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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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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문학

9월 문학과철학학교 가을학기 개강

문학과철학학교(교장 양운덕, 철학박사)가 가을학기 강의를 준비합니다. 주제는 <사랑의 인문학>. 교장선생님은 가을학기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사랑에 빠지는가하면, 굳은 의지를 앞세워도 사랑을 뜻대로 제어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자는 자발적인 사랑의 노예이다.

이성적인 존재라고 뻐기는 인간은 왜 사랑에 빠지면 얼빠진 듯이 미치도록, 죽도록 사랑하고, 사랑의 제단에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가?(“이 한 몸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하고...”) 더없이 이기적인 개인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소중한 것을 바치고, 자기와 사랑하는 이 사이의 사소한 거리조차 견디지 못한다. 사랑의 노예는 왜 사랑하는 이를 완전하거나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기는가? 하지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왜 똑같은 존재가 그토록 달리 보이는지...

이번 강의는 사랑의 다양한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랑의 철학>과 <사랑의 문학>을 소통시킬 수 있는 <사랑의 인문학>을 추구한다. 진리를 그리워하는 <사랑의 철학>은 ‘이’ 사랑과 ‘저’ 사랑을 넘어서는 ‘하나’의 사랑, 불변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랑의 문학>은 ‘사랑의 화학’ 때문에 전적으로 변형된 개인들에 주목하고, 저마다 다른 사랑 경험들의 특이성들을 부각시킨다.

<사랑의 철학>이 사랑으로 (맹목적이고 가변적인 열정의 힘을 제어하는) 완전성을 추구하고, 본질적인 동일성을 그리워한다면, <사랑의 문학>은 근본적이고 내밀한 사랑의 이질적인 경험과 구체적인 사건을 뒤따른다.

우리는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명사보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는 ‘사랑하다’를 선호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자리매김하는 관계, ‘너와 함께’, ‘너 없이는’, ‘네 곁이라면’, ‘내 안에 있는 너’ 같은 배치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개별적인 체험들 곁에서 사랑의 난점과 역설을 살피면서도 순진한 경험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작은’ 질서와 ‘공통’의 관점을 마련하고자 한다(사랑의 ‘무엇’이 없이 ‘어떻게’에만 주목한다면 눈감고 달리는 것이고, ‘어떻게’를 무시하고 ‘무엇’만을 추구한다면 공허한 껍데기들만을 내세울 뿐이다).

사랑은 정체불명의 X도, 그렇다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고정된 어떤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앞서서 이미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주체로서 사랑하면서 겪는 역설과 모순을 존재의 조건이자 존재 능력을 증대시키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열정에 따른 수동성을 받아들이고 ‘겪는’ 주체이면서도 향유하고 누리는 능력을 지닌다. 우리는 감정의 복잡성에 휩쓸리면서도 사랑의 수동적인 종합을 마련하고 공존의 항로를 찾는다. 사랑은 바깥에서 오지만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에 그치지 않고) 주체 스스로 느끼면서(auto-affection) 근본적인 주관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자는 (닫히고 충족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게 열린 존재이므로, 이런 지향성을 바탕으로 타자와 공존하거나 파멸하는 모험을 겪는 상호주관적인 장을 펼친다. 나와 너는 하나 되기(하나 안에서 서로를 부정하기)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와 개별성을 보존하는 ‘함께’의 모험을 이끈다.

사랑의 주인공인 로미오는 햄릿의 질문을 바꿔서 묻는다. “사랑할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사랑의 제단에 자신을 바치면서 선언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존재한다.”

▲파우스트적 인간과 순결한 영혼의 만남,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이끄는 파멸과 구원의 변증법. 사진은 독일화가 티슈바인이 그린 괴테 초상화

문학과철학학교 2014년 가을학기 강의는 9월, 10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8강으로 열립니다. 강의 내용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의 인문학>

제1강[9월2일] 사랑 이야기를 가볍게 시작하면서
차이들로 이루어진 사랑의 4중주,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랑의 악보들, 사랑의 전투에서 찾는 사소한 차이의 정치적 함의
(쿤데라 :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제2강[9월16일] 플라톤적 에로스의 이모저모
사랑으로 진리 찾기, 그리스 동성애와 철학적 에로스
사랑의 광기가 이끄는 영혼의 고향으로
(플라톤 : <향연> <파이드로스>)

제3강[9월23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질투하는 사랑, 거짓말하는 사랑, 떠나가는 사랑
사랑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호들과 시간을 되찾는 문학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사라진 알베르틴>)

제4강[9월30일] 사랑하는 ‘둘’의 무대
사랑은 왜 하나가 아니라 ‘둘’을 지향하는가, 사랑이라는 진리 사건
(알랭 바디우 : <사랑 예찬>)
사랑의 관념론 넘어서기, 사랑의 이끌림, ‘존재하는’ 사랑과 ‘행위하는’ 사랑
(오르테가 이 가세트 : <사랑에 관한 탐구 Estudios sobre el amor>)

제5강[10월7일] 죽음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랑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사랑은 너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
(셰익스피어 :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의 제단에 그녀를 바치며 : 치명적인 사랑, 실존적인 사랑의 막다른 공간
(E. 사바토 : <터널>)

제6강[10월14일] 사랑과 구원
파우스트적 인간과 순결한 영혼의 만남,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이끄는 파멸과 구원의 변증법
(괴테 : <파우스트> 1부)
고독한 모나드를 넘어서는 사랑의 모험, 자기 너머에 있는 타자에게 가는 길
(최인훈 : <가면고>)

제7강[10월21일] 사랑의 복잡성과 ‘사랑하는 동물’인 인간
사랑의 복잡성, 이성과 광기를 통일시키는 사랑의 지혜
(E. 모랭 : <사랑, 시, 지혜 Amour, Poésie, Sagesse>)
인간은 사랑하는 동물인가? 인간의 사랑과 동물의 사랑
(M. 세르 : <인간은 사랑할 때 동물이 되는가?>)

제8강[10월28일] 사랑을 위한 글쓰기, 글쓰기가 이끄는 사랑
사랑을 위한 글쓰기, 글쓰기가 창조하는 사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칼비노 : <존재하지 않는 기사>)
하나의 사랑을 둘러싼 세 가지 사랑이야기
정체불명의 존재를 이해-창조하는 상이한 관점들, 사랑-글쓰기는 어떻게 정체성을 구성하는가?
(카렐 차페크 : <유성>)
사랑이 금지된 시대의 사랑 : 사랑하는 주체들이 만드는 자유의 공간, 욕망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글쓰기
(존 파울즈 : <프랑스 중위의 여자>)

강의는 인문학습원 강북강의실(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아래 약도 참조)에서 열리며 참가비는 22만원입니다. 자세한 문의와 참가신청은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문학과철학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바로가기

양운덕 교장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헤겔 연구(<해겔 철학에 나타난 개체와 공동체의 변증법>)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구 근,현대 사회철학에서 전개된 개인과 공동체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면서, 질서와 무질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복잡성의 패러다임(모랭), 헤르메스적 인식론(세르), 자율성과 창조의 원천인 ‘상상적인 것’(카스토리아디스) 등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구실 ‘필로소피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철학과 문학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이 있게 소화하기 위한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다. 웹진 <민연>에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의 문학, 사랑의 철학>, 다양한 문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문학의 1001가지 질문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학 새내기들의 철학 입문서인 ‘피노키오 철학 시리즈’(<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휴머니스트)외 3권), 보르헤스 해설서인 <보르헤스의 지팡이>(민음사), 철학자들의 문학 읽기를 소개하는 <문학과 철학의 향연>(문학과 지성사) 등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문학과철학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문학과 철학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비추는 두 거울이다. 문학과 철학이 없는 삶과 세계가 공허할 뿐이라면, 삶과 세계를 제대로 담고 질문하고 형상화하지 못하는 문학과 철학은 맹목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철학은 배타적으로 맞서지 않는다. 서로가 삶과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고 풍성하게 하는 (타원의 두 초점처럼) 두 개의 중심을 마련하고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합성을 추구할 수 있다.

문학과 철학의 합성은 서로가 자신의 개별성만을 고수하여 기계적으로 병존하거나 화학적으로 뒤섞여서 서로의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 없다. 양자가 서로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포괄성을 마련하는 유기적 결합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없는 문학은 전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없이 개별적인 경험과 특수성의 혼란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차이들의 바다에서 길을 잃기 쉽고, 문학이 없는 철학은 고정된 본질로 모든 것을 단조로운 반복의 틀에 집어넣을 것이다. 이런 철학에서 나와 너, 기쁨과 슬픔, 이성과 감성, 삶과 세계의 다양한 차이들은 그저 동일한 것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는 앞선 질문과 답에 대해서 다르게 질문하고 새롭게 묻는 과정이다. 질문은 사고의 지향을 세우고 사고할 만한 것을 찾고 사고의 윤곽을 마련한다. 좋거나 나쁜 답들은 질문이 구성하는 공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우리는 세계를 일정한 관점에 따라서 해석한다. 관점에 세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어떤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어떤 것이 구체적이고 흥미롭고 풍성한 관점들을 선물할까? 기쁨과 능력을 주는 관점이 있고 슬픔과 무기력을 조장하는 관점이 있다. 삶을 긍정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삶을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도 있다. 값싼 희망과 행복으로 치장하거나 손쉬운 치유를 권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허무를 감당하는 건강한 것도 있다. 어떤 관점이 기쁨을 자아내고 삶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잘 사는 권리와 능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줄까?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면, 먹거리 자체를 누리고 즐길 수 있다. 성공하거나 유식해지기 위해서 철학을 이용하거나 철학 진리를 위해서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능력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스스로 사고의 수레를 이끈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하듯이) 삶과 고통을 긍정하는 어린이처럼 철학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영원히 놀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모든 문제의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삶과 세계의 문제들 앞에서 불확실성과 모순, 역설과 우연들을 마주해서 혼란스러운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질서의 부작용과 위험을 살피고 새로운 사고를 모색한다면 좋은 친구이자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문학은 어떤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가?
문학은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가? 문학은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문학은 진리와 도덕이 제시한 정해진 길에 만족하는가?
문학은 새로운 길, 길 없는 길, 갈 수 없는 길을 가고자 한다. 문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언어로 포착하고자 한다. 문학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고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불)가능성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문학은 현명하고 절대적인 답을 앞세워 군림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가? 문학은 질문 앞에 나서고, 거듭 새롭게 질문한다. 문학은 어떤 구체성을 구하는가? 문학은 가장 구체적인 존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문학적 ‘하나’는 하나에 그치지 않고 ‘모두’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단 하나의 사건, 존재의 사소한 고통, 가벼운 슬픔, 작은 질문을 크고 중요하게 여긴다.

문학은 자기를 위한 것인가, 타자 앞에 서는 것인가? 문학은 타자에게 열리고 타자를 중심에 두려고 하고 자기를 내던지는 시도를 우회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 타자 없는 자기보다는 자기 없는 타자를 앞세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자기와 타자가 공존하는 체제”이고, “다수자가 소수자들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강한 적뿐만 아니라 약한 적과 공존”하는 역설적인 것이라면, “적과 공존하기convivir el enmigo! 반대파를 포용하는 정치gobernar con la opposicción!”는 문학적이다.

▲강의실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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