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희 교장선생님은 현재 상명대 중국어문학과 교수입니다. 전공이 중국의 고대소설 연구이지만(한국중국소설학회 회장 역임), 오히려 중국 여행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인데, 그 동안 하이난다오(海南島)를 제외한 중국의 전 성(省)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중국을 돌면서 찍은 사진만 약 10만 장이 넘는데, 이 가운데 4만 장 정도가 베이징에 관한 것일 정도로 베이징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이에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에 맞추어 <세계의 수도 베이징>(창비)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중요한 곳은 한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여행객이 아닌 현지 주민의 느낌으로 해당 지역의 장소감(sense of place)을 체화하여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 역사를 좀 더 대중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책이 너무 난삽하고 전문적이라 대중들이 읽고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5천 년이 넘는 중국 역사를 쉽게 한 권으로 요약한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조관희 교수의 중국 현대사 강의>(궁리) 연작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중국 소설과 중국 역사를 적절히 연결시킨 <소설로 읽는 중국사1, 2>(돌베개)를 펴내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방송을 통한 중국학 전파에도 힘을 써 2009년에는 MBC의 자회사인 MBC라이프 채널의 개국에 맞춰 제작한 중국 인문 기행 시리즈 가운데 1, 2편인 <베이징> 다큐멘터리를 진행한 바 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중국 여행 프로그램의 자문과 인터뷰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중국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겐 너무나 잘 알려져 진부하기까지 한 이야기입니다만, 중국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거기에 5천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유사 이래로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한 동안 서로 오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는 해방 이후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떠났듯 중국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을 하나의 기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그러한 시도 끝에 성공을 거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의 근원에는 하나의 원인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상대해 다뤄야 할 중국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품고 있는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만큼 우리는 중국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해방 이후 물밀듯 밀려들어온 서구 문화에 더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은 우리와는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의 고대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 대단한 것도 아니니 사실상 우리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중국학교에서는 우리가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새롭게 조명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첫 땅띔으로 <중국을 이해하는 8대 키워드>에 준비합니다. 앞으로도 중국학교는 강의 주제를 바꾸어 가며 우리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예정입니다.
중국학교 2014년 가을학기 강의는 9, 10월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이며 총 8강으로 열립니다. 달리 준비하실 것은 없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셔서 강의를 들으시면 됩니다.
<중국을 이해하는 8대 키워드>
제1강[9월4일] 황색
바람과 강이 만든 황토고원
우리가 중국을 떠올리는 이미지 중 가장 단순하고 강렬한 것이 바로 색깔일 것이다. 빨간색 혹은 노란색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이미지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란색은 중국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다. 세계4대 문명 중 하나인 황허문명은 바람과 강에 의해 만들어진 황토고원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줬던 황토고원과 황허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인들은 왜 황색을 좋아할까?
사람들은 언제부터 황색을 좋아했을까. 이전부터 중국 왕조에는 대표적인 색깔이 있었다. 하지만 노란색이 중요시된 것은 한나라 때부터였다. 동중서라는 관리가 한나라에 유가의 관념을 나라의 문화와 교육에 들여왔다. 그리고 오행을 주장하며 움직이지 않는 존재인 땅을 가운데로 두었다. 땅은 노란색을 상징했으며 중앙에 있었다. 황제도 세상의 중심이자 통치자로 땅과 같은 존재라 여겼다. 이로 인해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 노란색이 되었다.
중화사상은 중국인들의 정체성이다.
세계4대 문명 중 현대까지 살아남은 것은 중화문명뿐이다. 나는 황허문명의 생존에 지리적 고립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동쪽으로는 바다가, 서쪽으로는 광활한 고원과 사막이 있다. 대륙 안에 험준한 산맥이 버티고 있는 곳에서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키워온 것이다. 화이사상 이른바 중화사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구분된다. 황허문명을 만든 사람과 그렇지 않은 것. 이때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 아이덴티티가 바로 중화사상이다.
제2강[9월11일] 역사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며 그럴 필요가 있다.
중국 역사에는 많은 나라가 생기고 멸망했다. 그만큼 나라를 세우는 창업(創業)보다 대를 잇는 수성(守成)이 어려웠다. 많은 왕조, 나라의 흥망을 결정한 두 가지는 세금 징수와 인재 등용이었다. 탐관오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문벌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을 핍박하고 사회 순환이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왕조는 수성(守成)하지 못했음을 역대 황제들을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亂自上作 반란의 빌미가 위에서부터 주어진다
逼上梁山 핍박받아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官逼民反 관리들의 핍박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어진 정치인 왕도(王道)와 그렇지 못한 패도(覇道)의 모습을 동시에 보인 통치자들이 있었다. 송 태조는 공신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당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으나 그 후에 관리를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고사처럼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황제도 있었다. 한 고조는 나라가 자리를 잡은 뒤 한신을 죽였고, 명 태조는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공신 10만 명을 사형에 처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할까. 과거를 돌아보고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혹은 먼 훗날의 후손을 위해서서가 아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라 본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에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것을 안다는 말처럼 단순한 사실의 추구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잣대로 과거 사실을 재단하고 그것을 지금의 우리들을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3강[9월18일] 전쟁
전쟁은 역사에 어떤 의미를 미치는가?
중국은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쟁을 겪어왔다. 이유없이 일어난 전쟁은 없고 전쟁, 전투마다 그 의미가 있겠지만 역사에는 다행이나 불행이 없다. 우리는 만약에라는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역사에 가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도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쟁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중국의 역사는 둘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북조 전진과 남조 동진의 페이수이 전투는 중국의 역사를 그 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가 있다. 위촉오 삼국시대를 지나 하나로 통일된 진(晉)나라의 영토는 중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해진 사이 침략한 북쪽 유목민을 견디지 못한 진나라는 영토를 벗어나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분열된 북쪽을 다시 통일한 북조 전진(前秦)은 강남지역을 노리고 남침을 시도한다. 여기서 일어난 전투가 페이수이 전투이며 이 전투가 중국의 영토를 양자강 이남까지로 확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아편전쟁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들어온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자로 만들었고 청나라는 아편을 금지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은 안정된 무역을 주장하며 중국을 침략했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홍콩 할양, 배상금 지급 등을 약속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조약이 중국과 영국 간의 동등한 위치에서 맺어진 조약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생각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제4강[9월25일] 베이징
중국의 수도, 베이징
이번 강의에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만들어지고 그 역사가 쌓여져 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중국, 중화주의의 흥망을 함께 해온 베이징은 중국의 일부이자 전체이다. 수도 베이징에는 앞선 강의를 통해 알아본 중국의 5가지 키워드가 모두 들어있다. 베이징을 만든 기본 주거단위인 사합원에서 중국인들의 사상, 철학과 종교, 가족제도를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수도(首都) 베이징의 역사와 형태를 통해 중국을 이해해본다.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이 달린 용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역사에 등장하여 원(元)대에 비로소 수도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북방민족의 제2의 수도로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베이징. 많은 나라가 생기고 망하면서 수도 베이징도 조금씩 완성되어왔다. 종축선을 중심으로 한 좌우대칭과 도로, 구획 설정은 당시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수도의 모습이다. 주례(周禮)에 의거해 만들어진 이러한 이상적인 도시의 형태는 중국 시안(장안)을 넘어, 일본의 당시 수도인 교토에도 체현되어 있다.
이상적인 계획 수도, 베이징
현대의 중국은 과거의 영화를 좇는 것처럼 사회주의 중국의 힘을 베이징에 쏟아 붓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천안문 광장과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국기게양대, 인민혁명기념비도 베이징에 모여 있다. 근대 이후 서구열강의 기세에 눌려 중화주의가 몰락하면서 하늘 아래 유일한 수도라는 자존심을 잃어가던 베이징. 사회주의 신중국 수립 이후 계속해서 힘을 키워가는 중국의 베이징은 다시 한 번 천하의 수도를 꿈꾸고 있는가? 베이징을 통해 중국의 변화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제5강[10월 2일] 사합원
왜 사합원(四合院)인가?
중국의 대표 주거 형식은 사합원, 특히 베이징 사합원이다. 집은 사회 기본 단위인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때문에 주거형태에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철학과 종교, 가족제도가 반영되어 있다. 정문, 조형물만 봐도 주인의 직업이나 재산의 정도를 유추할 수 있다. 중국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 그리고 한족의 전통 주거양식인 사합원에 담긴 의미와 구성원리가 중국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도움이 될 것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본다
사합원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사방을 방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사합원은 외부의 시선을 거절하는 듯이 닫힌 모양을 하고 있다. 겹겹의 담장과 여러 개의 문, 한 쪽으로 치우쳐진 정문은 사계의 변화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 중국인 특유의 내향적·폐쇄적 세계관이 반영된 이 구조는 외부에서 봤을 땐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합원을 확장하면 자금성과 베이징이 보인다
사합원은 가족이 중심이 된 기본 주거 단위이다. 단위가 커질수록 공간은 확장되지만 형식의 차이는 없다. 같은 것이 반복될 뿐이다. 즉, 베이징의 황궁인 자금성도 커다란 사합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합원이 모여 만들어진 골목들이 도시인 베이징을 만들어냈다. 사합원에 담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한다.
제6강[10월16일] 문화대혁명
광기와 파괴의 역사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권좌에서 한발 물러난 마오쩌둥은 권토중래를 노리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마오쩌둥은 당의 고급간부들을 소집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은 부인인 쟝칭(江靑, 강청)을 위시한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 등을 사주해 국면의 반전을 꾀한다. <문화대혁명>의 물꼬를 튼 것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연극 공연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시작은 미미했으나, 이것은 이후에 밀려들 거대한 파도를 예고한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무엇을 위한 혁명이고, 개혁인가?
주지하듯이 <문화대혁명>은 전 중국을 쓸고 지나가며 많은 상처를 남겼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대 문화 문물들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남겨진 것은 역사의 흐름에 유린된 개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제7강[10월23일] 장성
누구를 위한 장성인가?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건설했던 장성이 정작 외적을 물리치는 데 한번도 유용하게 쓰였던 적이 없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중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부하고 있는 장성은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성이 오랜 기간 동안 축조되면서 그 형태를 달리하고 각각의 역사 역시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장성에 갇힌 중국사
장성은 그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성벽에 불과한가? 중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고난과 굴욕으로 점철된 지옥도라 할 수 있다. 한때 천하를 제패했던 최강대국 중국의 몰락 이면에는 봉건왕조를 질곡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폐쇄적인 세계관이다.
제8강[10월 30일] 홍루몽
중국 대표 소설 홍루몽(紅樓夢)
<홍루몽>은 우리나라에서 <삼국지>나 <수호전>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소설이지만, 중국에서의 인기는 다른 소설에 뒤처지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식민지였던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했던 것을 빗대어 중국은 <홍루몽>을 셰익스피어와도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대단원(大團圓)에 막을 내리다?
120편에 이르는 <홍루몽>은 남자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 그의 주위를 둘러싼 12명의 여인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의 이야기이다. <홍루몽>의 작가는 조설근(曹雪芹, 차오쉐친)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설근이 120편 전체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야 책의 형식으로 대량인쇄·출판이 되었기 때문에 <홍루몽>이 책이 되는 데에도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80편까지 완성하고 죽은 조설근은 나머지 40편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홍루몽의 매력은 현재도 통한다
세월이 지나도 계속 사랑받고 있는 <홍루몽>의 매력은 몇 번을 읽어도 새로운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홍루몽>은 마치 인간 세상을 함축시켜 놓은 듯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과 이야기에 <홍루몽>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오는 화제의 원천"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나지만, 남자주인공 가보옥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휴강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강의는 인문학습원 강북강의실(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아래 약도 참조)에서 열리며 참가비는 22만원입니다. 자세한 문의와 참가신청은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중국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