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다. 도착 첫날 호텔 배정 및 숙박비 문제로 북한 안내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방문 일정을 합의하면서도 논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초청자인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의 환영 만찬은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이튿날 저녁 환영 만찬에서조차 남한의 국장급에 해당된다는 참사 (參事)들과 대판 싸웠다. 방문 희망 장소를 나열하며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겠다고 공갈을 치기도 하는 등.
결국 내 객기와 만용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한 참사가 "엊저녁 교수 선생이 우리 공화국을 비판하는 걸 듣고 등골이 오싹했습네다"라며 내 부탁을 "특례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윗분'들이 먼저 면담을 요청하기도 하고, 일주일간의 호텔비를 단 한 푼도 받지 않는 등 엄청난 환대를 베풀었다.
이런 환대 속에 대남 정책을 총괄한다는 부서의 책임자들이 저녁을 내겠다고 했다. 나야 40대 초반의 새내기 교수이자 무명의 통일운동가였지만, 같이 간 목사가 널리 알려진 통일운동가였기에, 우리를 써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60대 후반의 원로 정치인 둘이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다.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은 뒤 한 사람이 남한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엔 북한도 자기네가 무슨 곰팡이냐면서 햇볕정책을 반대했던 것이다. "미제의 연착륙정책이나 남조선의 햇볕정책 모두 공화국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하려는 점진적 흡수통일 전략"아니냐며, 주한미군과 국가보안법도 비난했다.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북쪽에 와서까지 남쪽 비판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는 비판하되 아부하지 않고 뒤에서는 칭찬하되 흉보지 않는다는 게 내 소신이다. 우리가 남쪽에서는 북쪽 비판 자제하며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왔지만, 북쪽에 왔으니 남쪽 비판하는 대신 북쪽을 비판해보겠다"면서.
잠시 후 그는 북쪽의 통일정책을 소개했다. 김일성이 제안한 연방제통일 방안과 '10대 강령' 및 김정일이 그 해 4월 발표한 '5대 강령'이 "공화국의 유일하고도 공식적인 통일정책"이란다. 그리고 자신도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주석직을 승계하리라 예측했지만, 효성 때문에 주석 승계를 끝내 거부한 김정일이 얼마나 위대하냐면서, "위대한 장군님 말씀대로" 따라가면 올바른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다시 시비를 걸었다. 먼저 김정일의 직함에 대해. "북쪽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곳이니 당이 국가와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장군님이 '로동당 총비서'라는 직함으로 공화국을 통치한다면 수긍하겠지만,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나라를 영도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국방위원회를 앞세워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은 군국주의를 지향하며 결국 무력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군사독재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쪽의 30년으로 족하다며, '위대한 장군님'이 수령 독재에 군사 독재까지 하려느냐는 은근한 비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어찌 보면 '수령의 존엄'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라 꽤 무모하고 당돌한 시비일 텐데 그는 당황하거나 언짢은 기색 없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1970년대부터 대남 정책 분야에서 일해 왔다는 백전노장답게. "우리가 군사제일주의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지, 군국주의나 무력 통일을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공화국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미제와 일제가 손잡고 공화국을 압박하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주한미군도 모자라 일본군까지 불러들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곧 붕괴할 것이라고 떠드는데, 이러한 막중한 위기를 돌파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김정일이 '총비서'보다 '국방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북한을 이끌어가는 것에 시비를 걸었는데, 그는 '선군정치 (先軍政治)'의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한 셈이다. 사실 난 그때까지 선군정치에 대해 공부해보기는커녕 그 말조차 들어보지도 못한 터였지만. 아무튼 그의 대꾸는 북한에서 국가 위기를 돌파하며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군사제일주의 정책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방위원회를 강화해 김정일이 그 위원장을 맡아 통치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당시엔 생소했던 '국방위원장'이라는 김정일의 직함이 2000년대부터는 북쪽보다 오히려 남쪽에서 더 널리 사용되고 익숙해졌다. 선군정치를 남한 침략용이라 간주하고 몹시 비난하면서도 그 논리나 정당성을 강화해준 셈이랄까. 김정일의 수많은 공식 직함 중 가장 대표적 세 가지는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지만, 북쪽에서 실제 그에 대한 지칭은 '위대한 장군님'이었다. 김일성의 직함은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석',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지만, 그 지칭은 '위대한 수령님'이었듯이. 그러나 남쪽에서는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만 불렀다. 줄여서 '김정일 위원장'으로 부르기도 했고. '총비서'라고는 전혀 또는 거의 부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 한 초등학교에서 강연할 때의 일이다.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상대로는 여기저기서 무수하게 강연해온 터였지만, 초등학생들에겐 그야말로 난생처음이라 다른 때보다 많이 준비하고 살짝 긴장도 했다. "여러분, 대통령 할아버지가 지난주에 어디 다녀오신지 알아요?" "북한이요!" 또는 "평양이요!"라는 대답이 쏟아졌다. "그럼 거기서 누굴 만나고 오셨지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요!" 초등학생들까지 '국방위원장'이라는 생소한 직함을 정확하게 댄 것이었다.
참고로, 그로부터 6년 전인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은 다음 날 <한겨레신문> 1면에 "김일성 주석 사망"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의 기사가 나가자 그 신문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단다. "김일성이가 무슨 주석이냐"며 "그따위로 신문 만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과 함께. 이렇듯 1990년대까지는 대통령에 해당되는 '주석'이라는 직함조차 잘 알지도 못하고 쉽게 쓰지도 못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국방위원장'이라는 생소한 직함에까지 익숙하게 된 것은 물론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때문이었지만, 그에 앞서 이는 선군정치와 직접적이고 깊은 관련이 있기에, 선군정치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한다.
1. 선군정치의 배경과 논리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1995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되었다. 북한 내외 정세가 몹시 불안할 때였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동독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졌다. 1993-94년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미국이 경제 제재를 강화하며 금세 폭격할 태세였다. 그 와중에 북한을 세우고 반세기나 통치해온 김일성이 1994년 7월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인민들이 굶어 죽을 정도의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며 체제를 지키기 위해 김정일은 군대를 앞세워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날 박정희나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여차하면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해 군인들을 대학 캠퍼스에까지 쫙 풀어놓고 통치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라고 할까. 남쪽의 장군 출신들이 북쪽을 침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했듯이, 북쪽의 '위대한 장군님'역시 남쪽을 침략하고 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선군정치를 펼쳐왔다는 뜻이다.
본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에서는 당이 국가를 이끌어 간다. 북한에서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따라서 평상시엔 당이 앞장서 통치하는 게 원칙이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비상시기를 맞아 군대를 앞세워 통치하는 편법을 쓰게 된 것이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보다 충성심과 단결력 그리고 투쟁 정신이 강한 군인들이 앞장서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에.
북한 당국의 말을 빌리면, "나라 안팎으로 불어 닥친 시련과 난관을 뚫고 혁명과 건설을 다그치기 위해서는 '가장 무권리하고 빈궁한 처지에 있던 로동계급' 대신 '가장 혁명적이고 전투적이며 위력한 혁명집단인 혁명군대'를 혁명의 주력군 또는 핵심세력으로 삼고 나아가야 한다"는 게 선군정치의 논리다. 그래서 '선군후로 (先軍後勞)'라는 말도 만들어졌다. '앞엔 군대, 뒤엔 노동계급'이라는 뜻이니, 김정일이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라는 직함 대신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앞세웠던 배경이다.
2. 선군정치의 정의
김정일은 자신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선군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선군정치는 군사를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인민군대의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에 의거하여 조국과 혁명,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전반적 사회주의 건설을 힘 있게 다그쳐 나가는 혁명령도 방식이며 사회주의정치 방식"이라고. 여기서 군사를 제일 국사로 내세운다는 것은 "군사 분야의 사업을 다른 그 어느 분야의 사업보다도 나라의 제일 중요한 사업으로 내세우고 국방력 발전에 최우선적인 힘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민군대가 조국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군대가 "사회주의 하에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며 조직성과 규률성, 단결력이 가장 강한 집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선군정치는 단순히 군사를 앞세우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혁명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전반적인 혁명대오를 강화하는 정치이고, 혁명군대에 의거하여 사회주의를 보위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돌파구를 열어나가는 정치이며, 군대를 본보기로 하여 온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정치"라는 것이다.
3. 선군정치의 목표
선군정치의 목표 가운데 북한 당국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은 "미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인데, <로동신문> 1999년 6월 16일 자 논설은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제국주의와 반제 자주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고 있는 투쟁의 시대이다. 제국주의와의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사회주의 위업을 완성하자면 마땅히 군사가 중시되여야 한다..... 제국주의와의 사상적 대결은 힘의 대결에 못지않게 간고한 투쟁이다. 이 첨예한 대결전에서 승리하자면 혁명성이 강하고 사상적 신념이 투철한 전위부대가 있어야 한다. 그 담당자가 바로 혁명군대이다. 군대가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되면 사회주의의 지탱점이 허물어지게 된다. 설사 인민들이 정치사상적으로 준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군대가 견결하면 사회주의가 무너질 수 없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와해되던 과정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4. 선군정치와 선군사상 및 주체사상
선군정치는 선군사상으로 발전되었다. 선군사상은 "선군시대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혁명과 건설에서 군사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군사를 다른 모든 사업에 확고히 앞세울 데 대한 사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혁명군대를 가장 강력한 정치적 력량으로 보고 그의 혁명적 기질과 전투력 그리고 그의 역할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밀고나간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일이 2011년 12월 죽은 뒤 2012년 4월과 2013년 4월 부분적으로 수정 보충된 북한 헌법 서문엔 "김정일 동지께서는 김일성 동지께서 창시하신 영생불멸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전면적으로 심화 발전시키시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선군사상은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이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의 선군정치가 시작되기 전엔 선군사상이란 말이 없었으니 선군정치가 선군사상으로 발전되었다는 내 주장에 큰 잘못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연계되었다.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지키려면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여야 하고,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려면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로동신문> 2001년 12월 21일 자에 실린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힘있게 다그치자"는 논설의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선군정치는 주체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완성된 사회주의정치 방식이다.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밝히였다. 이 세상에 제국주의가 남아 있는 한 인민대중의 운명은 저절로 지켜질 수 없다. 강력한 총대가 없으면 인민대중의 운명은 롱락당하기 마련이다....
사회주의 운동사는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내세우지 못한 탓에 사회주의 진지가 밑뿌리채 흔들리게 된 쓰라린 실패를 한두 번만 기록하지 않았다. 혁명군대는 로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앞장에 서 있다. 군대가 흔들리게 되면 로동계급이 흔들리고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동요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어떤 대적도 굽어보는 필승의 담력도, 제국주의의 횡포한 압력과 제재에도 위축되지 않는 든든한 배짱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락관주의 정신도 불패의 군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강력한 군대가 있었기에 우리 인민은 풀죽을 먹으면서도 신심 드높이 최후 승리를 향하여 전진해올 수 있었다. 우리 당이 간난신고를 겪으며 걸어온 선군의 길이 천만 번 옳은 길이였다. 만약 선군정치가 아니였더라면 우리의 자주권은 열백 번도 유린당했을 것이며 우리 인민은 제국주의 노예의 처참한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자주가 나라와 민족의 생명이라면 선군은 정치적 자주성을 고수하는 생명선이다."
5. 선군정치의 미래 : '병진노선'으로
그렇다면 1995년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선군정치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나는 북한 당국이 선군정치의 목표를 실현할 때까지 이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앞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미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는데, 북한 학자들이 직접 확인해주었다.
나는 2000년대 초부터 2년마다 중국이나 유럽 등에서 열리는 한 학회에 참석해왔는데, 거기에 동참하는 수십 명의 북한학자들 가운데는 선군정치에 관해 발표하는 정치학자들이 한두 명 꼭 있기 마련이다. 북한 정치학자들의 논문은 로동신문 논설 몇 편을 짜깁기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들과 토론하며 정보를 얻는 가운데 빠지지 않는 내 질문은 "선군정치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인가"였고,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미 제국주의의 위협이 제거될 때까지"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까지"였다.
앞에서 잠깐 소개한 김정일 사후 수정 보충된 헌법 서문에서도 다음과 같이 선군정치의 업적을 못 박아 자랑하고 있으니 이를 쉽게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 있겠는가. "김정일 동지께서는 세계 사회주의 체계의 붕괴와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악랄한 반공화국 압살공세 속에서 선군정치로 김일성 동지의 고귀한 유산인 사회주의 전취물을 영예롭게 수호하시고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 강국, 핵 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으며 강성국가 건설의 휘황한 대 통로를 열어 놓으시였다."
2012년 김정은이 정권을 잡자, 남쪽에서는 그가 군사보다는 경제를 앞세우는 이른바 '선경정치(先經政治)'를 펼 것이라는 기대를 표출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를 살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젊은 새 통치자는 2012년 4월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총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에 있어서 평화는 더 없이 귀중하다"면서도, "우리에게는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이 더 귀중하다"고 강조했다. 평화보다 자주가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 선군정치를 중단하거나 포기할 뜻이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나아가 조선로동당은 2013년 3월 군사 건설과 경제 건설을 함께 발전시키겠다는 소위 '병진노선 (竝進路線)'을 채택했다. 핵무기 발전을 중단하지 않은 채 경제 살리기에도 힘쓰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를 김일성과 김정일이 추진했던 "독창적인 경제 국방 병진노선의 빛나는 계승"이라고 하며,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이라고 규정했다. 선군정치를 영원히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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