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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봉이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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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봉이냐'고요?"

[기자의 눈] "산재 사과 이후 첫 피해자 추모제, 변한 건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잘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과 결혼한 일, 다른 하나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려 싸운 일입니다.”

남편을 만났던 추억의 일터가 알고 보니 죽음의 공장이었다. 거기서 얻은 병으로 남편이 죽었다. 부인 정애정 씨는 10년 싸움을 기약했다. 싸움을 시작한 지 7년째, 남편을 떠나보낸 지 9년째. 웃는 표정이 예뻤던 남편을 기억하는 정애정 씨의 눈에서 실핏줄이 돋았다.

가랑비가 내리던 23일 오후, 서울 강남 삼성 본관 앞 풍경이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故) 황민웅 9주기 추모제’가 이 자리에서 열렸다.

▲고 황민웅 씨와 정애정 씨의 모습. ⓒ정애정
정 씨에게 이곳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소다. 삼성 공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숱하게 벌어졌다. 정 씨도 거의 매번 참가했다. 건물 앞 풍경은 눈 감아도 떠오를 만큼 익숙하다. 그러나 집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실랑이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경비 용역의 거친 욕설, 행사 방해. 이날도 그랬다. 추모제 플래카드를 붙일 때부터 거친 소리가 들렸다. ‘늘 그랬으니까’하고 흘려듣기엔 께름칙하다. 이유가 있다.

지난 5월 14일, 삼성전자 권오현 부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난치병에 걸린 피해자들을 향한 사과다. 그 뒤에는 피해자 가족과 삼성 측 대표가 대책 마련을 놓고 협상이 진행됐다. 처음에는 협상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 역시 기대감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삼성 측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4차 협상 직후인 지난 18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삼성 측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협상은 전망이 어두워졌다.

23일 행사는 권 부회장의 사과 이후 열린 첫 피해자 추모제였다. 삼성 경영진이 근무하는 본관 앞 행사다. 본관에서 일하는 숱한 임직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옛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국화 한 송이를 들고 나왔더라면, 피해자들의 마음은 달라졌을 게다. 협상의 전망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 산재 피해자들이 무조건 삼성을 적대시하는 건 아니다. 권 부회장의 사과 이후 열린 첫 협상이 끝난 뒤,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 측이) 교섭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고 말했었다. 삼성전자 이인용 사장(커뮤니케이션팀장)이 직접 참가한 자리였다. 적어도 이 무렵엔 피해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러나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다. 피해자 추모제를 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날 행사장 바로 옆에는 “일 좀 하자! 삼성이 봉이냐!”라고 적힌 종이를 든 사내들이 서 있었다. “국민 기본권인 행복추구권 침해하는 부당한 집시법 개정촉구 결의대회”라는 플래카드도 함께였다. 기자가 다가가자 사내들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들의 얼굴은 달라졌지만, 플래카드와 종이 문구는 낯설지 않다. 추모제가 열릴 때면, 종종 보던 것들이다.

정애정 씨는 이날 추모제에서 삼성과의 협상이 불편한 이유를 솔직하게 토로했다. 삼성이 진짜 사과를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다. “‘면죄부’를 사기 위한 협상”, “목숨 값을 흥정하는 협상”이라고도 했다. 삼성이 이런 마음을 정말로 어루만지고자 한다면, 우선 할 일이 있다. “일 좀 하자! 삼성이 봉이냐!”라는 종이부터 수거해서 버리는 일, 피해자 추모제가 잘 치러지도록 돕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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