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과정과 결과
북한은 위와 같은 배경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 2003년 4월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전까지는 핵무기 개발이나 보유에 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며 애매하게 말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NCND (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을 폈다. 과거 미국이 남한 핵무기 배치에 대해 그랬듯. 핵무기가 있다고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불법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핵무기가 없다고 하면 미국으로부터 무시나 폭격을 당하기 쉽기 때문에, 있어도 없는 체하고 없어도 있는 체했는데, 2003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적어도 예닐곱 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북한 협상 대표가 미국 대표에게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밝힌 2003년 4월 시점은 미국을 참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유엔 무기 사찰단이 2002년 11월부터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2003년 2월 "어떠한 대량파괴무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공표했지만, 미국은 3월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말도 되지 않는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없다고 호소하는 이라크는 폭격하면서 핵무기가 있다고 큰소리치는 북한은 왜 가만두느냐는 국내외의 비난과 의혹에, 미국 정부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는 궁색한 대답밖에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으면 이미 미국의 침공을 받았으리라는 북한의 주장이 허풍이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나아가 북한은 2006년 10월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2009년 5월엔 2차, 2013년 2월엔 3차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2013년 4월 수정보충 된 헌법 서문에까지 "김정일 동지께서는 (중략) 우리 조국을 (중략)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고 명시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2012년 12월 인공위성 발사에도 성공했다. 1998년 8월부터, 2006년 7월과 2009년 4월, 2012년 4월까지 4차례 시험 발사에 실패하다 5번 만에 성공한 것이다. 인공위성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 즉 태평양도 건널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핵무기를 날려 보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소련은 1957년 10월 미국보다 먼저 세계 최초로 '스푸트니크'라는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는데, 이때 미국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스푸트니크 충격 (sputnik shock)'이라는 영어 단어까지 생겨났다.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라고 무시하던 '깡패 국가'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까지 갖게 되자, 미국이 '제2의 스푸트니크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4.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북미 협상
미국이 처음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낌새채기 시작한 때는 레이건 행정부 때인 1982년 4월이었다. 미국의 감시위성이 평안북도 영변에 원자로로 보이는 물체가 세워지는 것을 촬영하면서부터. 1988년 6월 커다란 원자로가 건설되는 모습이 감시위성에 잡히면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1988년 12월부터 베이징에서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해, 1992년 1월엔 뉴욕에서 "최초의 북미 고위급 정치적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긴장과 대결이 높아졌다.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지만, 물밑 접촉은 계속되어 1993년 6월 북미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94년 3월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북한 핵시설 사찰에 실패했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전쟁 불사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한반도를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로 몰아갔다. 미국의 전쟁 위협은 1994년 6월 러시아의 격렬한 미국 비난, 중국의 단호한 북한 지원 표명, 그리고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통한 중재 등으로 해소되었으며, 이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시키는 대신, 미국이 대체 에너지를 공급하고 경수로를 제공하며 북한에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고 북한과 정치 및 경제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협정은 미국의 속임수와 다름없었다. 남한에서는 북한이 협정을 지키지 않아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약속을 더 먼저 더 많이 지키지 않은 쪽은 미국이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이 머지않아 붕괴하리라 예상하고 경제 제재를 조금 풀며 경유만 제공했을 뿐, 경수로 건설과 관련해서는 2002년 '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될 때까지 8년 동안 경수로가 들어설 터를 고르는 일밖에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1999년 초에는 평안북도 금창리의 지하 시설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1999년 5월 미국 대표단이 그곳을 사찰하여 의혹을 해소함으로써 북미 관계 개선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이는 1999년 9월 북미 베를린 합의로 이어졌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당분간 중지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국교정상화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1999년 10월엔 '페리 보고서'로 불리는 대북정책 제안이 발표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반도의 냉전 체제 종식을 위한 3단계 목표를 포함하고 있다. 1단계 목표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하며 서로 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 목표는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고,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 협상을 본격화한다는 것이다. 3단계 목표는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정상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남북한은 실질적인 통합으로 볼 수 있는 남북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2000년 10월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나라는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체제로 바꾸어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00년 11월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 및 북미 정상회담을 합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달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 2세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반대하는 바람에 북미 사이의 관계는 더 진전될 수 없었다. 그는 2001년 1월 취임해 국정연설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가 '악의 축'(Axis of Evil)을 이루고 있다며 미국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공언했다.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무기를 가지려는 정권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2002년 10월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워싱턴에 돌아가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통한 핵개발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미국이 악의적으로 왜곡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및 북·미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며 핵무기 개발을 무조건 먼저 포기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2002년 12월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해마다 50만 톤씩 제공하던 중유를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두 나라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의 자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포기해야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주장하고,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해야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맞섰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국제적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두 나라뿐만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들도 참여해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미국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며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해왔기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이라며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만 해주면 풀릴 수 있으니 두 나라만 협상하면 된다고 대꾸했다.
5. 북한 핵무기와 6자회담
이런 가운데 중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북한과 미국 그리고 중국 사이에 3자회담이 열렸고, 2003년 8월부터는 남한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추가된 6자회담이 시작되었다. 지루한 협상 끝에 2005년 9월 드디어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원칙이 정해졌다. '9·19 공동성명'으로 중요한 합의 사항을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그와 관련된 계획까지 포기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하지 않는다. 셋째,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넷째,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며 경수로를 지어줄 수 있다. 다섯째, 6개국은 한반도 평화 및 동북아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 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부터 북한 체제 붕괴를 목표로 삼은 듯 북한을 거세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첫째, 2005년 9월 중순 마카오의 한 은행을 '북한 관련 돈세탁 우선 우려 대상'으로 지정해 북한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둘째, 북한의 인권 상황을 비난하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압력을 가했다. 2005년 11월엔 유엔 총회에서 북한의 인권 기록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이끌었고, 2005년 12월엔 'UN 세계식량계획'의 인도적 대북지원조차 모두 끊는 한편,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남한의 시민단체들을 지원했다.
셋째, 군사 외교적 위협까지 가했다. 백악관은 2006년 3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는데, 북한과 이란을 포함한 7개국을 지목하며 이들 나라에서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게 미국의 안보 전략 목표라고 밝혔다. 대량파괴무기의 확산과 관련해 이란과 북한을 상대로 자위 원칙에 따라 필요하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6년 3월엔 남한에서 한미 합동군사훈련 (RSOI)을 벌였다. 그 기간에 평양에서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릴 예정이라 남한 정부가 시기를 조정해줄 것을 미리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한 채 남북관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군사훈련을 강행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초기부터 북한을 고립시키고 경제 제재를 강화하면 북한 체제나 적어도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줄기차게 강경 정책을 폈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북한보다 미국이 고립을 당하는 듯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중국과 남한의 대북 지원 때문에 미국의 경제 제재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 세력이 다시 살아나고, 이라크는 이미 제2의 베트남이 되었다. 이란도 미국의 위협에 맞서 핵무기 개발을 진전시켜왔다. 중동에서는 미국의 분신과 다름없는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갈등과 긴장이 그치지 않고, 미국의 뒷마당이랄 수 있는 중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반미주의가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2006년 10월 2차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안에서는 2006년 11월 중간 선거를 통해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게 되었다. <워싱턴포스트>가 묘사한대로 "완고하고 단호하며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지도자" 부시 대통령도 대북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2005년 9·19공동성명 이후 약 1년 반이 지난 2007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이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13 합의'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두 달 안에 현존하는 핵 시설을 폐쇄하고 봉인하며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을 복귀시킨다. 둘째,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양자 대화를 개시하며, 미국은 테러 지원국 및 적성국 교역법 대상에서 북한을 제외한다. 셋째, 북·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개시한다. 넷째, 이에 맞춰 북한에 중유 5만 톤 상당의 에너지를 지원한다. 여섯째, 북·미 관계정상화, 북·일 관계정상화,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5개 실무그룹을 구성한다.
북한은 2008년 6월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핵 시설을 폐쇄한다는 상징적 조치였다. 그러나 북한 핵 폐기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그 원칙을 합의하지 못해 2008년 12월의 6자회담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2009년 4월 3차 인공위성 발사 실험을 하고, 5월엔 2차 핵실험을 했으며, 7월엔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미국에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고 '핵 군축 회담'을 가질 것을 요구해오고 있다.
6. 북한 핵 문제와 미국의 난처함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6자회담이 실패하고 나서 앞으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첫째, 북한 핵무기를 무시하며 방관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든 말든 개발하든 말든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국은 무려 1만 개 안팎의 다양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터에, 북한이 적으면 1~2개 많아야 10개 안팎 갖고 있다 한들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겠는가.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인정된다면 핵 물질과 기술을 가진 일본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기 쉬운 게 문제다. 일본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미국의 군사적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텐데,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기 곤란할 것이다.
둘째, 북한을 봉쇄하고 제재하며 붕괴로 이끈다. 지금까지 유엔을 통하거나 일본 및 남한을 앞세워 해왔지만, 중국 때문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게 문제다.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북한을 제재하더라도 중국이 이에 동참하지 않고 북한을 지원하면, 북한이 크게 잘 살지는 못해도 체제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의 체제나 지도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중국 자신의 안보를 위해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미국에 저항해 조선 (북한)을 도운 (抗美援朝)' 것처럼.
셋째, 북한의 핵 시설을 폭격하거나 침공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70~80번 다른 나라들을 폭격하거나 침략했다.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듯. 그러나 북한과의 전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는 미국의 침략에 맞설만한 군사력이 빈약했지만 북한은 남한이나 일본의 미군기지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보복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며, 이라크 주변 국가들은 미국의 침략을 소극적으로 반대하거나 도왔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 북한 주변 강대국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넷째,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북한이 요구하고 제안해온 대로 불가침조약이나 종전협정 또는 평화협정을 맺거나 국교정상화를 이루며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하지만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는 법적으로나 명목적으로는 북한의 남침을 막거나 물리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거나 봉쇄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북한과 미국 또는 남한 사이에 서로 침략하지 말자거나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평화적으로 지내자는 협정이 맺어지면 주한미군이 더 이상 유지되어야 할 명분이 사라지게 되고, 주한미군이 철수되면 미국의 중국 견제나 봉쇄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미국이 급속도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거나 봉쇄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을 적대국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북한이 오래전부터 군비 감축과 평화협정을 줄기차게 요구해도,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이 한사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경이다.
이렇듯 미국은 주도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어렵다. 무시와 방관, 봉쇄와 제재, 폭격과 전쟁, 협상과 타협 등 어느 하나도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북한 핵 문제가 1990년대 초부터 20여 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머지않아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다.
7. 역지사지와 발상의 전환으로
북한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선군정치를 포기하지 않고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하거나 준비하지 않고 있다. 남한 역시 주한미군 철수는커녕 감축조차 두려워하며 한미 공조 강화를 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남한의 역지사지 (易地思之)와 발상 (發想)의 전환 없이 북한 핵 문제를 풀 수 없고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단언한다. 처지를 바꿔 새로운 생각을 해보지 않는 한 평화도 통일도 불러오기 어렵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는 식의 대북 정책은 기저귀가 젖어 우는 아이에게 젖 줄 테니 울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남한에 미제 핵무기가 적어도 1000개 안팎 배치되어 있던 1980년대 중반 재야인사들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전 반핵 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핵무기를 반대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정부는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은 거세게 비난했다. "미국의 핵 우위와 미국의 핵우산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거나 "우리가 미군의 상주를 필요로 하고 위험 부담을 안은 채 그들의 핵 지원을 마다하지 않으며(중략) 한미합동 군사훈련 팀스피리트를 해마다 하는 이유는 불을 보듯 환하다. 즉 살아남기 위해서인 것이다"라며. 그리고 반전 반핵 평화운동을 '종북'으로 매도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고스란히 북괴의 최근 대남 모략선전과 정치 선동의 내용들과 일치하고 있다"면서 "북괴의 구호를 대변해서" 외친다고.
북한이 핵무기를 단 한 개도 갖지 못하고 소련이나 중국의 핵우산도 받고 있지 않을 때, 남한은 미군과 함께 '무려' 1000개 안팎의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그러면 미국의 폭격이나 침략 위협에 맞서 '기껏' 10개 안팎의 핵무기를 만든 북한 역시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지 않을까. 더구나 미국에 맞서던 소련은 해체되고 중국은 남한과도 손잡고 있으며, 주한미군은 유지되고 핵무기를 가득 실은 미군 잠수함은 한반도 주변 해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는 터에.
한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남한 국민 다수는 주한미군 철수를 원한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다. 그 나중은 아마 북한 핵 문제가 풀리고 한반도가 안정될 때일 것이다. 핵무기는 주한미군 철수 이전에 폐기되기 어렵고, 주한미군은 핵무기 폐기 전에 철수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으로.
나는 주한미군이 지금 당장 떠나도 남한 안보에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남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보다 군사비를 더 쓰기 시작해 30년 이상 두 배 내지 열 배 정도 많이 지출해왔는데도 아직까지 남한 군사력이 북한보다 열세라면, 군 지도자들은 무능 또는 공금 횡령으로 처벌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미군이 철수를 계획하지도 않고 남한 정서가 원하지도 않기 때문에 당분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북한에 핵무기를 먼저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주한미군 유지와 한미 동맹 강화를 추구하면서 핵무기를 폐기하라는 게 설득력이 있는가.
주한미군과 북한 핵무기가 공존하는 가운데서도 불가침조약이든,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이든, 국교정상화든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북한 핵 문제를 두 단계로 해결할 것은 제안한다. 1단계로 북한은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핵무기는 유지하되 더 이상 개발하지 않고 핵 기술이나 물질을 확산시키지 않는 대신, 미국은 주한미군을 유지하며 남한에 핵우산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을 법적으로도 끝내는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을 맺고 북한과 미국이 국교를 정상화한다. 한반도가 안정되고 남북 사이와 북미 사이에 신뢰가 쌓이면 2단계로 북한은 핵무기를 폐기하고, 남북은 군사력을 비슷하게 맞추며,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고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꺼려한다면, 한반도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비슷하게 제한할 수 있도록 한반도 중립화를 추구해볼 수 있다. 과거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할 때 그랬듯이. 문제는 남한이 얼마나 자주성을 가질 수 있느냐다. 그리고 해답은 역지사지와 발상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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