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잘 데가 없어. 얼른 요놈 팔아서 내가 돈 하나라도 번 게 쓰잘 데가 있지. 요런 것 해 가지고는 쓰잘 데가 없어. 5.18 행사한다고 아주 한나절 복잡하게 항게 뭐가 쓰잘 데가 있어. 쓰잘 데가 없지."
다큐멘터리 <오월愛> 출연자인 이영애 씨에게 5.18민주화운동은 "쓰잘 데 없는" 것이다. 광주광역시 양동시장 노점상인 이 씨는 1980년 5월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먹였다. 이 씨는 또 이름 없이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은 "밥도 옷도 안 나오는 쓰잘 데 없는 일"이라고 소리쳤다. 사람이 죽어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잘 먹고 잘 사는 이가 넘쳐나는데, 참외팔이 만도 못한 일을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타박이다.
김태일 감독은 그러나, 그 "쓰잘 데 없는" 일을 20년째 하고 있다. <오월愛>를 비롯한 <4월 9일> <안녕, 사요나라> 등의 다큐를 통해 인혁당 사건과 일본 야스쿠니 신사 전범 합사 취하소송 문제를 이름 없는 이들의 시선으로 조명했다. 과거에는 내전으로, 현재는 자본의 침공으로 고통 받고 있는 캄보디아 소수 민족의 이야기를 다룬 <웰랑 뜨레이>는 2012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특별 언급'되기도 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 김다현, 박민미, 신태현, 오지은, 정신영숙, 황용운 씨는 지난 4일 김 감독을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조합원, 다큐에 빠지다'는 독자(소비자 조합원)가 직접 진행하는 인터뷰로, '신나는다큐모임'이 선정한 6명의 다큐멘터리 감독을 매월 한 차례씩 만날 예정이다.
"벌레의 시선으로, 세상사를 기록하다"
김 감독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그는 막노동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다큐 감독으로 제작비를 벌기 위해, 가장으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틈나는대로 막노동을 하고 있다.
"다큐나 막노동이나 몸에 땀이 나는 일이다. 다큐가 막노동보다 힘들다. 다큐는 몸만 힘든 게 아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
막노동보다 힘들다는 다큐 제작은 "영상으로 세상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을 다 기록할 수는 없는 법. 김 감독은 여러 방법 중 "독수리의 시선이 아닌 벌레의 시선"으로 세상사를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로 벌레의 시선, 피해자의 시선, 보통 사람의 시선이라는 생각에서다.
"1980년 '5월의 봄'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몸이 안 좋아 시골에서 두 달 정도 요양했다. 집이 경상도로 골수, 저쪽(보수)였다. 뉴스에는 시위대가 던진 돌에 군인이 피 흘리는 장면만 나왔다. 동네 어른들이 뉴스를 보며 했던 얘기들, 그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군인에게 돌을 던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상황만 있다가 대학에 들어와 그 사실을 알게 됐다."
30년 뒤, 김 감독은 군인에게 돌을 던진 시민군의 이야기를 <오월愛>에 담았다. 특히 사건이 아닌, 현재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카메라로 찍었다. '폭도'로 불린 시민군 중 누군가는 꽃가게 주인으로, 중국집 사장으로, 택시 운전사로, 시장 노점상으로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전남도청 철거 문제가 불거졌을 때) 광주 시민들이 도청을 대하는 태도는 5월 관련 단체보다 훨씬 성숙했다."
사건 당사자의 이야기가 바로 역사(歷史)다. 그러나 역사는 권력을 잡은 이가 누구냐에 따라 사실(事實)과 정반대로 기록되곤 한다.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 공안 사건인 인혁당 사건은 무고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즉결 처형했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서울중앙지법은 당시 처형된 8명에 대해 2007년 무죄를 선고했다.
김 감독은 "1998년 김대중 정부라면, 이제는 과거 자신의 이념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4월 9일> 작업에 나섰다. 그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사실 민주화 투사였다가 아니라, 이들의 내밀한 활동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대로 공포를 경험한 이들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목표치를 크게 잡고 기대했지만, 작업 중 안 되는 게 많았다. 당사자의 이야기 대신 책 등을 통해 알려진 역사만 작품에 들어가면서 구성력이 부족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이들의 이념(이야기)를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큐는 주관적, 다양한 계급적 관점이 많았으면…"
"<오월愛>를 시작으로 '민중의 세계사'를 담게 된 모티브이자, 가장 큰 힘이 된 책이다. 지금도 심심하면 늘 읽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절대 역사에 담길 수 없다. 다큐를 만들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역사에 담길 '민중의 세계사'는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역사만 배우고 있다.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이 시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는 다른 시선(벌레의 시선)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 제작사 '상구네'는 김 감독에게 또 다른 원동력이 됐다. '상구네'는 아내 주로미 씨와 아들 상구, 딸 송이가 스텝으로 참여하는 가족 시스템이다. <웰랑 뜨레이>는 '상구네'가 본격 제작한 작품으로, 이들은 3개월간 캄보디아에 머물며 작품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뜨레이 가족을 만나 함께 생활하기까지 상구와 송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뜨레이 가족의 유일한 경제적 수단은 꿀을 따서 파는 것이다. 이 삶이 유지돼 뜨레이 가족이 행복해야 '우리에게도 똑같은 행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독재화(자본화)되고 있다. 한쪽엔 이미 휴대폰이 들어왔다. 파괴 속도가 눈에 보인다. '소유'라는 개념이 없던 곳인데, 외부인이 들어오면서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소유'는 곧, 외부인이 강탈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 감독은 "우리가 5,60년대 뜨레이 가족과 같은 모습이었다"며 "캄보디아 소수 민족들이 뒤늦게 전통과 변화라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선택을 되돌릴 수 없는 이상 누군가 같은 위치에서 손잡아 주는 것. 작은 위로지만 그것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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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한 차기작을 진행 중이다. 벌레의 시선으로 '민중의 세계사'를 담은 세 번째 작품이다. 역시 '상구네'가 제작한다. 지금 하고 있는 막노동은 이를 위한 자본과의 타협인 셈이다.
"'상구네' 제작팀에 만족한다. 문제는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非)자본주의의 방식을 선택하면서 내 삶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를 얻으려면 한 가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
사건 당사자의 이야기를 벌레의 시선으로 영상화하는 것. 김 감독이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의 작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한 가지다. 그는 "다큐는 주관적"이라며 "만든 사람의 시선으로 사건을 얼마나 잘 설득시켜 내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계급적 관점을 다양하게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역사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것이 아닌,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기 때문에….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전'에 소개된 다큐멘터리 감독을 매월 인터뷰합니다. 다큐 감독전은 '신나는다큐모임'과 독립 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기획했으며, 해당 감독의 작품은 오는 12월까지 매월 둘째·넷째 주 월요일 오후 6시와 8시에 상영됩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http://indiespace.kr/1884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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