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겠다. tvN <고교처세왕> 제작발표회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서인국에게 <응답하라 1997>을 뛰어넘는 대표작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케이블 드라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응칠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가 바로 서인국이 맡았던 윤윤제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정극보다는 유쾌한 시트콤에 가까운 코믹오피스활극 <고교처세왕>은 오랜만에 복귀한 '엉뚱한 4차원 배우' 이하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방송 초반 이민석의 캐릭터는 최근 '연하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마녀의 연애>의 윤동하(박서준), <밀회>의 이선재(유아인), <앙큼한 돌싱녀>의 국승현(서강준)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러브라인으로 얽혀 있는 '누나’보다 오히려 더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인 연하남들이었다.
반면, 극 중 아홉 살 많은 계약직 직원 정수영(이하나)을 놀려먹는 재미에 회사를 다니는 이민석은 말 그대로 철부지 중의 철부지다. 눈치 없이 정수영의 짝사랑 사업에 끼어들어 오히려 정수영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기본. 회사의 사활이 걸린 입찰경쟁 PT를 맡게 된 이민석. 정수영이 야근까지 하며 이민석의 PT를 도와주지만, 이민석은 집중력 저하에 야식 타령도 모자라 정수영에게 "운동신경 없다"고 구박까지 한다. 어쩌면 밉상이 됐을 수도 있는 캐릭터를, 서인국은 굉장히 사랑스럽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마냥 어리기만 했던 이민석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면서 <고교처세왕>의 인기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민석이 회사에 와서 맡게 된 첫 미션이었던 입찰경쟁 PT 장면은 <고교처세왕> 3회의 명장면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선수인 이민석은 예정보다 늦어진 첫 예선경기를 마치자마자 회사로 향했고, 곧바로 강단에 서서 임원 어르신들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밤새 준비한 PT자료 한 번 보지 않은 채 말이다.
"뻔하지 않고 펀(FUN)한 신개념 복합쇼핑몰을 준비했습니다. 여자한테 쇼핑은 천국일 수도 있죠. 돌아다니면서 남자 친구와 함께 맛있는 것도 먹지만, 남자한테는 뭐죠? 지옥이에요, 헬(Hell)! 남자 친구가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하고 갔습니다. 왼쪽으로 가래요. 왼쪽 갔습니다. 직진으로 가래서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나왔습니다. 아오, 빡쳐! 화장실을 가는데 5분이 걸렸습니다. 난 안 쌌어. 손만 씻고 왔는데 여자 친구는 뭐라고 느낍니까? 똥 쌌네. 억울하지 않게, 편안하게 내 집처럼. 저희가 준비한 쇼핑몰은요, 남자 여자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핵심 포인트입니다."
고등학생이 PT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숨 한 번 쉬지 않고 강단을 종횡무진하며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했던 입찰경쟁 PT가 사실은 대본이 아니라 배우 서인국의 애드리브였다는 점이다.
PT 성공 후 직원들과 회식하면서 점점 회사의 일원으로 흡수되고 있는 이민석은 억울하게 사내 스파이로 의심받는 직원을 보호해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수영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여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음부터 의젓했던 연하남이 아니라, 시작은 철부지였으나 그 끝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쾌한 본부장이라서 더욱 매력적인 이민석. 그래서 서인국에게 <고교처세왕>은 <응답하라 1997>과는 또 다른 의미의 대표작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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