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한 기부 캠페인인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성황이다. 많은 인사들이 나선 데는 이 캠페인의 발랄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랄함만은 아니다. 갈등과 대립의 정점에 있는 세월호 정국을 배경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과 여야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모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캠페인에 대거 나선 배경은 지금이 기부와 자선이 만인에게 칭송받는 미덕이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부와 자선이 '사회악'이었던 시대를 지나
기부와 자선이 언제 어디서나 만인의 칭송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상업과 제조업이 발달하기 전 유럽의 봉건귀족이 외지인을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일상적으로 베푼 대규모의 향응과 잔치를 묘사했는데, 이때의 향응과 잔치는 자선보다는 제도화된 재분배 정책에 가까웠다.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자선과 칭송의 외양을 띠고 있었지만, 자선이 사실상 귀족들의 의무였다는 뜻이다.
각자의 생존을 시장 교환을 통한 이득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대의 개막과 함께 기부와 자선은 돌연 사회 발전을 가로막거나 인류의 행복을 악화시키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1714),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이 이런 인식을 대표하는 저작들이다. 이런 사고는 19세기에도 이어져, 허버트 스펜서는 자선이 "생존에 부적합한 사람을 제거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자선을 금지하는 것은 자선을 베풀려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승인했다.
'자선=악'이라는 사고는 몇몇 휴머니스트를 제외하고는 당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확고하고 지배적인 기류였다. 모든 이들에게 최저 생존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복지국가의 등장, 인권 의식의 성장과 함께 이런 무지막지한 논리는 힘을 잃었다. 역설적이게도 기부와 자선에 대한 최근의 칭송은 복지 제도의 축소와 파괴, 즉 신자유주의 조류를 타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있다. 적어도 가진 자들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의 기부와 자선에 대한 찬양은 국민 복리를 위한 국가 개입의 확대와 이를 위한 증세에 집요하게 반대하는 맥락 속에 배치되고 있다.
'공화당 워런 버핏세'가 이 맥락을 이해하는 단편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여진으로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은 정부 부채 축소를 위해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일명 '버핏세'를 추진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에 맞서 의무적인 세금 납부가 아니라 납세자가 내고 싶은 만큼을 재무부 기금에 '기부'할 수 있는 법안을 2011년 발의했다. 민주당의 버핏세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의회에 묶여 있다. 세금이 아니라 기부로! 국가 개입이 아니라 개인의 자선으로! 이것이 기부와 자선이 다시 칭송받게 된 시대적 배경이다.
기부 캠페인보다 4대 중증 질환 공약 이행이 더 중요
지금 확대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과연 이런 기조와 무관할까?
암, 심장병, 뇌혈관과 희귀 난치성 질환은 국가가 치료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루게릭병은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따라서 4대 중증 질환 국가 보장 공약이야말로 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한 최선의 대안이다. 그런데 이 공약은 2013년 보건복지부 업무 보고에서 실천 방안 누락, 정부 예산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한 민간 기부금 전용 등의 논란 속에서 그 이행에 대한 정부 의지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초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지방척수수막류'라는 희귀병을 앓는 자식의 치료와 간호를 위한 경제적 고통 때문에 일가족이 자살하기도 했다. 2013년 국회 보건복지부 업무 보고에서 통합진보당 김미희 의원은 100mg 단위로만 적용되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백'의 보험적용을 400mg 단위로 적용해 환자들의 의료비를 경감시키자고 촉구했는데, 이런 작은 일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부 여당은 19개 경제 활성화·민생 법안의 조속 통과를 명분으로 세월호 정국의 탈출을 도모하고 있다. 정부 여당의 선전과 달리 법안 대부분은 규제 완화 법안들이고, 반민생 법안이다. 루게릭병 환자들을 돕는다는 자선 캠페인이 성황리에 전개되고 있는 이면에서 4대 중증 질환 국가 보장 공약의 충실한 이행을 통해 획기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는 수많은 희귀병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이 방치되거나 연장되고 있고, 궁극적으로 민생 악화를 불러올 규제 완화 법안들이 무더기로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 여당의 공약 이행과 무관하게 아이스버킷 캠페인 자체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확인하고 북돋는 일이다. 문제는 기부와 자선이 어떤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 배치되는가이다. 축제와 같은 캠페인이 진행되는 와중에 4대 중증 질환 국가 보장 공약이 사회적으로 재환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캠페인이 어떤 맥락에 위치하는지 짐작케 한다. 단언하건대 아이스버킷 캠페인을 통한 루게릭병 환자 돕기는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 공약의 완전한 이행보다 더 나은 자선의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캠페인에 쓰이는 얼음물의 차가움에 기대할 만한 용도가 있다면, 기부와 자선이 세금과 국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각성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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