘사했던 글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의정부 지원 판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았던 사건이 기사화되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사법 개혁'이라는 시대적 화두가 세상에 던져지던 당시를 누가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그려 줄 수 있겠는가?
이 책에는 길게는 20년 전, 짧게는 한두 해 전에 있었던, 한국 시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세하게 '기억'되고 있고, 저자는 그것을 맛깔나게 '기록'하고 있다. 1999년부터 6년간 참여연대 간사였던 서평자 본인 또한 이 책에 실명으로 몇 번 등장한다. 그리고 비록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사건에서조차 "그때 그 순간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렷이 기억한다. 휴대폰 요금 인하 운동을 시작하면서 안국동 참여연대 벽면에 걸었던 "안 내리면 쳐들어간다"는 문구를 넣은 영화 <친구>의 패러디 걸개그림도, 소액 주주 운동 때문에 울산 현대중공업 주총에 내려갔다가 가방 검사에 항의하고 결국 위자료 소송에서 승소했던 일도 엊그제 일처럼 떠오른다. 하나하나가 참으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고, 운동 당시의 소소한 일들마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시민의 권리'와 '대중의 상식'은 운동을 떠받치는 강력한 신뢰 기반이었고, 언론과 법률은 참여연대 운동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능케 했다. 젊은 활동가들의 열정과 전문가들의 헌신, 무엇보다 회원들과 시민들의 지지는 강렬한 기억의 원천이 되었다.
강렬했던 '기억'과 맛깔스런 '기록'의 멋진 만남
그러나 참여연대 20년 역사는 한국 시민운동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매우 독특한 한 부분이고, 상당히 중요한 한 조각이지만, 저자는 감히 참여연대로 한국 시민운동사 전체를 논하고자 하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사건들은 매우 구체적인 얘기를 통해, 특정한 맥락 속에서 제시되고, 그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상당 부분 독자들의 몫으로 열어 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한국 시민운동 20장면"이라는 부제가 다소 과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제목은 출판사가 정한 것임을 어렵사리 밝히면서, 과분한 책 제목은 참여연대 20년에 대한 칭찬과 응원 때문일 것이라는 겸사를 잊지 않고 있다. 이 책으로 참여연대나 한국 시민운동의 역동성과 창의력 등을 처음 접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행여 이것이 참여연대만의 특징과 성과가 아님을 서평자 또한 다시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시각과 평가조차 한국 시민운동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사>에서 다뤄진 사건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 다뤄지지 않은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한국 시민운동을 구성해 왔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강조해 둔다. 하지만 최근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그에 대한 '기억'과 '기록'도 뒷전으로 밀리는 듯하기에, 이번 작업이 참여연대를 넘어 향후 '모든 이의 기획'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누차 말하지만 <시민운동사>는 무척 재미있다. 그냥 술술 읽힌다. 그렇지만 이 책은 사실 학문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운동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운동의 레퍼토리는 어떻게 변용과 진화를 거듭하고, 사회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기반은 어떻게 확보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노력이야말로 전 세계 사회운동 연구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사회운동의 실제와 실체를 제대로 접하면서, 그 내밀한 속내를 충분히 접하기란 무척 어렵다. 사회운동이 갖는 기본적 폐쇄성이나, 보안에 대한 강조, 그리고 '개인적인 고뇌'를 드러내기보다 '사회적인 고민'을 앞세우는 운동가들의 일반적 특성 등 연구의 제약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사>는 기존 연구 문헌들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한국 시민운동의 여러 부면들을 보여 준다. 참여연대의 기관지로 시작했던 <참여사회>의 굴곡진 역사, 참여연대 아카데미 강좌를 수강하며 인생이 바뀐 '압구정 아줌마',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을 둘러싼 운동가 내부의 치열한 논쟁, 더욱이 참여연대가 터를 잡은 '공간'에 대한 분석까지 이 책은 담고 있다. 참여연대가 종합형 시민운동을 지향했듯, 이 책 역시 사실상 참여연대와 한국 시민운동에 관한 '종합 선물 세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20년 전 어느 날 종합 선물 세트를 가득 채운 과자 봉지에 행복해 했듯이, <시민운동사> 한 권에 가득 담긴 20년에 걸친 사람과 운동, 땀과 꿈의 얘기를 만끽해 볼 것을 감히 권해 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