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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문창극 주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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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문창극 주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창비주간논평] 기독교 신보수주의의 등장과 엘리트주의 신앙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사퇴했다. 그가 남긴 한편의 긴 훈계설교는 이 모든 야단법석이 '몽매한' 대중과 대중추수세력의 혹세무민의 결과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 설교의 마지막 문단에서 그는 말한다. "저를 불러주신 분도 그분이시고 저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그는 메시아로 현신(現身)한 대통령의 '사도'(apostles)였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몽매한 저들을 나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사도'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사퇴를 전후로 하여 이 사도의 지지자들이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을 포함한 개신교 지도자들 다수도 이 말들의 대열에 나섰다. 문씨가 '신실한' 개신교 신자인데다 문제의 발언이 교회에서 행한 강연이었고 그 내용도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개신교 신자 특유의 표현이어서 개신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그를 두둔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한 일이다.

사과할 수 없는 자들의 신앙, 메시아주의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전체 논지에서 일부만 떼어 문제로 삼아 매도한 것이라고 해도 그 표현법은 너무 과했다. 비유로 든 사건들이 자기에게 그다지 아프게 다가오지 않을 때나 할 수 있는 말로 비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삼환 목사가 '세월호의 침몰은 하나님이 국민을 회개시키려고 기회를 준 것'이라고 발언한 것처럼 말이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는 말은 진의가 무엇이든 삼가야 했다. 하물며 민족의 아픔으로 각인된 사건을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의당 사과를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사퇴의 순간에도 문 씨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를 두둔한 개신교 지도자들도 그것을 사과할 일로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신정론(神正論)'을 이해하지 못한 국민의 몰이해 탓을 했다. 신정론으로 해석된 무수한 텍스트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워도, 적어도 성서의 신정론은 국가가 패망하고 모든 백성이 제국의 노예가 된 상황에서,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이 적의 신에게 패배했다는 자괴감과 절망에 온 백성이 빠져 있을 때, 실은 그것이 우리를 회개케 하려는 신의 계획이라는 식의 해석을 가리키는 신학적 개념이다. 거기에는 위로가 있고 반전의 역사 해석이 있다. 하지만 희생자에 대한 폄훼는 없다. 도대체 누가 신정론을 몰이해했다는 것인가.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익숙한 상황에 직면했다. 저들은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국민을 무지한 자로 평하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와 현 정부의 지도자들은 비슷하다.

여기서 1997년 '박정희 메시아론'을 들고 나왔던 삼인방을 떠올린다. 김정렴, 조갑제, 이인화가 그들이다. 이들은 공히 '유약한 정권'이 위기를 낳았다는 역사인식에서 강한 통치자 박정희를 그 시대로 소환한다. 그들이 보는 당대는 '비상사태'다. '무지몽매한' 국민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더구나 비상사태이니 특별한 영도자가 필요하다. 그가 바로 박정희라는 것이다. 하여 이들에게 박정희는 메시아, 곧 초법적 존재다.

이들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국민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이다. 해서 초법적 지도자가 요청된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현 정부의 행보에서 자주 엿보인다. 국민을 무지한 자로 폄훼하는 일도, 법치를 강조하면서도 법 위에서 법을 통제하고자 하는 통치자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현 정부 들어서 부쩍 늘어난 풍경이다. 그런 초법적 지도자가 어떻게 사과할 수 있단 말인가.

새로운 메시아주의자의 출현, 엘리트 성령파들

그것은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대형교회에선 오래된 관습과도 같다. 한국에서 대형교회가 되는 첫째 조건은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존재다. 그가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 대형화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런 존재가 대형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대형교회에서 이것은 예외 없다. 적어도 초고속 성장기 리더의 경우는 그렇다.

최근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많은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추문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권력을 세습하려 하거나 이미 단행했고, 비리와 배임의 혐의를 받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는 성폭행 혐의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막말, 부적절한 행동, 인종적·종교적 배타주의와 이념적 극단주의 등의 행보로 문제가 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이미지는 극도로 실추했다.

그런 한편 최근 일부 교회들에서 새로운 기조의 성장주의가 두드러진다. 그중 문창극 씨가 장로로 있는 온누리교회의 성장주의는 교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른바 '신사도운동'이라는 미국발 최신 성령운동적 성장주의를 한국화(韓國化)한 진원지다.

과거의 성령운동이 주로 도시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하위계층 사이에서 불처럼 번져나간 것이었다면, 이 최신판 성령운동은 도시적 현상이면서 중상위계층적 특성을 지닌다. 게다가,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현상보다 이념성향이 좀 더 분명한 경향이 있다. 이른바 신보수주의와 친화적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 운동이, 성서시대처럼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말하는 '사도'의 활약이 오늘도 계속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의 성령운동이 주로 정규교육 시스템에서 소외된 계층 출신 지도자들 중심이었다면, 이 새로운 성령운동은 최상위 엘리트층의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어쨌든 개신교의 이러한 두 성령운동적 성장주의는 특권적 지도자의 초법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대중의 몽매함을 일깨우는 자다. 그런 신앙에서 사과는 낯설다. '이런 교회'의 장로이자 '이런 정부'의 총리 후보로서 문 씨는 참으로 적합하다. 시민에게는 부적할한 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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