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 유학을 마치고 9월부터 경상도의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 맡은 과목은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 담당 강사가 있었는데 수강 신청자가 넘쳐 학급을 둘로 나누는 바람에 한 강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수강 신청이 폭주한 배경은 7월의 김일성 사망이었다.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그가 죽었으니 머지않아 북한이 무너질 텐데 통일에 대비해 북한을 공부하자는 것.
미국 유학 10년 동안 미국정치와 국제관계 등의 분야를 주로 공부하면서 한미관계에 대해 학위논문을 쓴 터라, 북한 관련 수업을 맡기 어렵다고 주임교수에게 말했더니 그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한국인이 정치학을 전공하면 북한 연구는 기본이지요." 한국인 정치학자의 기본을 갖추면서 먹고 살기 위해 북한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업 첫날 설렘과 긴장을 달래며 200여 명의 학생들 앞에 섰다. 먼저 담당 강사가 바뀐 점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대타(代打)가 홈런 친다"는 한 학생의 격려에 "홈런은 못 치더라도 안타는 날리겠다"고 대꾸했다. 그리고 북한에 관한 무식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강의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도서관과 서점을 뒤져 북한 관련 책을 싹쓸이하다시피 구해 밤을 밝히며 읽어나갔다. 다음 학기엔 내 이름으로 개설된 강좌에도 수백 명이 몰렸다. 내 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김일성 사망과 북한 붕괴 가능성이 북한 공부에 대한 특수(特需)를 불러온 것이다.
1996년 3월부터 원광대학교에 교수로 자리 잡으면서도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를 맡게 되었다. 고참 교수로부터 물려받은 과목인데 여기서도 수강생이 넘쳐 다음 학기엔 강좌 수도 늘리고 야간강좌까지 개설했다. 1995~96년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식량난 때문에 곧 폭동이 일어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커진 덕분이었다.
그 무렵 북한 전문가들은 여기저기서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6년의 한 정치학회에서는 "북한이 지금 붕괴되고 있는 중"이라며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안에 남쪽에 의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발표가 나왔다. 통일부 산하 민족통일연구원은 1996년 펴낸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수준 평가 및 내구력 전망>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2001~2008년 사이에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제적인 경제협력 관계가 미약하며, 식량과 유류 등 안보자원을 원활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붕괴 요인으로 들면서.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비서가 북한을 탈출하자 '북한 붕괴론'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당선자가 첫 통일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전망을 쏟아냈고, 후보자 토론회에서는 "북한이 붕괴되어 통일되면 북한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북한에 대해 겨우 2~3년 공부한 초보자가 전문가들에게 대드는 꼴이었다. 북한 관련 학회엔 중앙정보부 후신이요 국가정보원 전신인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가끔 참석해 나더러 학생운동권 출신이냐고 물으며 왜 그렇게 친북적인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지 시비를 걸기도 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엔 한 여학생이 걱정스레 물었다. "교수님, 학계나 언론계 모두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수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붕괴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럼 교수 그만둬야죠." 그렇게 객기를 부린지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아직 가난한 친북학자의 밥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대답 때문에 정년퇴임 전에 옷 벗을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다.
1998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일주일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험한 꼴을 많이 보았다. "북한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말이 나돌 만큼 몹시 어려운 때였다. 추석날조차 평양 시내를 거니는 사람들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황해북도 사리원의 한 육아원에선 방마다 그야말로 산송장처럼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이 누워있었다. 평양을 떠나며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북한 붕괴는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왔는데, 이렇게 기본적으로 먹고살기조차 힘들다면 차라리 무너지는 게 좋지 않을까. 남쪽 사람들 눈칫밥이라도 얻어먹으며 살아남는 게 굶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쪽에 돌아온 뒤에도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빼거나 고쳐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해외의 친북 교수들에게까지 자문을 구하면서.
마침 조선족 유학생이던 작가 장영철이 1997년 펴낸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리라고. 연변에서 온 동포 직업연수생들이 남한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멸시당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며 "만약 전쟁이 다시 한 번 난다면 총을 들고 선참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놈들을 쏴 죽이겠다"는 악담을 퍼부었겠는가.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며 고국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 그 정도라면, 떼거리로 내려와 빌어먹을 북쪽 사람들이 남쪽의 잘난 사람들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북한 붕괴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를 기대하거나 겨냥하면서 대북정책을 세우는 것 같다. 대통령이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며 통일 기금을 조성하자고 하거나, 국민이 통일되면 사회혼란이 일어나고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는지 아래에 밝힌다.
1. 붕괴의 개념과 종류
북한의 붕괴에 관해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붕괴’라는 말의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붕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정권 또는 정부가 무너지는 것. 둘째, 체제 또는 정치경제구조가 무너지는 것. 셋째, 국가 또는 국민이 무너지는 것. 이를 북한에 적용하면, 김정은 정권의 붕괴,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붕괴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권 또는 정부의 붕괴는 최고 권력자가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거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통치 권력에 공백이 생기거나 지도자가 바뀌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권력 엘리트는 바뀌어도 일반적으로 정치와 경제체제의 기본적인 특징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선진국에서든 후진국에서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든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남한에서도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에 따라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 역시 쿠데타나 대중봉기에 의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
둘째, 체제 또는 정치경제구조의 붕괴는 정치 및 경제적 틀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반드시 정권의 변화를 전제하지는 않지만 최고 권력자 및 권력 엘리트의 교체보다는 훨씬 포괄적이다. 1980년대 중반 중남미 및 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독재체제가 민주체제로 바뀐 것이나,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 물질적 풍요에 대한 동경에 따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바뀐 경우를 들 수 있다. 북한이 급속도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
셋째, 국가 또는 국민의 붕괴는 국민이 외부로 집단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국가의 존립 기반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전쟁이나 재난 등에 따른 신체적 탈출뿐만 아니라 정권 및 체제에 대한 신뢰 부족에 따른 정신적 탈출도 포함된다. 1989년 11월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을 넘거나 이웃 나라들을 통해 서독으로 집단 탈출한 것이나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된 경우를 들 수 있다. 북한 인민이 김정은 정권 및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불만이나 굶주림에 의한 좌절 또는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 등으로 남한이나 중국으로 집단 탈출을 하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붕괴될 수 있다.
2. 북한 붕괴론, 언제부터 나왔는가
첫째, 1980년대 말부터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면서 1990년 동독이 무너져 서독에 흡수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북한도 곧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왔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동독보다 훨씬 뒤떨어진 북한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둘째,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50년 동안 통치해온 지도자가 사라졌으니 북한 체제도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4년 10월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며 제네바 합의를 이루어놓고 2002년까지 터만 고르고 있었던 배경이다.
셋째, 1995년 북한에서 "100년 만의 물난리"가 일어나 식량난이 세상에 알려지고, 1996년에도 엄청난 수해를 당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 식량 폭동이 일어나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의회에서는 "북한의 붕괴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는 증언이 나왔고, 남한의 학계와 언론계에서도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넷째, 1997년 황장엽 조선로동당 비서의 망명에 이어 외교관들의 망명이 줄을 잇고, 지식인들까지 탈북자 대열에 합류하자 북한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전망이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 사이에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며, "통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고 공언했던 배경이다.
1997년 말부터 남한도 외화 부족에 따른 경제난을 겪는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은 남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국가정보원 고위관리가 드러내기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 붕괴론이 수그러들었다.
다섯째, 2008년부터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이 퍼지면서 10여 년 만에 다시 북한 붕괴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며 뜬금없이 '통일세'를 언급하고 통일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통일 항아리' 사업을 전개했다.
여섯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권력을 잡자 북한 붕괴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아들은 50대 초반의 나이로 후계자가 된 지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아들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후계자 수업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정권 불안이 제기된 것은 당연했다. 그런 터에 2013년 12월 제 2인자로 알려진 장성택이 처형되자 체제 불안정에 따른 붕괴론이 고조되었다. 남한에서 국가정보원장이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의 조국 통일"을 주장하고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친 배경일 것이다.
3. 북한 붕괴론, 누가 왜 퍼뜨리기 시작했는가
북한 붕괴론은 전쟁 도발설이나 한반도 위기설과 함께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주로 미국과 남한의 정보부처나 군부에서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과 국방부가 북한의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을 가장 빈번하게 또는 주기적으로 주장해왔다.
첫째, 존 도이취 (John Deutch) 중앙정보국장은 1996년 2월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정치 경제적 상황 악화가 김정일 정권을 급속하게 붕괴시킬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증언했다.
둘째, 윌리엄 페리 (William Perry) 국방부 장관은 1996년 3월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식량 및 전력 부족 때문에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며, 이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개리 럭 (Gary Luck) 주한미군사령관은 1996년 3월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북한의 심각한 경제상황과 식량난을 볼 때 붕괴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이라고 증언했다. 북한이 그러한 내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남한을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한에 요격미사일을 배치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상원 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을 강조하며, 1997년의 국방예산 삭감을 반대했다. 군인답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넷째, 존 틸러리 (John Tillery) 주한미군사령관도 1997년 3월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북한의 붕괴와 남침을 우려하며, 1998년의 국방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그리고 남한 정부에 대해서는 1998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미군주둔 비용분담금을 늘리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와 같은 북한 붕괴론이나 전쟁 도발설은 정보나 국방 분야 책임자들의 업무 성격상 실제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밥줄'을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의 군사 위협이 줄어들면서, 관련 부서들의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예산 삭감을 막기 위해 북한 붕괴론을 이용해 왔다는 뜻이다. 북한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남침 가능성이 높아지고, 전쟁이 일어나면 정보국이나 국방부의 예산이 늘거나 최소한 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4월 무렵 의회에서 예산을 심의하는데, 이에 앞서 청문회를 열어 관련부서 책임자들의 증언을 듣는다는 사실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워싱턴에서 흘러나오는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 가능성에 관한 주장은 남한에서 반미감정과 함께 일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잠재우고 남한 정부에 미군 주둔 비용분담금 증액을 요구하며 남한에 무기를 더 많이 팔기 위한 속셈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994년 3월 윌리엄 페리 국방부 장관은 북한 핵무기개발 의혹을 구실로 전쟁 불사를 주장하며 남한에 패트리엇 미사일과 AH-64 아파치헬기 및 브래들리전차 등 새로운 무기들을 들여놓도록 이끌었다. 1996년 3월 북한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이 제기된 직후에는 주한미군 참모장 출신의 존 싱글러브 (John Singlove) 장군이 서울을 방문해 북한의 대남 미사일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미사일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1997년 4월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설이 흘러나온 뒤에는 윌리엄 코언 (William Cohen) 국방부장관이 서울에 와서 한미 간에 무기의 상호 운영성을 내세우며 남한이 러시아제 미사일 대신 미제 패트리엇 미사일을 구입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실제로 남한은 1996년 한 해 동안 10억 달러가 넘는 무기를 미국에서 사왔으며 1997년에도 그 액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냉전이 끝남에 따라 위상 약화와 함께 예산삭감 압력을 받아온 미국 중앙정보국과 국방부 그리고 위축될 우려가 있는 군수산업계에 북한 붕괴론과 전쟁 도발설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한의 안전기획부와 국방부도 필요할 때마다 북한 붕괴론을 흘리면서 남침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예를 들어, 1996년 안전기획부법 재처리 및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 붕괴론과 전쟁도발설이 흘러나왔고, 곧 안전기획부법 개정안이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국방부가 1996년 군비 현대화 및 지속적인 국방비 증액을 추진할 때도 북한 붕괴론과 전쟁도발설이 제기되고 1997년 국방예산은 무려 13%나 늘었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의 선거운동 기간에도 반북 분위기를 고조시켜 공안정국을 강화하는 데 북한의 전쟁 도발설은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 비판 세력을 억압하며 정권을 강화하는 데 남북 사이에 갈등과 긴장을 조성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드물었다. 북한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을 흘림으로써 북한의 자극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구실로 총화단결을 외치며 정부에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북한 붕괴론의 근거와 내용
미국에서든 남한에서든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제기된 북한 붕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정치적으로 김정일 체제가 불안하다. 김일성은 항일운동 지도자로서 정통성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김정일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 정통성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군부의 도움을 받아 물리적 힘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경제적으로 총체적 파탄 상태에 있다.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과 ‘경제 3난’이라 불리는 극심한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외화 부족의 악순환으로 경제가 자력으로 회복될 수 없다. 특히 식량난에 따른 대규모 식량 폭동의 가능성이 크다.
셋째, 사회적으로 통제체제가 느슨해졌다.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상호감시 체제가 이완되어 사회규율과 질서가 무너짐으로써 탈북자가 증가하고 있다.
넷째, 정신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가 실종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역사적으로 폐기되었고, 주체사상은 경제파탄으로 설득력을 잃었는데,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가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대외적으로 국제적 고립이 지속되고 있다. 테러, 인권탄압, 국제법 위반, 핵무기 개발 등으로 다른 나라들이 북한과의 협력을 기피하는 터에 당이나 정부가 밀수와 위폐 발행까지 주도해 국가의 윤리적 기초마저 무너졌다.
붕괴 과정과 관련하여, 주한미군사령부는 1997년 북한이 경제난, 사회적 불안, 신구 세대 간의 갈등, 국제적 고립 등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며, "외롭게 남아있는 폐쇄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스탈린주의적인 사회"가 7단계로 와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단계로 자원이 고갈되면, 2단계로 산업이 마비되고, 3단계로 통제력이 상실되며, 4단계로 대중통제가 강화될 것이다. 5단계로 인민의 저항이 생기고, 6단계로 지배세력이 분열되면, 7단계로 권력투쟁을 거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9년이 지난 2006년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가 로버트 캐플런 (Robert Kaplan) 역시 <The Atlantic Monthly> 10월호를 통해 위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5. 북한 붕괴론에 대한 나의 비판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워낙 폐쇄된 사회라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고 심층적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내재적 접근 및 분석방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북한 붕괴론을 반박하고 싶다.
첫째, 동유럽 붕괴와 북한 붕괴에 관하여. 북한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앞섰던 동독도 붕괴되었는데, 북한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와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주의 사이엔 적어도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동유럽 지도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도입한 '강요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자생적' 또는 '민족적'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둘째, 동유럽 국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며 '종속적' 처지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면,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용하며 '자주적' 입장에서 소련과 중국이라는 양대 사회주의국가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따라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무너지고 말았지만, 북한은 소련의 지원 중단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을지라도, 나름대로 자립 경제의 기반 위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김정일의 카리스마와 권력 기반에 관하여. 남한에서는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정통성을 얻지 못했다고 평가하지만, 정권이나 체제의 정당성 여부는 그 나라의 정치나 역사 또는 문화적 전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정통 사회주의를 따르지 않고 민족주의와 유교사상을 접합한 민족적 유교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최고지도자인 수령을 아버지로 그리고 조선로동당을 어머니로 비유하는 가족사회 또는 국가에서, 김일성 일가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에 몸 바친 혁명가족으로서 '전형적인 모범가족'으로 선전되는 가운데,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이 수령 자리에 오른 것을 북한 인민은 당연하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더구나 김정일은 1970년대 초부터 후계자 또는 실질적 통치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권력을 행사해 왔으며,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인 1990년대 초부터 병력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를 앞세우는 나라에서.
셋째, 경제난과 식량 폭동에 관하여.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경제난의 원인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을 꼽지만, 북한은 미국의 봉쇄와 경제 제재 그리고 자연재해 등을 내세운다. 인민들은 식량난이 미국 때문이라는 선전을 듣고,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보다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낫다는 사상교육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북한처럼 모두가 가난한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는 권력에 대한 불만이 잘 생기지 않는다. 1960년대 남한에서 "배고파 못살겠다"는 말이 나왔어도 커다란 불만이 없었듯이. 1980년대부터 경제력이 급상승한 남한에서 그래 왔듯이 빈부 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을 느낄 때 체제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표출되기 쉽다. 또한 1970년대 남한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에서처럼 불만이나 분노가 생겨도 감시와 통제가 심하고 시민사회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집단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렵고 더구나 대규모 폭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서유럽처럼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열린 사회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국민은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고, 정부는 여론을 잘 받아들여, 데모의 필요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 정보가 통제되고 자유가 제한되어 불만 표출이 어렵고, 데모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과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남한처럼 민주주의가 어설프게 발전해 완전히 열리지도 않고 꽉 닫히지도 않은 어정쩡한 사회에서 데모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요, 북한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배경이다.
넷째, 사회 통제체제 이완과 탈북자 증가에 관하여. 사실 1980년대 말부터 노동자계층의 탈북이 급증하고, 유학생 및 작가나 교원 등 지식층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나 당비서를 포함한 지배층의 망명까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지식층의 이반'이든 '지배층의 동요'든 그들 모두 정권이나 체제에 불만을 품고 북한을 탈출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자신들의 잘못에 따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소외감으로 탈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인 시게무라 도시미츠가 "요컨데 북조선 망명자의 대부분은 그 체제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소외되어 생명의 위기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북조선이란 사회에서 출세와 승진에 실패한 사람들이다"고 말했듯이.
이와 관련해, 남한에서도 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망명이나 이민의 길을 택한 사람들도 많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권력서열 2위로까지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해 주미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장 및 대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 등이 무더기로 미국에 망명했고, 육군사관학교장 및 외무부 장관을 지낸 종교지도자까지 북한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망명과 월북사건들을 남한 체제붕괴의 가능성과 연결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섯째, 국가 이데올로기 실종에 관하여. 북한 당국은 1995년 중반부터 '붉은기 사상'과 '고난의 행군'을 강조해왔다. 미국이나 남한이 '자본주의'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시장경제 체제'라는 말을 즐겨 쓰듯, 북한은 주체사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혁명과 고난을 강조하며 정권강화 및 체제유지에 힘써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섯째, 국제적 고립에 관하여.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만, 미래의 초강대국 중국을 지속적인 후원자로 두면서, 과거의 초강대국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만에 하나 북한이 붕괴 위기에 처하더라도 이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가만히 있기 어렵다.
특히, 중국은 '순망치한 (脣亡齒寒)' 즉 입술(북한)이 없어지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생각으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내세우며, 북한이 필요로 하는 전력의 80~90%와 막대한 식량을 지원해왔다.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안보를 위해 대북지원을 하는 것이다. 미국이 유엔을 앞세우고 남한과 일본을 끌어들여 북한을 봉쇄하고 경제제재를 강화해도 북한을 붕괴시키기 어려운 배경이다.
6. 북한 붕괴, 바람직하지도 않다
앞에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드러냈는데, 만약 붕괴되더라도 남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대강 얘기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첫째, 북한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면 중국이 가장 먼저 들어갈 것이다. 약 1500km의 국경을 마주하며 북한 구석구석에 엄청난 투자를 해놓고 있는 터에, 중국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이와 입술의 관계 (脣齒關係)'임을 주장하며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이다. 북한이 무너지면 미군이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선까지 올라가 주둔하기 쉬운데 중국이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과거엔 정부를 세운 지 1년도 되지 않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왔으며, 지금은 미국의 견제와 포위 정책에 맞닥뜨린 중국이다.
둘째, 북한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면 미국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북한 핵무기의 안전한 관리를 이유로 유엔을 앞세우거나 단독으로 북한을 점령하겠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남한과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가동해 북한을 점령하려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남한은 헌법에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지만,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국제법상 엄연한 독립국이다.
셋째, 북한이 위기에 처하면 군부 강경파의 결사항전에 따라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최소한 게릴라투쟁이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한 지도자들이 통일 되면 북한 통치자들에게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마당에, 100만이 넘는 병력과 첨단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 지배층이 남한에 순순히 투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넷째,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북한이 남한에 고이 접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붕괴가 외세의 개입이나 무력충돌 없이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남한은 혼란을 수습하고 탈북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부족하다.
2014년 현재 2만 명 남짓의 탈북자 가운데 약 80%가 극심한 빈곤으로 정부의 기초생활 보호를 받고 있는 데다, 남쪽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냉대 때문에 심리적 고통을 더 심하게 겪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엔 남쪽 생활에 큰 불만을 품고 캐나다나 호주 등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합법적으로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렇게 2만여 명의 탈북자도 제대로 껴안지 못하는 터에 북한이 붕괴되면 생길 2천만여 명의 ‘빌어먹을 사람들’을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7. 북한 붕괴론에 관한 제안
북한 붕괴론은 북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에 의해 나오기보다는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개심에서 제기된 경향이 크다. 예측이 아니라 희망사항이란 뜻이다. 북한 붕괴가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올 것 같다면 가능성이 낮아도 붕괴를 유도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정책을 세우는 게 좋고, 반대로 붕괴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으면 가능성이 높아도 붕괴를 막거나 늦출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게 좋다.
물론 단 1%의 가능성이 실현될 수도 있고 99%의 가능성도 실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대책을 세워놓아야 한다. 중국이나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피하며, 사회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며, 북한 주민들이 중국보다 남한을 선호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실익도 없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반드시 은밀하게.
남한 당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할 뿐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악수(惡手)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정책을 세워놓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부추기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되어 궁극적으로 흡수되면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 아닌가. 안보나 통일은 우리의 궁극 목표가 아니라 남북한이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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