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바다에 잠기고 살 수 있었던 생명이 무참히 죽어간 지 꼭 5달 만인 지난 9월 16일 대통령은 ‘세월호 정국은 끝났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밝힐 특별법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이 법은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며, “외부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단다.
과연 세월호 사건은 마무리되었나? 대다수 언론이 전하듯이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피로감을 느끼며, 이 사건 때문에 애써 살려놓은 경제회생의 불씨가 꺼지게 되었는가? 그 모든 말이 사실이 아님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특별법이 사법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 아님은 이미 상당수 법조계 전문가들이 강조한 바와 같다. 그동안 바뀐 것이라곤 해경 간판과 수도권 광역버스 입석금지 정도이다. 그런데 끝난 일이란다. 무엇이 끝난 것일까.
경제의 불씨가 꺼진다는 말로 사람들의 막연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에 호소하면서 사실을 호도한다. 세월호 사건 이전이나 이후와는 별개로 경제는 그 자체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자영업을 비롯한 경기침체 현상을 경제적 삶이 무너진다는 두려움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경제가 죽어간다는 말은 요술방망이처럼 현실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 부패와 부정을 감추는 데 결정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마치 종북 좌파란 딱지처럼 이 말들은 꺼내는 순간 모든 합리적인 토론이나 논쟁을 일거에 잠재운다.
경제와 이념의 영역에서 생겨난 이 두 가지 환상과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우리를 눈멀게 하고 귀막게 하여 어떠한 정상적인 생각이나 행동도 막아버리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대통령은 또 다시 이 전능한 요술방망이를 꺼내고 있다. 종북 좌파 논쟁이 잠시 대통령에 대한 모독 발언으로 바뀐 정도가 옛날과는 다를 뿐이다.
온갖 논리로 세월호를 감추려는 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그들만의 욕망과 특권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거짓된 시스템과 부패 고리, 모순된 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를 위해 자식 잃은 사람들을 모독하는 이들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중심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혈동물이다. 아마 그들의 말처럼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알아챌 능력과 생각이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의 잘못된 의도가 드러나더라도 정치적으로 이들을 제어할 능력이 이 나라에는 없단 말인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실 단순하다. 잘못된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렇게 비참하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참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 사건을 금방 마무리 될 것이다. 그런데도 감추고 회피하는 대응은 또 다른 굴레를 따고 이 사건을 눈덩이처럼 키우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단순한 해상교통사고에 지나지 않았던 세월호 사고는 참사가 되었고 이제 역사가 되고 있다. 세월호 사고와 이후의 구조과정에서 보았듯이 자본의 탐욕은 물론, 국가 기관의 부패와 무능,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동 때문에 이 사건은 참사가 되었다. 이후 이를 감추고 당연히 해야 할 진상규명을 외면하기 위해 국가가 거짓과 억압의 길로 접어들면서 역사가 되고 있다. 이런 전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들에 의해 이 사건은 변혁의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그 변혁은 그들의 부패와 무능을 물론, 그들만의 욕망과 그를 채워가려는 거짓된 시스템을 해체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변혁일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뱉어낸 수많은 망언과 자식을 잃고 우는 부모 앞에서 버렸던 인간 이하의 온갖 행태는 그들의 숨은 마음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처음에는 이 말들이 그저 해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그들의 본심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람의 생명이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국민을 이중으로 분열시켜 그들의 이익과 욕망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과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을 구별한다. 그래서 그들의 숨은 욕망에 맞서는 사람들을 “가만히 있으라”고 겁박하고 삶의 터전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온갖 현란한 문장과 선전으로, 필요하다면 힘으로라도 그들을 탄압하고 억압한다. 우리 사회는 아주 빠르게 양극화되고 있다. 배제되는 삶은 배제되는 존재를 낳는다. 우리는 존재의 목소리를 빼앗기고 있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태도는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사람다움을 생각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 그래서 이 나라와 이 사회가 그런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고 자신들만의 욕망을 위해 사람을 배반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무리를 구별하는 잣대 말이다. 그가 어떤 자리에 있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외형적인 모습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존경받는 성직자였다면 이후 그가 위선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이름난 학자였다면 그는 거짓을 주장한 곡학아세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를 호도하는 언론은 사기집단일 것이니, 다시는 그들을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 단호하게. 단호함이 없이 변혁은 시작되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은 이 나라의 온갖 부패와 무능, 무책임과 비인간적 작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들만의 특권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오작동 되었던 온갖 시스템과 체계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가 대선에 개입했어도 이를 감추고 대통령의 정당성을 위해 법이 자신의 역할을 내팽개치는 이 나라의 거짓은 결코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사고 현실에 관계되었던 수많은 사람과 기관들은 물론, 그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던 악행들, 인명 구조는 회피하면서 오직 위만 쳐다봤던 사람들의 무책임은 어디서 왔을까. 그들은 모두 그동안 오작동 되었고, 그들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온갖 거짓을 일삼은 이들에서 익히 배우고 학습했던 데서 생겨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다. 법이 거짓으로 작동하고, 공공기관이 사실은 사적 이익을 채우는 수단이었음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국가를 위해 적을 감시하고 정보를 찾으라고 권력을 맡겼던 기관이 사실은 그들만의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사적으로 움직였음을 사람들은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공했으니 처벌받지 않는다.
4대강이 썩어가고 생명의 터전이 파괴되어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재벌과 부자들은 온갖 혜택을 받으면서 부와 권력을 키워가지만 힘없는 시민들은 점점 더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다. 사회 시스템을 바꾸려는 수많은 시도 뒤에는 기업의 논리와 이익을 키우려는 정책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민영화란 이름이든, 경제 살리기란 이름이든, 투자 활성화란 이름이든 그 모두는 사람을 현혹하는데 쓰고, 일단 목적만 달성되면 헌신짝처럼 버리면 된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공약(公約)은 빈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모든 학습효과가 이런 참사를 초래했다. 그러나 역사가 되고 변혁이 되는 것은 이렇게 휘둘려 왔던 이들에 의해서이다. 역사는 민중에서 시작된다. 누가 이 참사를 역사로, 변혁으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있는가. 감추고 지키려는 억압과 거짓이 커질수록 드러나는 진실은 추악하고, 그 파괴력은 더 커질 것이다.
세월호 문제는 끝났는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그들은 이 나무가 죽었다고 말한다. 아니다. 이 나무는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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