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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보며 가만있을 수 없었다는 그가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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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보며 가만있을 수 없었다는 그가 미래다

[기고] 우리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쌍용차 해고자 김득중을 선택하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득중이 오는 30일에 치러지는 평택을 재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것은 솔직히 어떤 절박함 비슷한 것이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회사 측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 파업을 했지만 공장 지붕에까지 쫓아온 경찰들에 의해 이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했다. 나는 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그저 침통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내건 외침은 '함께 살자'였다. 이 구호만큼 급박하고 예지적인 단말마를 나는 지금껏 들은 적이 없다. 김득중은 권력 때문이 아니라 살기 위해 나섰다고 출마의 변을 밝히는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무릇 모든 선지자적인 외침이 단순한 미래에 대한 점술이 아니라 당대에 대한 피 끓는 호소임을 감안한다면, 이미 옥쇄 파업 당시에도 함께 산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관련 기사 : <어느 해고 노동자의 국회의원 출마…"함께 살자"> <'세월호 사회'에서 비명횡사하지 않는 법>)
아무튼 그 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건을 복기하는 일은 차라리 자학에 가까우리만치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연속되는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향한 몸부림들이 그치지 않았음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지난 4월 16일 차가운 바다에 수많은 목숨들을 거의 생으로 밀어 넣은 다음에야 우리가 사는 모습을 처절하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잔인한가?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노동자 후보 한 명이 국회에 들어간다고 세상은 달라질 것인가라고 묻는 일은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나는 그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되물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나마 희생양 삼았으니 사회가 이렇게나마 유지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의 정리해고와 그 후의 잇단 죽음으로 사회가 아픈 제의를 치렀으니 우리가 이렇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리어 그들을 사회에서 배제함으로써 지금은 나와 당신이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서서히 버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삶이 파괴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게 내 진단이다. 아니면 아주 천천히 죽임을 당하고 있든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 인지 불가능성을 먹이로 삼아 증식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또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유감이든 다행이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한 부분이 병들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전체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아픔들에 대해서 예민할 필요가 있다.
옥쇄 파업을 기점으로 죽은 목숨이 도대체 얼마였던가. 만일 그 당시 우리 사회가 함께 살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계발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만일 그들의 절규와 울음을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면 지금 우리 아이들의 웃음이 저렇게 싸늘하게 식어버릴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진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서 오늘날 다시 크나큰 참극으로 과거는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건 정치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동안 정치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고통을 해결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심화하고 동시에 확대했다. 왜 정치가 사태를 더 심각하게 해놨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딱 한마디로 하자면, 정치를 이제는 전문 '꾼'만 하기 때문이다. 돈이 많거나 사회에서 대접받는 근사한 자격증 소지자가 정치를 해서거나.

▲ 7.30 재보궐 선거 평택을에 출사표를 던진 김득중 쌍용자동차 해고자(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김득중 선거대책본부

그래서 노동자 후보 김득중은 단순히 노동자의 입장만 대변할 수 없는 상징과 시대적 무게를 가질 수밖에 없다. 김득중을 선택하는 것은 미래를 선택하는 행위 중 하나이며 동시에 현재의 슬픔과 무기력을 넘어서기 위한 결단이기도 하다. 지금껏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썩은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이미지였지 미래를 향한 설렘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 정당의 세 치 혀에 농락당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정의와 도덕이라는 언어 자체가 오염된 것에서 나아가 아무에게나 그런 수사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 후보 김득중이 감히(?)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것은, 도덕과 정의를 재정립하는 의미를 가지며, 정치라는 것이 거대 정당이나 청와대 같은 구중궁궐에서만 가능하다는 얼토당토않은, 그러나 우리를 너무 오래 세뇌해 온 거짓을 고발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발은 굳어버린 체제와 형식을 해체하는 일을 수행한다. 우리가 '함께 살자'고 외칠 때 귀를 닫아버리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 아예 들리지 않게 했던 이런저런 장치와 제도와 정책들을 철거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은 새누리당뿐만이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또한 야당이라는 위치에 있을 뿐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운전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배 위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들 것 같다. 그들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삶에 대한 예의와 배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꿈도 그리고 상상력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야당이 목표로 하는 것은 오로지 재집권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야당의 재집권에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다.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일단, 김득중의 출마 선언처럼 삶을 삶답게 살아보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녹색당, 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이 그를 단일 후보로 인정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제 정파의 연합에서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미래적 공통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단지 넘어설 게 아니라 차이에서 다른 가치가 생성될 수 있다는 창조적인 발상을 가질 때 그 거멀못 역할을 김득중이, 아니 배제되고 착취 받는 우리들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득중이 그러한 세상에 걸맞은 인물이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도대체 이 썩어빠진 세상에 걸맞은 인물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김득중을 선택하고, 김득중을 응원하고, 김득중에게 바람을 품어보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판돈을 거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에 기표를 하는 행위이다. 라틴어에 이러한 금언이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 아니라 사태다." 그러니까 김득중의 출마 '사태'를 기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편이 더 낫다." (니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득중이 살기 위해 출마했다는 사태 자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이며 이 사태가 더 깊고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눈빛과 손길을 보태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어서 빨리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정치를 되찾아 와야 하지 않겠는가. 죽임의 땅이 된 이 사회를 어서 구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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