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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좁히는 북·일, 박근혜 정부 뭐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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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거리 좁히는 북·일, 박근혜 정부 뭐 했나?"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일 합의 이행될 가능성 높아

지난 5월 말 일본과 북한이 일본인 납치자 재조사에 전격 합의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미묘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지난 5일 북한과 러시아는 '정부 간 통상경제·과학기술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를 열고 △모든 무역의 루블화 결제 △북한 광물자원 개발에 러시아 참여 등을 골자로 한 양국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북한이 주변국들과 잇따른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북한의 광폭 행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일본과 납치자 재조사 문제를 합의한 것이 그대로 이행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2008년에도 양국은 납치자 재조사 문제를 합의했지만, 합의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은 2008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일갈했다. 정 전 장관은 "일본 역대 총리 중에 아베만큼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인사가 없다. 집단적 자위권 추진에 기반이 되는 평화헌법 9조 개정을 위한 것"이라며 "아베 총리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강화돼야만 헌법 개정을 밀고 나갈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납치 문제를 해결해 국내적 지지를 높이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정 전 장관은 이번 북·일 합의가 6자회담 재개의 모멘텀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일본의 정치인이나 언론들은 자국민 납치 문제만 생각한다"며 "자신들이 북핵 문제 해결사 노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건 미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의 행보와는 달리 남한은 미사일 방어체제(MD) 도입,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을 추진하면서 중국과는 점점 불편해지고 있고,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정부가 판세를 못 읽는 것인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북 대결 상황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데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대처하면 앞으로 우리의 외교 입지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쪽으로는 TPP와 한미일 군사정보공유를 추진하더라도 남북관계만큼은 열어놓고 풀어나가야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편집자>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우선 한겨레 통일문화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정세토크'도 수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하니 저희로서도 기쁩니다. 그런데 남북관계에서는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지난 5월 말 일본과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를 이룬 데 이어 이달 초에는 러시아와 북한이 경제협력 강화를 약속했습니다. 북핵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마당에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해가는 모양새인데요. 반면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례로 짚어보기로 하지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과 납치 피해자 재조사에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일 간 인적 왕래 규제 △송금 및 휴대금액을 제한하는 규제 △인도주의적 목적의 북한 국적 선박의 일본 입항 금지 조치 등을 해제할 뜻을 내비쳤고요. 이 합의를 계기로 양국 관계 개선이 급물살을 타면서 대북 압박을 위한 한미일 공조에 균열이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일본이 북한과 이런 합의를 이끌어낸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정세현 : 아베 정부가 이 같은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일본 국내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베 총리가 이번에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한다면 전후 일본 역사에서 그야말로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북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납치 문제입니다. 여기서 성과를 내면 아베 총리는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장기 집권도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아베는 북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납치 문제에 대한 과거 아베 총리의 접근 방식을 보더라도 그가 이 문제에 정치적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지난 2002년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당시 관방 부(副)장관 자격으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북한에 납치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결국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납치 및 그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2004년 일본은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유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골이 메구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유골임이 밝혀졌는데요. 이 유골의 진위 여부를 공개한 사람이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입니다.

만약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이 정말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 했거나 메구미의 유골을 확보하고 싶었다면 이런 방식의 일 처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례로 지난 1995년 미국은 6.25 때 실종됐던 북한 내 미군 병사 유골을 발굴해가기로 북한과 합의했습니다. 북한 측이 발굴해서 넘겨주는 방식에 합의했는데, 유골을 확인해보니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메구미 유골과 유사한 경우죠.

그런데 미국은 이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바로 북한과 비공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협상을 통해 미국은 자신들이 직접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대신, 북한 인력을 고용하고 발굴 장비도 투입했다가 끝나면 북한에 두고 가겠다는 식으로 협상을 했습니다. 북한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확실히 주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유골 발굴을 원활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유골 발굴보다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면, 가짜를 넘겨주는 북한의 일 처리 방식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고 반북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번 북·일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대북 포위망의 이완을 의미하는 일본의 대북 접근을 미국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인데요.

정세현 :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대립 관계 속에서 보면 북·일 관계가 이렇게 진전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양국 관계 개선이 마음에 들지 않겠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까지 만들어서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데 납치 문제 때문에 대북 압박에 구멍이 뚫려버리는 셈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북핵을 핑계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아베 정권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탄탄해지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국이 납치 문제 해결에 합의해서 아베의 인기가 올라가면 일본 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문제도 아베의 뜻대로 관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 있어서 미국의 수고를 덜 수 있죠. 미국으로서는 조금 불편해도 더 큰 전략적 이익을 위해 눈 감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 외교술에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의 힘을 빌려 다른 오랑캐를 견제)가 있었는데, 요즘 미국이 그 방식을 쓰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한국 정부는 이번과 비슷한 북·일 양국 간 합의가 지난 2008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자민당) 총리 집권 당시에도 있었지만 무산됐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번에도 양국이 합의된 사항을 이행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정세현 : 그동안 북․일 협상의 선례를 놓고 보면 합의 이행이 삐걱거릴 수 있습니다. 없었던 일로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하지만 지금 일본의 국내정치 상황이 2008년과 다릅니다.

일본의 역대 총리 중에 아베만큼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인사는 없습니다.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추진할 기반이 되는 평화헌법 9조 개정문제를 미국으로부터 사실상 허락받았습니다. 남은 것은 국내 정치적 문제인데, 아베 총리의 입지가 강화돼야만 헌법 개정을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납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대가로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 지난 5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북일 교섭 결과를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북한도 이번 합의 이행에 협조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베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켜주면 유엔의 대북제재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면서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이득도 취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북한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비롯해 강제 징용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일본이 사과를 하고 그다음에 납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정책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일거양득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사 문제는 일단 선반에 올려놓은 채, 납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물론 과거사 문제는 더 큰 것과 바꾸기 위한 카드로 계속 남겨 놓고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외교부가 양국 합의의 의미를 축소하고 제대로 합의 이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면, 이는 책임 회피용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북·일 관계가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무엇을 했느냐, 한일 관계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상황이 됐느냐는 비난으로부터 외교부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미리 그런 얘기를 했다고 봅니다. 2008년과는 다른 일본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생각했을 때 아베가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번 북·일 합의를 교착 상태에 빠진 6자회담 재개의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세현 : 이번 합의는 전적으로 납치 문제로 시작해서 납치 문제로 끝날 것입니다. 일본 때문에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만약 이번 합의로 6자회담 재개의 모멘텀이 생긴다면 대한민국 외교부는 '외교'라는 직함 떼야 합니다.

일본의 정치인이나 언론들은 자국민 납치 문제만 생각합니다. 이번 합의를 통해 6자회담 재개 모멘텀을 조성하고, 자신들이 북핵 문제 해결사 노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건 미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일본 사람들의 마인드가 그렇습니다. 미국보다 앞서가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미국이 어디로 움직이려고 하는지 알아차리면 먼저 움직이긴 하는데, 미국을 이끌려는 욕심은 감히 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의 대미 추종주의는 우리보다 더 강하다고도 볼 수 있죠.

러시아와도 손잡으며 외연 넓히는 북한···미국만 쳐다보고 있는 남한

프레시안 : 북한이 지난 5일 러시아와 '정부 간 통상경제·과학기술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를 통해 모든 무역을 달러가 아닌 루블화로 결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또 북한 광물자원 개발에 러시아가 참여한다고도 합니다. 북·러 간 경제협력 활성화가 가시화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일본과 납치자 재조사를 합의하고 러시아와 경협을 추구하는 것은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요.

정세현 : 맞습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이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이라고 봐야지요. 큰 틀에서 보면 냉전시대에 썼던 용어인 북방 3각 동맹(북·중·러)이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북방 국가들이 먼저 움직였다기보다는 한미일이라는 남방 3각 동맹이 되살아나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 라는 대립 구도가 과거에는 군사 동맹의 성격만 띠었지만 지금은 경제동맹 성격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일례로 러시아가 북한의 부채를 90% 탕감해준 것을 들 수 있는데요. 러시아의 경제 규모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 부채를(109억 달러 상당) 탕감해주고 북한을 자신의 편으로 확실히 끌어들이는 것이 남는 장사입니다.

최근에는 북한을 놓고 중국과 러시아가 경쟁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특히 나진선봉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러시아가 욕심내던 곳인데,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이곳을 빌려줬습니다. 나진선봉을 통한 중국의 동해 출해권이 보장되면 군사적으로 러시아가 굉장히 불리해집니다. 나진선봉에 진출한 중국이 자국 상선 보호 때문에 군함을 보내면, 상대적으로 동해나 서태평양에서 지금까지 중국 해군보다 우위를 보였던 러시아 해군의 위상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러면 러시아의 대미 협상력도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보면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끼리도 경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북한은 이런 점을 알고 균형 외교, 이른바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 광물 자원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광물 자원은 중국이 싼값에 독점적으로 개발해서 가져갔는데 이제 러시아도 북한의 광물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두고 경쟁 관계를 조성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인데, 균형외교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이렇게 활발하게 주변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는데, 남한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남북관계는 꽉 막아놓은 데다가 미국 미사일 방어체제(MD) 편입,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을 추진하면서 중국과 점점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정세현 : 현재 동아시아에는 미·중 간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러, 북·중, 북·러 경제 협력 가속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5월 20일에는 서해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해상협력-2014'라는 이름으로 해상 연합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훈련 개막식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함께 참석하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습니다. 동해도 아닌 서해에 왜 러시아 군함들이 들어옵니까? 중국이 미국 견제 차원에서 불러들인 거지요. 서해는 이미 미·중 힘겨루기, 한미일 대 북중러, 남방 3각동맹과 북방 3각동맹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 정부는 판세를 못 읽는 것인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북관계는 막아놓고 있고 6자회담도 갖가지 전제조건을 달아서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오히려 남북 대결상황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데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관계나 북핵문제를 소위 대북 강경노선에 입각해서 대처해 나가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국내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보수를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일 겁니다. 실제로 남북관계가 경직된 상태에서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가 올라갔던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국내 정치만 따지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돌려보니 북·중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북·러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북·일은 납치 문제 해결과 제재 완화를 교환하기로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정부나 대통령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혼자만 '유유자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외교 입지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1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엑스포센터에서 제4차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의 마지막날 행사가 시작되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아시아 귀환 정책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 경제력을 이용하는, 이른바 '이일제중'(以日制中)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의 아니게 미국과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일 군사정보공유 역시 궁극적으로는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우리가 그걸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돼버리지 않았습니까.

TPP의 경우 우리와 미국이 완전한 경제동맹 관계에 접어드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실제로 협정을 추진하게 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반(反)중국 전선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TPP에서 중국은 배제돼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경제는 중국과 경제 관계를 원만히 가져가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지탱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군사적으로는 미·일 동맹의 하위 체계로 들어가고 경제적으로는 TPP를 추진하면서 반중 노선을 걷겠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우리 외교를 장차 참으로 어렵게 만들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쪽으로는 TPP와 한미일 군사정보공유를 추진하더라도 남북관계만큼은 열어놓고 풀어나가야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과 남북 교류협력, 인적 왕래 수준 등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도 훨씬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 액수가 118억 원이었습니다. 이건 이명박 정부 5년 중 가장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로 넘어와서는 2013년에 51억 원, 2014년 6월까지 21억 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고사 직전이었던 이명박 정부 시기의 남북관계보다도 못한 상황입니다.

북핵 능력 고도화, 누가 방치했나

프레시안 : 그런데 우리는 북한과 관계개선이나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북핵 불용'만 외치고 있습니다. '북핵 불용'같은 선언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정세현 : 최근 발간된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6~8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의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북한 핵 능력이 향상된 것입니다. 이미 핵실험을 세 번이나 했고요.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이명박 정부에 있습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던 오바마 1기 미 행정부, 특히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행보를 막아섰던 것이 이명박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2009년 2월 13일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 연설에서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기 위해서라면 북미수교, 평화협정 체결도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반대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은 '비핵개방 3000' 이라면서 비핵화 관련 북한의 성의 있는 조치가 있어야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선 비핵화' 장벽에 막혀 오바마 정부는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고 결국 6자회담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2009년 5월 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에도 미국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해 7월 23일 태국 푸켓에서 열린 ARF(아세안 지역 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회의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2월에 한 그 이야기를 또 했습니다. 또 11월에도 힐러리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자리에서 2월과 7월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혔습니다. 12월에는 보즈워스 대사를 평양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이명박 정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미국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미국이 자신들의 뜻을 세 번에 걸쳐 밝혔음에도 왜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을까요? 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은 미국이지만 핵문제가 발생했을 때 최대 피해 당사자는 한국 정부인데, 한국이 협조하지 않으니 미국으로서도 별로 나설 이유가 없는 겁니다. 6자회담에 한국이 안 나오면 회담을 시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6자회담 재개 정책은 없었던 것이 되고 오바마 정부도 더 이상 '힐러리 해법'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 ⓒ프레시안(최형락)
2009년 이후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6자회담은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했고 북핵 능력은 점점 커져만 갔으며 비핵화는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말은 다르게 하지만 행동은 비핵개방3000을 거의 계승하는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세웠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분명 '비핵개방3000'과 논리구조가 달랐음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계속 북핵 능력을 고도화시키도록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남북관계 및 외교관계를 자문했던 사람들은 민족사적 직무유기를 한 셈이 돼버립니다.

어차피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계승자가 아닙니다. 같은 당이긴 하지만 이명박 정부 내내 사사건건 각을 세웠고 대립하지 않았습니까. 박근혜 정부는 대북정책에 있어서 '이명박이 했던 것은 안된다'는 'ABL'(Anything but Lee) 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부분은 수정·보완할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입지가 있습니다.

북한의 핵탄두 보유 사실이 확인되면 우리 한국 국민들은 심리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질 겁니다. 미국이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지만, 핵 재처리도 하지 못하는 한국에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입니다. 정권이 흔들릴 수도 있죠. 북한 핵 능력이 아직 그렇게까지 발전했다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시간 보내고 있는데, 북한 핵 능력이 진짜 고도화 돼버리면 그때는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시작을 위해서도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민간 차원에서라도 문호를 조금씩 열어줘서 북이 더 이상 사고 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미국과 북한이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북핵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지금 이런 조치를 취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녕 박근혜 정부 내에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한국 정부도 그렇지만 미국 정부도 북핵 문제 해결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 핵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북핵문제 해결의 단초를 열 당사자는 미국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럴 생각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우크라이나사태에 이라크 내전 상황까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서야 합니까? 북핵문제 해결에 앞장설 수 있는 힘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 정부가 유일합니다.

미국이 북핵 해결의 의지가 없더라도, 우리가 최대 피해 당사자라는 생각을 갖고 움직여야 합니다. 북핵문제에 대해 미국과 공조할 생각만 하지 말고 피해 당사자가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미국에 사정해야 합니다. 남북관계부터 개선해가면서 북핵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를 미국에 줘야 합니다. 북·일 접근을 갖고도 6자회담 재개 신호탄 아니냐는 해석을 하는 판국에, 남한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면 이는 곧 핵문제 해결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미국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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