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연재하면서 분에 넘치는 관심과 지지 그리고 격려를 많이 받고 있다. 한 변호사는 요즘 내 글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며 과장 섞인 서울 분위기를 전해준다. 70대의 국문학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용기 있는 발언"이 감동적이란다. 미국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는 80대 진짜 노 교수는 "옷깃을 여미는 글,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글"이라며, 계속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라 안팎에서 70~80대의 어르신들이 내 글에 감동하거나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진실'을 갈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난 어릴 때부터 워낙 소심하게 자라온 겁쟁이라, 아직도 북한에 관해 어디서 누구에게 강의나 강연을 하든 붙잡혀 갈까봐 긴장을 떨치기 어렵다. 글을 쓸 때는 토씨 하나에까지 신경 쓰며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그러나 법정에서 판사들과 검사들 앞에서는 몹시 민감하고 위험한 주제라도 오히려 느긋하게 열강하게 된다. 증인 선서 덕분이다. 증언에 앞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하기 때문에. 거짓 증언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겁쟁이가 남들보다 무슨 용기가 많겠는가. 판사가 양심에 따라 말하라는 선서를 시켜놓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처벌하지는 않을 테니, 맘 놓고 공부한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법정 밖에서 말하거나 글 쓸 때는 국가보안법을 의식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지만, 법정 안에서는 판사들의 비호 아래 소신껏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특혜를 누리는 셈이랄까. 어느 변호사가 어느 법정으로 부르든 기꺼이 달려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20년 정도 북한에 관해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가장 강조해온 점은 '북한 바로 알기'다. 우리에게 북한은 오랫동안 극심한 편견과 왜곡의 대상이었기에. 그러나 남한에서 '북한 바로 알기'는 아직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북한의 훌륭한 점이나 긍정적 부분을 소개하면 '친북'이나 '종북'으로 매도되기 쉽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 아무리 좋고 잘났어도 나쁜 점이나 부정적 측면이 있듯, 북한이 아무리 나쁘고 못났어도 좋은 점이나 긍정적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북한 바로 알기'의 기본 또는 핵심은 김일성과 주체사상이라 생각한다.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세워지고 주체사상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껴안아야 할 동포로 생각하든 쳐부숴야 할 적으로 간주하든, 평화 통일의 상대로 여기든 전복이나 타도의 대상으로 삼든,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편견과 왜곡 없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싸우더라도 상대를 먼저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김일성은 50대 이상의 세대엔 '가짜'로, 40대 이하의 세대엔 '분단의 원흉'으로 매도되고, 주체사상은 음흉한 대남 적화전략으로 오도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김일성, '가짜' 아니다. 진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동생까지 독립운동하다 죽었다. 그처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목숨 내걸고 총칼로 일제에 맞서 싸운 조선 사람 얼마나 되겠는가. '분단의 원흉'도 아니다. 1945년 8월, 김일성이 조선 땅 밟기도 전에 조선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미국이 38선으로 국토를 갈랐으니 '분단의 원흉'은 미국이지 왜 김일성인가. '6·25 전쟁'을 통해 분단이 굳어지게 한 죄로 '전쟁의 원흉'이나 '분단의 종범'으로 불릴 수는 있어도 '분단의 주범'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1945년 미국에 의한 분단이 없었다면, 1950년 김일성에 의한 '6·25 남침'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김일성이 해방 이후 저지른 '악행'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6·25 전쟁'을 일으키고, '수령 독재'를 실시했으며, '권력 세습'을 이끌었다는 것. 그러나 해방 이전의 '선행'은 앞에서 얘기한 국가 정통성 경쟁 때문에 고의적으로 감춰지고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 박정희의 심복 또는 최측근으로 1960년대 6년간이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회고한대로,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사실이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왔거나 왜곡된 '분단 이전의 김일성'을 소개한다. 김일성이 진짜 독립운동가였으니 그를 찬양하자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전의 선행 때문에 분단 이후의 악행에 비판을 삼가자는 것도 아니다. 국가 정통성 경쟁 때문이었든, 반공정신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든, 터무니없이 심각하게 저질러진 '역사 왜곡'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교양이나 지식, 신념이나 가치관,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주변 환경이나 시대 변화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실 자체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같아야 한다. '분단 이전의 김일성'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이유다.
해방 이전까지 김일성의 행적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지금의 평양인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 (金成柱). 전주 김씨로, 이룰 성, 기둥 주, 아버지가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란다.
아버지 김형직은 1894년생으로 1917년 기독교 계통의 항일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설립해 활동하다 감옥에 갇혔고 1918년 출옥한 뒤 '조국광복회'를 만들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1926년 죽었다. 어머니 강반석은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를 하다 1932년 만주에서 병사했다. 동생 김철주는 1930년대 초부터 항일빨치산에 투신해 1935년 옌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고 삼촌 김형권 역시 1930년대 초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6년 죽었다.
김성주는 1926년 아버지의 유언과 아버지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만주에 세운 2년제 정치군사학교"인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1927년 길림 육문중학으로 전학해 반일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930년 감옥에서 나와 중국공산당과 연계하며 국제공산당과 공조할 필요성을 느껴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을 세우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
그의 말대로 "독립군 출신의 몇몇 동무들과 화성의숙을 다닌 얼마간의 동무들이 있고 몇 자루의 권총이 있을 뿐"인데다, "조선부락에나 숨어있을 뿐 다른 데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밤에만 몇 사람씩 비밀리에 나다니는 형편이었다"고 하니, 이름만 거창하게 '혁명군'이지 기껏해야 수십 명의 '비밀유격대'였을 것이다.
이 무렵 그의 이름이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바뀌었다. 북한 자료들에 따르면, 그가 '조선혁명군'을 만들 때 동지들이 그에게 별과 같은 지도자가 되라고 '한별 장군'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단다. '한별'을 한자로 한 일(一), 별 성(星)으로 바꾸어 김일성(金一星)이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왕이면 별보다는 태양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취지에서 날 일(日), 이룰 성(成)으로 다시 고쳐 김일성 (金日成)이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 대해 외부에서는 엇갈린 추정이나 해석을 내놓고 있으니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첫째, 개명 시기에 관해 남한 정보부는 김성주가 1930년 김일성(金一星)으로 바꾸고 1935년 김일성(金日成)으로 고쳤다고 추정한다. 둘째, 개명 이유에 관해 일본의 북한연구 전문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는 그 무렵 항일투쟁을 전개하면 일제가 가족들까지 괴롭히기 마련이었을 테니 이를 염려하여 사려 깊게 가명을 썼으리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간도지역에 떠돌던 '김일성'이라는 '전설적 영웅'의 이름을 빌린 것은 게릴라투쟁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부터 중국공산당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조직은 한 나라에 하나밖에 둘 수 없다는 국제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중국 안에서 '조선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참여했다는 말이다.
1932년 4월 25일에는 비밀유격대같은 '조선혁명군'을 바탕으로 100여 명 규모의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그의 항일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반일 인민유격대'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지금 조선인민군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북한에서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해 이 날을 창군기념일로 삼아오다, 1978년부터 4월 25일로 창군기념일을 바꾼 배경이다.
1934년엔 '반일 인민유격대'를 '조선 인민혁명군'으로 바꿨다는데 이게 흔히 '동북항일련군 조선인부대'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주로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는데, 1936년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백두산 곳곳에 밀영을 만들어 조선 안에도 들어와 빨치산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전개한 투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37년 보천보전투다. 이는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가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의 일제 관공서를 습격하고 잠시 점령한 사건이다.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을 뿌린 뒤 김일성이 주민들에게 연설한 뒤 만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의 습격이었고 군사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지만, 그 무렵 우리 민족에게 사기를 높이면서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사건으로 평가받는 듯하다.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해 조선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탄압하는 가운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나 탄압 또는 회유에 의해 전향함으로써 광복에 대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만들어 김일성을 비롯한 '공비'들이 보천보에서 살인, 방화, 약탈 등을 저질렀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김구는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여운형은 주위 사람들을 불러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보천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일제의 패배를 확인한 뒤 김일성을 만나려 했다고 한다. 25살 청년 김일성이 "식민지 조선의 영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전투였던 것이다.
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김일성을 더욱 추적하면서 국내에 잠입해있던 그의 조직을 검거하는 한편 만주지역의 항일유격대를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했다. 이에 김일성부대는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며 빨치산투쟁을 벌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침략과 약탈이 극도로 심해지자 1940년 말 소련 연해주지역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대부대 활동으로부터 소부대 활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세우고 소련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1942년까지 소규모 유격대를 이끌고 소련 연해주, 중국 만주, 조선 백두산 등을 오가며 간헐적으로 투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7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 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가면서 국제 반제 력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확인하고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남한 정보부와 일부 북한전문가들은 김일성부대가 1940년 소련으로 후퇴한 뒤 1945년 평양에 들어올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은 없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해방 이전 "식민지 조선의 영웅"이었던 김일성이 분단 이후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노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시며,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로 살다 죽었다. 거의 신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남한에서 김일성이 가짜였던 이유
남한에서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첫째,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었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 김 모 씨는 자신의 집을 무너뜨리는 철거반원들에게 화가 나서 "김일성이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울부짖다 구속되었다. 김일성이 철거반원들보다 덜 나쁘다고 말한 셈이 되어 '이적 행위'로 1심과 2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둘째, '때려잡아야 할 놈'이었다. 전두환 정부 때인 1980년, 여고 1년생이던 조카가 "혹보 영감 가짜 김일성 때려잡자"는 주제로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 원고는 내가 썼음을 고백한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셋째, '고이 죽어서는 안 될 놈'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KBS TV 뉴스 진행자는 "우리가 처단하지 못하고 그냥 죽게 해서 원통하다"고 아쉬워했다. '분단의 원흉'이요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면서.
위에 든 사례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을 아무리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악의적으로 평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특히 끔찍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로서는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에 대해 무슨 말인들 못 하고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그러나 그 인식이나 평가가 '가짜'나 '분단의 원흉' 같은 잘못된 세뇌 교육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김일성이 남한에서 '가짜'가 되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구실이 있었다. 첫째, 이름 때문이었다. 아직도 "소련군 대위 김성주가 1945년 평양에 들어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도배하고 있으니 과거엔 오죽했겠는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뀐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그의 이름이 1945년에 바뀐 게 아니라는 점만 강조한다. 1930년대 항일 유격대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었지, 1945년 평양에 들어와 갑자기 '김일성 장군'이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나이 때문이었다. '장군' 치고는 좀 어렸기 때문이다. 1945년 10월 평양에서 '조선 해방 축하 겸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을 때, 백발이 휘날리는 사람이 아니라 30대 젊은이가 연단에 오르자 너무 젊다며 '가짜'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다. 겨울이면 흔히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20, 30대의 젊은이들이 아니고 40, 50대의 장년들이나 노인들이 눈 쌓인 산야에서 풍찬노숙하며 빨치산 투쟁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참고로, 요즘 남한 군대에서는 나이 50 안팎에 별을 달게 되겠지만, 1950년엔 정일권이 33살의 나이로 3군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한 국가의 몇십만 군대를 지휘했던 30대 초반의 대장에 비하면, 1930년대 수백 명 규모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20대 중반의 대장은 전혀 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일성의 나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스무 살의 김일성이 '장군' 노릇을 할 때부터 6살 위의 친삼촌 김형권이 부하대원이었다. 유격대원들 가운데 김일성보다 나이를 더 먹은 사람들이 많았다는데도 그가 항상 지도자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책은 김일성보다 많이 배웠고 9살이나 많았지만 김일성을 깍듯이 상관으로 받들었다는 일화가 널리 퍼져있다. 나아가 분단 이후 정부를 수립할 때도 30대 중반의 김일성이 수상을 맡을 때 그 보다 나이와 배움이 훨씬 많은 지도자들이 부수상을 맡았다. 경성파 지도자 박헌영은 12살, 옌안파 지도자 김두봉은 22살, 소련파 지도자 허가이는 8살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3대 천재'요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한 홍명희는 지금의 연세대학인 연희전문 교수 출신으로 24살이나 많았는데 중학교 중퇴 학력의 김일성 아래서 부수상을 지낸 것을 보면, 그의 지도력이 꽤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런데 김일성이 가짜로 매도되기 시작할 때부터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 인물들이 남한에도 있었다. 두 집안사람들만 소개한다. 최동오-최덕신 집안과 손정도-손원일 집안.
최동오는 1926년 김일성이 만주 화성의숙에 입학했을 때 그 학교장이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친구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2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독립운동가다. 해방 후엔 서울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다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여 화성의숙 제자였던 김일성을 만났다. 그의 아들 최덕신은 1930년대 만주에서 중국군장교로 항일전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는데, 6·25 전쟁 중엔 남한군 사단장으로 북한 인민군과 싸웠고, 휴전회담 때는 남한군 대표를 맡았으며, 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56년부터 베트남대사, 외무부장관, 서독주재 대사로 일하다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올라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한 뒤 1986년부터 평양에 정착했다.
손정도는 1929년 김일성이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바라지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고 그 뒤에도 꾸준히 그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던 목사다. 그 역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친구로,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기도 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손원일은 남한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뒤 1950년대에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분단 이전 2대에 걸쳐 우정을 나눈 김일성의 친구들이 해방 이후 남한의 육군과 해군을 이끌었던 셈이다.
남한 권력자, 김일성 실체 정말 몰랐을까?
남한 권력자들이 김일성의 과거를 진짜 몰랐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정보부처에서는 잘 알고 있었다. 반공을 통한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기 위해 김일성이 '가짜'라고 국민을 세뇌시켰을 뿐이다.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했던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와 김일성을 존경하기까지 했던 전두환의 안전기획부를 소개한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듯, 1960년대 중앙정보부를 6년간이나 이끌었던 김형욱은 1983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그가 함남의 길주, 명천 등지의 남삼군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김일성은 완전한 '가짜'라는 대목이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의 반공전선 교육의 가운데 토막이 돼오고 있었다. 이것은 공화당 정권에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는 김일성의 그만한 경력도 묵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재직 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가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1980년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안전기획부장을 맡고 있던 장세동은 1985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친서를 지니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일제하의 항일투쟁을 비롯하여 40년간 김 주석께서 북녘 땅을 이끌어 오시고 그동안 평양의 우뚝 솟은 의지를 보고 이러한 발전을 위하여 심려해 오신 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다시 드립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비록 체제와 이념은 다르지만 주석님의 조국애와 민족애를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장이 한참 뒤에 회고록을 통해 김일성이 진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전두환 정부의 안전기획부장은 현직으로 김일성의 면전에서 그의 항일투쟁에 대해 단순하게 인정한 것을 넘어 존경과 감사까지 드린 것이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2명이 함께 있었는데 박철언과 강재섭이다. 박철언은 1970년대 흔히 공안검사로 불리는 특수부장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세 번 하고 장관을 두 번 지내는 등 노태우 정부의 '황태자'로 불렸던 사람이고, 강재섭 역시 1970년대 검사 출신으로 2008년까지 국회의원을 다섯 번 하는 동안 한나라당 부총재, 원내대표, 대표최고위원, 대표 등을 맡았던 사람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엔 안전기획부 산하기관이었던 북한 전문 통신사 <내외통신>이 <북한 조감>이라는 책을 펴내며 다음과 같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30년 김성주 (金成柱)를 김일성 (金日星)으로 개명,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2년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년 김일성 (金日成)으로 재개명, 1936년 조국광복회 조직, 1937년 함경남도 보천보 및 증평리 습격 ....."
참고로, <내외통신>은 1999년 <연합뉴스>에 합병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북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정리하여 남한 언론에 전달하는 일을 해왔다. 당시엔 개별 언론사가 북한에 관해 독자적으로 취재하지 못하고 이곳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 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접했던 북한에 관한 소식은 거의 모두 <내외통신>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써진 조그만 쪽지가 끼워져 있다. "알림: 북한 주요인물 30인 약력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 등 일부 내용은 북한 측 주장임."
이 쪽지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얼마나 무능했거나 횡포를 일삼았는지 짐작게 한다. 첫째, 막대한 국가 예산을 쓰면서 북한에 관한 정보를 독점해온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가 북한을 반세기 동안이나 통치해온 김일성의 과거 행적을 독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북한 측 주장"을 그대로 옮기기만 했다면, 1960년대 초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30여 년이 지나도록 무슨 일을 했기에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확인하지 못했을까. 둘째, 일반인들은 물론 북한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도 사실로 확인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거나 알려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기 쉬웠는데, 안전기획부는 "북한 측 주장"을 그대로 널리 공표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내외통신>이 안전기획부의 무능이나 횡포를 드러내면서까지 그 궁색한 내용의 쪽지를 끼워 놓은 까닭이 있다. 안전기획부의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뛰어넘는 보수 언론의 억지와 압력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끝나고 1991년 북한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안전기획부와 그 산하기관인 <내외통신>이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밝히고자 했는데, <북한조감>을 미리 받아 본 극우 신문에서 거세게 항의를 했단다. 당시까지 약 50년 동안 모든 국민이 교육과 언론을 통해 김일성이 '가짜'라고 배우고 들어왔는데, 이제 안전기획부와 <내외통신>마저 김일성이 진짜라고 공개하면 여태껏 '김일성 가짜설'을 퍼뜨려온 언론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진실이 밝혀지면 과거의 왜곡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끝까지 진실을 가리려고 억지를 부리는 게 남한 극우 언론의 참모습이랄까. 분단과 전쟁을 핑계로 반공을 앞세워 편견과 왜곡을 일삼았던 교육과 언론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세뇌되어온 것이다. 1994년 이른바 '문민시대'에 그러했을진대 과거 군사독재 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가짜 김일성'의 사례들을 통해 역사 왜곡이 왜 빚어지고 어떻게 유지되며 왜 바로 잡혀지지 않은지 살펴보았는데, 더 이상 역사 왜곡이라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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