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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국 유학생이 본 "양키 고 홈"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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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어느 미국 유학생이 본 "양키 고 홈" 충격

[문학예술 속의 반미] 연재를 시작하며

원광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이재봉 교수의 '문학예술 속의 반미'를 연재합니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미 관계를 살펴보며, 구체적으로 그 반세기 동안 발표된 소설, 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문학예술 작품에 묘사된 미국의 부정적 모습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비뚤어진 관계를 살펴보는 취지입니다. 편집자

1. 연재를 시작하며: 미국을 동경했던 미국 유학생이 호기심으로 시작한 반미 공부

1987년 11월 미국에서 공부하다 서울 가족들로부터 충격적 소식을 접했다. 어머님이 장암으로 위독하시다는 거였다. 공부 마치기 전엔 귀국하지 않으리라는 독한 맘을 먹은 터였지만 주저 없이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막내아들이면서도 초등학생 시절부터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 유학했던 나로서는 한 학기나 1년 공부가 늦어지는 것보다 어머님을 생전에 뵙는 게 더 중요했다. 2~3주만 기다리면 한 학기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강의조교 (TA)를 하고 있었지만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해도 거리낄 것 없었다. 결혼하고 겨우 6개월이 지난 때였지만 아내 눈치 볼 것도 없었다. 학교 일은 동료 조교에게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4년 만에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그 무렵 어머님을 모시던 형님이나 누님 집에서 병원까지 오가려면 구의동 건국대학교와 행당동 한양대학교 앞을 거쳐야 했다. 시내버스로 두 대학 정문 앞을 지나치는데 조금 생경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키 고 홈” 등 반미 구호가 가득한 현수막들이 정문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983년 8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대학가에서 반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듣기는 했다. 대학 다닐 때 이른바 운동권 근처에 얼씬거리기는커녕 민주화 데모행렬의 그림자도 밟아보지 않았기에, 4학년 때인 1982년 3월 부산의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언론 보도대로 빨갱이들이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다. 1985년 5월 미국에서 공부할 때 70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의 미국문화원을 사흘이나 점거 농성한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읽기는 했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1987년 11월 서울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보는 반미 현수막들은 조금 거슬리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요즘 내 글을 읽는 분들은 내가 지난날 민주화운동에 치열하게 앞장섰거나 무슨 투사 노릇이라도 한 것처럼 오해하는 듯하다. 정의감에 불타는 용기가 넘쳐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오해와 착각이 부담스럽다. 남들의 오해와 착각을 유도하는 나의 위선적 언행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민주화에 손톱만큼도 기여하지 못한 데 빚진 맘이랄까,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가고는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부끄러운 대학 시절을 거듭 고백한다. 고백이라기보다는 변명이다.

이미 여기저기서 몇 차례 밝혔듯, 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모가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거세게 전개될 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데모 한 번 하지 않았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뒤, 단 하루도 시위 없이 해가 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던 1980년 '서울의 봄'을 보내면서도, 정치학도로 시위 주동은커녕 시위대 맨 뒷줄에라도 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데모엔 곁눈조차 팔지 않았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과 군대를 거쳐 1979년 대학에 들어간 터라 5년 안팎의 후배들과 어깨동무하고 길거리로 나간다는 게 분수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상고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교수는커녕 대학생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갖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촌구석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손바닥만 한 점방을 지키며 주판을 뒤집어 썰매처럼 타다 작은형에게 몇 대 쥐어 박힌 것을 계기로 주산을 배웠다. 5학년 때 주산왕을 꿈꾸며 부산으로 건너가 유단자가 되었는데, 상고를 거쳐 은행에 들어가 빨리 돈 버는 게 꿈이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해 1년도 되지 않아 무턱대고 사표를 쓴 뒤 집을 나갔다. 한 달간 여기저기 쏘다니다 마음을 잡고 돌아와 학원에서 칠판을 닦아주며 공부해 대학입시에 붙긴 했지만, 바로 군대에 불려가 3년을 보낸 뒤에야 대학생활을 맛보기 시작했다. 이토록 어렵게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으니 데모보다는 공부에 힘쓰는 게 도리요 의무라고 생각했다.

둘째, 서울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하던 큰형님이 형사였는데 내가 데모하다 잘못되면 자신의 밥줄이 끊어질 수 있다며 ‘철없는 짓’을 하지 말아달라고 은근히 당부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섯 아이를 키워야 했던 힘없고 가난한 경찰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데모를 멀리하고 싶었다.

셋째, 작은형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다 1973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다 말고 주저앉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내가 미국에 유학가면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유학을 꿈꾸며 1학년 때부터 ‘연구회’라는 이름을 내건 동아리방에 처박혀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워보겠다는 욕심까지 부렸으니 데모에 관심 가질 틈이 없었다.

넷째, 무엇보다 우리 역사와 사회 현실에 무지해 당시 학생들이 즐겨 쓰던 '의식'이 전혀 없었고 요즘 젊은이들의 말대로 '개념'이 조금도 없었던 게 가장 근본적이고 큰 문제였다. 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과서만 열심히 읽은 ‘범생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국민교육헌장' 393자를 몇 시간 만에 외웠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그걸 영어로 암송했다. '새마을운동'을 찬양하는 글짓기나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는 상을 놓칠 때가 거의 없었다.

대학을 마칠 때까지 '제주반란'과 '여순반란' 그리고 '4·19의거'와 '5·16혁명'에 왜곡이 곁들여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김대중은 빨갱이 간첩"이라는 신문과 방송 뉴스도 그대로 믿었다. 대학 다닐 때 동기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가더라도 나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공부 동아리방에서 "혹보 영감 가짜 김일성 때려잡자"는 반공 웅변 원고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렇게 '개념 없이' 대학생활을 보내다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직해 반년 동안 일하면서 미국 여비와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1983년 8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4년 뒤 1987년 11월 귀국해서 반미 구호가 적힌 현수막들을 만났던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영어회화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영어웅변도 하면서 미국을 동경했던 미국 유학생의 눈에 들어온 "양키 고 홈"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일부 극단적 학생들만 그런 구호를 외치는 줄 알았는데 큰길가 대학 정문 위에 버젓이 걸려있다니.

어머님은 장암 말기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터라 1988년 2월 돌아가셔서 뒤처리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에서 송금한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였다. 작은형 도움을 받기도 하고, 벼룩시장 장사하며 돈을 벌기도 하고, 강의조교를 하며 학교에서 생활비를 받기도 했기에, 한국에서는 1원 한 푼 보낸 적이 없긴 했다. 유학생이 장사로 돈 버는 것은 불법이라 강의조교 월급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고 우겼지만 냉혹한 비자 심사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 비자를 포기하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갔던 아내로 하여금 나를 초청하도록 했다.

이민 비자 또는 영주권을 받으려면 적어도 반년을 기다려야 한다기에 생계를 위해 강남의 영어회화학원에 강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학업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가끔 미국문화원 도서관을 찾았는데, 어느 날 서가에서 눈에 번쩍 들어오는 책을 발견했다. <Anti-Americanism in the Third World> (제 3세계에서의 반미주의). '반미주의'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니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의 반미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은 없었다. 발행 연도가 1985년이니 전문서적 치고는 신간에 속했다. 당장 집으로 빌려와 읽으면서 번역해 출판하면 공부도 되고 돈벌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회화 강사로 돈을 꽤 버는 편이었지만 그만두고 번역에 몰두했다.

번역을 끝내고는 한국의 반미운동에 관한 글을 써서 덧붙이고 싶었다. 대학원생으로서 번역서보다는 편역서를 내는 게 더 출세할 것 같다는 허욕까지 생긴 것이랄까. 어설프게 '편역자 서문'도 쓰고 '편역자 후기'도 썼다. 1988년 11월 유학 비자가 아닌 이민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까지 모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제 3세계에서의 반미주의>를 번역하고 "한국에서의 반미주의"를 쓰는 동안 나는 어느새 반미주의에 빠져들며 반미주의자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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