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곳곳에서 '다른 시장'이 열리고 있다. 농부시장, 예술시장, 벼룩시장…. 이름도 다양하고 거래하는 물건도 가지각색이다. 뭐든 다 살 수 있는 도시에서 시장이 모자라서인 건 아닐 테고, 과연 어떤 매력이 기존 시장에서 만족할 수 없던 부분을 흡족하게 채워주는 걸까? 도시는 넓고 시장은 많다.
■ 상설 시장과 따로 또 같이 - 서울 꼬부랑길동네장
지난 9월 19일 오후 여섯 시, 서울 신길동에서 열린 '꼬부랑길동네장'(꼬길장). 상설 시장인 '사러가'의 통로길은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가지고 나온 사람, 꼬치를 굽고 즉석피자를 만드는 사람, 직접 만든 수공예 액세서리와 천연비누 등을 펼쳐놓은 사람, 그리고 한편에 마련된 간이무대에서 노래 공연할 준비를 하는 아이들로 분주하다. "여기 근처에 사는데, 저녁 먹으러 왔다가 우연히 이렇게 시장 열린 거 봤어요. 신기하고 재밌어요. 닭꼬치도 맛있고." 스무 살 친구인 손다희 씨와 김예영 씨는 얼굴에 즐거운 빛이 가득하다.
지금은 재래시장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재래시장으로 처음 문을 연 '사러가'에서 매월 셋째 주 금요일 '꼬길장'을 열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한다. 예전처럼 시장에 오는 사람들이 정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다. 이야기가 있는 요리, 도시 농부가 키운 텃밭 채소, 지역 주민이 만든 공예품, 그리고 문화공연이 어우러진다. 신길동 주민이라는 안순예 씨는 "우리 동네에서는 잘되고 알아주는 시장이라 평소에도 장 보러 오는데, 오늘은 애들이 노래도 하고 볼거리가 있다"며 이웃과 간이무대 앞에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공연도 구경한다.
'꼬길장'의 특징은 기존 시장 상인들도 함께한다는 것. 무언가 새롭게 해보고 싶지만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꼬길장'을 통해 신선한 기운을 받는다. '꼬길장'에서만큼은 국내산·친환경 재료로 물품을 만들고, 음식에도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상인들의 호응도 점점 늘어난다고.
기존 시장의 홍보성 이벤트인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단호하게 그런 건 아니란다. '꼬길장'을 기획하고 준비한 이성자 씨는 "그냥 한번 해볼까 하고 시작한 게 아니다. 서울 영등포 달시장이나 마르쉐 등 다른 시장도 많이 보고 배웠고, 앞으로 동절기는 빼고 계속 진행할 계획"이란다. 올해 7월 처음 개장하여 이제 세 번째로 열렸는데, 앞으로는 주차장까지 공간을 넓혀서 벼룩시장도 함께할 계획. "처음에는 거품이 없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사람들이 오고 반응도 좋아요. 좀 더 활성화되면 연희동 '사러가'에서도 열려고 해요."
특히 '꼬길장'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임대료나 권리금 등이 부담되어 장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먼저 장터를 경험해 보고 성장할 수 있게, 젊은 상인들을 '인큐베이팅'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실제로 장터에 직접 만든 양갱을 가지고 나온 '보드라운'의 이인호 씨는 자신의 가게를 준비하는 중, 경험을 쌓기 위해 출점했단다. 청년 판매자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 이유가 있었다.
이른바 도시의 '대안 시장'은 개장하는 날이 며칠 안 되고 물건의 가짓수도 적어 실생활에서 주요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꼬길장'은 언제든지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상설 시장이 가까이 있어 사람들에게 제공할 편리함을 얻는 한편, 상설시장은 새롭고 호기심 가득한 사람을 얻는다. 시장에 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시장끼리도, 필요를 교환하는 모습이다.
■ "빨리 팔고 같이 놀아요!"- 대전 짜투리시장
"오늘 대전에 행사가 진짜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장에 이렇게 사람이 적네." 아닌 게 아니라 '토요일이라 사람 너무 많으면 어쩌지?' 걱정하고 갔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각보다 한산하다. 덕분에 구경은 천천히 잘 할 수 있었지만.
지난해 4월부터 시작해 매월 셋째 주 토요일 낮 열두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대전 대흥동 산호여인숙 골목에서 열리는 짜투리시장은, 도시 속 작고 특이한 시장하면 떠올릴 만한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다. '자투리'라는 낱말을 '짜투리'로 틀리게 쓴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텃밭에서 직접 거둔 토종씨앗, 방금 전 뽑아온 가래떡 등 장터에 나온 물품들도 '느낌 있다'. 하지만 이 시장의 진짜 특이점은 따로 있는데, 바로 대안화폐인 '두루'를 쓴다는 것. 시장 입구에 마련된 환전소에서 돈을 두루로 바꿔야만 잔치국수도 사 먹고 판매자가 손수 깎아주는 배도 맛볼 수 있다.
"대안화폐를 쓰는 건 품앗이 개념으로, 돈은 보조적인 수단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돈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시장이죠." 시장 활동가인 서은덕 씨 말을 듣고 처음에는 번거롭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번 환전해 보니 너무 쉽다(게다가 환전소에 가면 먹을 것도 막 준다).
돈이 보조 수단이라는 말에 눈치들 채셨는지? 장사해서 돈 벌어 갈 생각이 없는 판매자 겸 손님들은, 옆집 물건 구경하고 사다 보면 오히려 집에 갈 때 '마이너스'란다. 수익을 내기보다는 같이 나누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토종 뿔시금치랑 옥수수 씨앗을 갖고 온 장도정, 박정희 부부도 마찬가지다. "토종작물이 많이 퍼졌으면 해서 직접 길러 받은 씨앗을 나누러 나왔어요. 돈은 상관 없어요. 우리도 처음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주최한) 무슨 축제에서 받은 거니까."
오후 3시쯤 되자 물건들이 다 팔렸다. 아직 장이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물건이 없어 어떡하느냐고 물었더니 걱정 말라고, "사람들이 빨리 다 팔고 같이 놀려고 그런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후 4시부터 펼쳐지는 전통혼례 재현극도 구경해야 하고, 혼례 끝나고 모두 같이 먹을 잔치국수도 준비해야 해 오히려 더 바쁜 모습이 영락없는 '동네 잔치'. 공연은 지역연극협동조합인 나무시어터에서 준비하는데, 시장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어 좋고 극단은 공연할 공간이 생겨 좋다.
다음 달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에서 장이 열린다. 서은덕 씨는 "한 사람이 열 가지 일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열 사람이 혼자 해도 되는 일을 나눠서 하는" 덕분에 부담 없이 '짜투리' 시장을 계속할 수 있단다. 그래서 규모가 커지는 것도 바라지 않고, 지금처럼 동네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즐기는 곳이면 좋겠다.
'짜투리' 시장은 '물건 사고파는 저자(市場)'가 아니라 '보는 재미가 있는 마당(視場)'으로서의 시장. 도시에서 돈 벌고 돈 쓰는데 한껏 지쳐 있다가, 이곳에 와서 한숨 돌리며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물품이나 노동을 주고받을 때 현금 대신 사용되는 화폐의 명칭. 상호 신뢰와 지역공동체적 연대인식을 기반으로 액수는 거래 당사자들이 정하며, 현금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짜투리시장에서 쓰는 '두루'는 대전지역 공동체인 한밭레츠에서 시작된 대안화폐로, 1000두루는 1000원이다. 현금과 두루를 같이 사용할 경우 전체 가격의 20~30퍼센트 이상을 두루로 거래해야 한다.
[서초 토요문화벼록시장 체험기]"내 물건에도 책임져야 해"나는 서울의 아파트촌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 인간이다. 흔한 말로 "쌀이 나무에서 자라는 줄 아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생필품이나 인스턴트식품을 온·오프라인 브랜드 상점에서 고르고 신용카드로 값을 치르는 생활에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내게 벼룩시장 바람이 분 것은 3년 전, 어릴 적부터 살던 집에서 20여 년 만에 이사하게 되었을 때다. 짐 정리를 시작하니 그동안 사들인 수많은 옷가지와 물건들이 숨어 있던 화석들처럼 쏟아져 나왔고, 대부분은 버려야 하는 상태라기보다는 그저 방치되어 쓰이지 않는 신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한 번 쯤 참가해 보고 싶었던 벼룩시장에 그것들을 내놓기로 마음먹었다.내가 처음 출점한 벼룩시장은 토요일마다 열리는 '서초 토요문화벼룩시장'. 서울 서초구청에서 주최하는 이 시장은 참가 절차가 간단하고 규모도 적당해 보였으며, 서초구민은 물론 다른 지역 거주자도 참가할 수 있다. 지하철 사당역에서 이수역에 이르는 복개도로 약 1킬로미터(km)가량을 따라서 열리는데, 나같이 입던 옷가지를 주로 파는 젊은이들부터 오래된 트랜지스터라디오나 구식 다이얼 전화기 등을 가지고 나온 고물상인과 직접 만든 수공예 액세서리를 들고 나온 아티스트들까지 다양한 판매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10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질서 있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로 위에 번호가 새겨져 있어 자신이 배당받은 번호 자리를 찾아가 돗자리를 깔고, 장이 파하는 오후 3시까지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며 자유롭게 판매하면 된다. 가격도 내 맘대로 흥정도 내 맘대로, 그래서 그날의 장사를 망치느냐 성공하느냐도 모두 내 할 탓이다.지난 9월 13일에도 친구와 함께 벼룩시장에 참가했다. 멋쟁이 커플이나 노부인 손님과 잡담도 나누고, 나 역시 북적한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재미를 즐겼다. 수익이 시원치 않아 시무룩이 있다가, 옆자리 참가자 할머니의 "다 경험이지 뭐"라는 한마디에 씻은 듯이 위로받기도 했다. 뒷자리에서 고물을 팔던 아저씨를 졸라 내가 입던 티셔츠를 2000원에 팔아넘긴 것도 재밌는 추억이 됐다.나는 첫 참가를 시작으로 해마다 한 번씩 나갈 만큼 벼룩시장에 푹 빠져버렸다. 아마도 그동안 내가 물건을 사고, 쓰고, 버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방식을 열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내게는 쓸모가 없어져 쓰레기가 될 위기에 처한 물건이, 벼룩시장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뿌듯하다. 또 벼룩시장은 전통적인 시장의 꼴을 갖추고 있어, 1인 가구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 맺는 체험을 더해 준다. 인형을 사가는 꼬마부터 고물을 뒤적여 보는 노인까지,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경험은 바쁜 일상 속에서 '원클릭'으로 신상품을 사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옆자리 사람과 본의 아니게 자리다툼을 하거나 지나치게 물건값을 깎는 손님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벼룩시장은 인간으로서 나의 세계를 좀 더 풍요롭게 하는 계기를 여러 번 던져줬다. 돈과 물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도 수확이었다. 특히 새 물건을 살 때 전보다 훨씬 더 숙고하게 되었고, 나와 함께 살아갈 것들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갖게 됐다. 물건을 내 곁에 두기로 결정할 때 멀리 봐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결국 잘 사용하지 못해 애물단지가 돼 버리면, 또 벼룩시장에 이고 나가 판매하는 수고를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시장에서의 하루가 마치 인생의 축소판처럼 삶의 이모저모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내 말이 사실인지 궁금하다면, 이번 주 토요일 벼룩시장에 직접 나가 보시길 '강추'한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꼬부랑길동네장 http://cafe.naver.com/sarugastory☞ 짜투리시장 http://cafe.naver.com/zzzzaturi☞ 서초 토요문화벼룩시장 http://www.seocho.go.kr/site/sd/index.jsp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살림이야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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