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4월혁명, 아홉 번째 마당]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와 미국의 관계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미국은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다는 주장, 그와 반대로 쿠데타를 배후 조종한 것 아니냐는 주장, 조종까지는 아니지만 알면서 눈감았다는 주장 등이 맞섰다. 주한 미군, 미국 대사관과 워싱턴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인 것도 논란을 키운 요인이다.
서중석 : 쿠데타를 막는 데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던 것이 주한 미군 사령부다. 미 8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를 겸한 곳이다. 우리 군의 작전권은 그 휘하에 있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미군이 한국의 전군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서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느냐는 건데, 이 부분에 대해선 아주 미묘한 게 많다. 매그루더 장군과 그린 대리 대사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갖고 상반된 주장이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이 부분이 제일 연구도 많이 됐고, 제일 논란도 많다. 자초지종을 살피면 아직까지도 '어느 것이 맞다', 이렇게 단정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프레시안 : 일반적으로 매그루더는 쿠데타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와 달리 매그루더는 장면 정부를 매우 부정적으로 봤고 쿠데타를 적극 진압할 의사가 없었다는 연구도 있다.
서중석 :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있다. 5월 16일 오전 10시 18분, 미 8군 공보관이 성명을 발표했다. "매그루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그 휘하의 모든 장병에게 장면 총리가 수반인, 정당하게 인정된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돼 있다. 장면 정부 지지, 쿠데타 반대를 확실히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매그루더와 그린은 쿠데타 당일 오전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군을 철수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것들과 윤보선 회고, 장도영 회고, 이한림 회고 등을 읽으면 매그루더, 그리고 약간 이상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그린 대리 대사는 쿠데타를 진압하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결국 못하게 된 것이다. 장도영은 어영부영했고, 윤보선은 오히려 '진압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정말 미국이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느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매그루더가 이한림 제1군 사령관을 찾아가 진압군 출동 문제를 논의한 건 17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이한림이 회고록에 시간까지 정확히 적어 놨다. 그런데 그때는 진압군 출동을 막은 윤보선 공한이 돌고 난 이후다. 이한림이 출동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매그루더는 공치고 돌아간 걸로 돼 있다. 매그루더가 뭣 때문에 그런 시간에 왔느냐 하는 것도 논란이 되기는 한다. 사실 매그루더하고 그린 대리 대사와 관련해서는 좀 납득이 안 가는 면이 있다.
5.16쿠데타와 미국, 엇갈리는 해석들
프레시안 :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
서중석 : CIA는 물론 미 8군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매그루더한테 계속 줬다. 특히 중요한 사람도 그런 정보를 줬는데, 그중에서도 인용에 빠지지 않는 유명한 사람이 CIA 한국 지부 책임자였던 피어 드 실바다.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자신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장군의 측근 참모 중 CIA 요원하고 친한 어떤 장교가 알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매그루더한테 이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진전됐는지를 다시 조사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매그루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면 총리에게 알려도 좋다. 단 출처를 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 총리에게 보고했는데 장 총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장 총리가 장도영을 불러 쿠데타에 대해 물어본 게 이것 때문 아닌가 싶다.
그다음에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군을 만드는 데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한국군을 창설할 때 하우스만은 대위라는 낮은 계급이었지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갔던 하우스만은 1956년 유엔군 사령관 특별 보좌관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상당히 중요한 위치다. 한국군을 아주 잘 알던 하우스만이 쓴 글이 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45일 전(1961년 4월 1일), "나는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장도영 총장에게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군 내부의 쿠데타 기도를 주의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45일 전이면 상당히 오래전이다. 장도영이 이상한 태도를 취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매그루더는 도대체 왜 조치를 안 취했느냐. 이건 좀 이상하긴 하다.
쿠데타 직후 장면이 피신했을 때 전화한 사람이 그린 대리 대사였다. 이걸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 그런데 그린 대리 대사가 나중에 그걸 밝혔다. '나하고 통화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장면으로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봤을 거라고 본다. 그린 대리 대사가 '우리가 보호해줄 테니 나와라', 이랬으면 사태가 달라질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장면은 거처를 이야기하지 않고 또 꼭꼭 숨어버렸다.
장면은 모측과 다시 협의했다. 그 모측은 미국 대사관이지 않겠나.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곳도 없었으니까. 그쪽에서 뭐라고 대답한 걸로 돼 있냐면 '당신 요구와 윤보선 대통령의 주장이 달라서 우리가 고민이다', 이거다. 무슨 얘기겠는가. '우린 가만히 있겠다', 이 얘기다. 이런 것들을 보면 5.16쿠데타와 미국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대해 방증이라고 할까, 여러 가지 참고가 될 만한 얘기를 해주는 것이 5.16쿠데타 직후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다.
한국 현지의 미국 측, 쿠데타 정보 알고도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미국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뉴욕타임스> 1961년 5월 16일 자에 이렇게 나왔다. '매그루더는 8군에 비상을 걸었으나 방관적 정책을 취했다. 매그루더 장군은 미군이 영내에 머물도록 지시해 이번 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했다', 이런 내용이다. 장도영이 매그루더한테 전화한 것도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라고 돼 있다. 장면한테 보고하고 나서 바로 매그루더한테도 보고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비상을 걸었어야 하는데, 나중에 건 것 같다. 여러 자료를 보면, 처음부터 비상을 걸었다고는 안 돼 있다. 이것도 난 이상하다고 본다.
5월 17일 자 조든 기자가 쓴 기록을 보면,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고 장면 정부가 끝장날 것으로 믿고 있다고 돼 있다. 장면 정부가 두 손 든 건 18일(한국 시각)인데, 17일(워싱턴 시각)에 벌써 그런 보도가 나왔다. 시차를 고려하면 날짜가 거의 같긴 한데, 그래도 신문이라는 건 조금 늦게 나오지 않나. 하여튼 '한국과 미국 대사관의 관리들은 장면 총리와 내각의 조속한 사임을 바라고 있다', 이렇게 돼 있다.
5월 18일 <뉴욕타임스>에 난 걸 보면, 그린 대리 대사는 '상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고 사태의 진전을 예측할 수도 없다'면서 '이것은 한국인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이렇게 기자한테 답변했다고 돼 있다. 정말 진압하려 했다고 미국 언론에 보도되던 건 아니라는 점에서 좀 이상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또 갖게 하는 것들이다.
7월 23일 <뉴욕타임스> 로젠탈 기자가 쓴 것을 보면 '처음에 주한 미군 사령관이나 미국 대리 대사가 장면 정권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이건 10시 18분 성명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이 장면 정부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교묘하게 처리했다는 의심을 수많은 한국인들이 가질 것 아니냐', 이렇게 돼 있다. 이것도 아주 미묘한 말이다.
프레시안 : 10시 18분 성명서의 참뜻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중석 : 그린 대리 대사는 또 이런 얘기를 했다. 인터뷰에서 한 말을 보면 자기네는 매그루더에게 '우리가 이번 쿠데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5월 16일 새벽 3시에 전화를 받고 쿠데타 사실을 알았는데,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매그루더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만 밝히겠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미국은 한국군의 연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대 단위까지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다. 미국이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생각이 퍼지기 쉬웠다는 것이다. 또 일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그루더가 '합헌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을 통해 그런 의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으로 볼 때, 10시 18분 성명은 원칙적인 태도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볼 때,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대사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쿠데타에 대응하려 했다는 어떤 것도 찾기가 어렵다.
워싱턴이 쿠데타 세력에게 힘 실어준 이유
프레시안 : 미국 정부의 태도도 논란거리였다. 쿠데타 직후 매그루더와 그린이 '장면 정부 지지' 성명을 내자, 워싱턴에서는 '더 이상의 성명 발표는 피할 것', '쿠데타에 개입하는 것으로 비치는 발언은 삼갈 것' 등의 지시를 하기도 했다.
서중석 : 하우스만도 얘기했지만, 이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건 미국 정부다. 케네디 정부가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서 쿠데타를 진압할 수도 있었다. 서울에 들어온 쿠데타군이 3600명밖에 안 됐다. 그건 매그루더가 몇 번이고 강조한다. '간단하다. 포위하고 있으면 된다'고. 물론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게 5월 17일쯤 보면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인들도 있고 반대하는 군인들도 있다. 그러면 좀 곤란할 수가 있지만, 미국 정부와 주한 미군 사령부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면,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이 거기에 동의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은 분명했다. 어쨌건 미국 정부 입장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확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쿠데타를 지지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매그루더는 '우리가 개입해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나. 그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매그루더나 그린이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도 하고 그랬다.
이때 미국 국무 장관 딘 러스크는 외지에 나가 있었다. 그래서 체스터 볼즈 차관이 국무 장관 대리를 하고 있었다. 5월 19일 <뉴욕타임스> 조든 기자가 쓴 걸 보면, 볼즈는 '한국의 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이 매우 반공적이고 친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조든 기자는 이런 말도 했다. '지금 군부가 집권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목표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5월 17일 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볼즈는 "미국이 한국의 새 군사 지도자들을 승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편집자>) 쿠데타가 나고 얼마 안 지나서 미국 정부는 확고한 지지로 나아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미국 정부는 왜 그런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그게 또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한국에 오래 근무해 한국 사정을 잘 알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거기에 대해 쓴 게 있다. 헨더슨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 지지로 나선 건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쿠바에선 1959년 1월 1일 혁명이 성공해 피델 카스트로를 수반으로 한 혁명 정부가 등장했는데, 이게 미국에 굉장한 충격을 주지 않았나. 미국 코앞에 있고 미국 손아귀에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케네디 정부가 등장해 얼마 되지도 않은 1961년 4월 쿠바의 피그만 공격에 나섰는데 이게 실패했다. 헨더슨은 이런 쿠바 사태, 피그만 충격을 제일 큰 요인으로 든다. 이게 중요 요인이 아니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와 관련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가 장면 정부를 어떻게 봤는가 하는 부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미국 정부는 장면 정권을 어떻게 봤나.
서중석 : 5.16쿠데타 때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나중에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다", 이렇게 증언한다. 이게 참 많이 인용된다. (덜레스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8년간 CIA를 이끈 역대 최장수 국장이었다. 석유 국유화를 주장한 이란의 모사데크 축출(1953년), 농지 개혁을 추진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 전복(1954년) 등이 모두 덜레스 국장 시절 CIA와 관련돼 있었다. <편집자>) 물론 이에 대해, 쿠데타 시작 전부터 알아서 지원했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느냐고도 얘기한다.
그런데 CIA 국제협력국 직원(USOM(주한 미국 원조 협조단)의 기술 협조 담당 보좌관)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휴 팔리가 1961년 2월 한국 상황에 대해 보고한 게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최대한 한국이 주도한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그러나 결단의 시기는 지금이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1년 후 우리는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있다. 쿠데타 세력이 낸 아주 두툼한 <한국 군사 혁명사> 1권을 보면, 미국은 고도의 미국식 교육으로 단련된 유능한 한국군 장교가 불안한 한국의 미래를 영도해주길 바란다고 자기들한테 전했다고 돼 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민간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와 자유를 어느 정도 지키는 민주주의 정부가 과연 한국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진보 세력이 등장해 통일 운동 같은 걸 펼 것이라는 두려움인 건데, 그 두려움은 바로 현실로 찾아왔다. 4월혁명 후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물론 한국전쟁 전후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주장도 강하게 나온다. 미국은 '저게 어디로 진전될 것인가' 하는 것에 상당한 두려움과 걱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 대신 자기들이 정말 믿는, 탄탄한 반공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쿠데타를 직접 지원했겠느냐. 그건 아닐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쿠데타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필요를 미국이 못 느꼈다는 것도 확실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좌익 전력 때문에 꺼렸다? 미국, 박정희 쿠데타 사실상 묵인
프레시안 : 일각에선 좌익 전력 때문에 미국이 박정희를 꺼렸을 것이라고 본다.
서중석 : 미국은 처음부터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주한 미군과 미국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박정희를 잘 알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
장면 정부에서도 좌익 색채가 있다고 해서 예편하게 하려 했고 남로당 프락치 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를 미국이 지지했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박정희가 5.16쿠데타 후 혁신계를 싹 잡아들이는 등 극단적인 반공 정책을 편 건 좌익 전력 때문에 미국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대한 보호책이라는 주장도 숱하게 나왔다. 박정희는 반미적인 언사를 많이 썼고 일본 군인 정신도 강했는데 미국이 지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꼭 틀린 건 아니라고 보지만, 이런 부분에 관해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우선 CIA 한국 책임자였던 실바도 그랬고, 하우스만은 쿠데타 45일 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했다. 좌익 전력 때문에 박정희만은 안 된다는 생각을 미국이 정말 했다면 주한 미군이나 미국이 이때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당시 미국 언론 보도를 보면, 미국이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걸 간취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미국 언론은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뉴스위크> 1961년 7월 3일 자에는 '44세의 박 장군은 미국 장교들과 골프를 쳐본 일이 전혀 없으며 미국식 애칭도 갖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 실렸다.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 한국의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 미국식 애칭을 갖고 있었다. 여러 군인들도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뉴스위크> 1961년 11월 20일 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미국 유학 당시 영어를 거의 배우지 못했고 칵테일파티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5.16쿠데타 직후 미국 쪽에서는 박정희가 미국 문화,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싫어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타임> 1961년 5월 26일 자를 보면 박정희 소장을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이야기하고 있다. 매그루더 장군과 함께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던 그린 대리 대사가 한 인터뷰 같은 것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우리가 박정희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고 봤다', 이런 이야기는 안 나온다. 오히려 '박정희의 전력에 대한 시비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중에 인터뷰한 것에 나온다.
미국이 박정희보다 김종필을 더 경계하는 모습 보인 속내
프레시안 : 쿠데타 당시 한국 현지의 고위직 문관으로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그린이 그렇게 이야기한 건 이상한 일이다.
서중석 : 그에 비해 그린은 오히려 김종필에 대해서는 '다만 김종필은 공산당과 연루돼 있는지도 모른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는 여기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1961∼1964년 미국 문서에, 국무부 문서건 다른 문서건 여러 문서에 '김종필은 위험한 사람이다. 민족주의자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김종필이 박정희보다 더 좌익 색채, 좌익 전력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미국은 5.16쿠데타의 실질적인 계획자라고 볼 수 있는 김종필에 대해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김종필은 사실 전력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양반이 (해방 후) 육사에 들어가기 전에 뭘 했느냐에 대해 지금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구구한 설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대 사범대를 다 다니지 못한 건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좌익 활동에 연루됐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 당시 친일파도 군대에 들어가면 괜찮았고,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도 군대에 들어가면 괜찮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군대에 들어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건 김종필이 한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필도, 박정희도 자신의 과거 이력에 대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튼 김종필에 대해서는 명확한 것을 알 수가 없다.
프레시안 : 김종필이 입대 전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투쟁에 관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중석 : 좌익 활동에 연루됐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국대안' 반대 투쟁이라는 게 좌익 활동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확인은 안 됐다. 그 사건에 깊이 개입한 사람이나 김종필 본인이 이야기할 때만이 사료로서 가치가 있지 않나.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종필의 사상, 사고가 박정희와 차이가 있었느냐. 지난번에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어떠한 이념을 갖고 있었는가를 당시 자료들을 갖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김종필은 혁명적인 이념을 보이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신사조> 1962년 7월호에 쓴 걸 보면 "5.16혁명이야말로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지주로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라는 말을 내세우는데 그 민족주의가 뭔지를 잘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있다면,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내건 5.16혁명이야말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나온다. 5.16 '혁명 공약' 5번째로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이게 나오긴 한다. '혁명 공약'으로 통일 이야기를 안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이건 '통일을 위해 직접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겠다', 그런 것보다는 '통일은 나중 일이고, 먼저 건설하고 실력을 배양해 공산주의와 대결하겠다', 바로 이런 주장이다. 그러니까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민족사적 과제로 내걸었다고 하기는 어려운데, 어쨌든 민족주의 성격이 그렇게 잘 드러나 있지는 않다.
김종필이 미국 디커슨 대학이라는 데에서 1963년 무렵 한 연설 같은 것을 보면, 여기서도 박정희 장군과 비슷하게 '사화와 무자비한 당쟁은 민족을 분열시켰으며'라고 했다. 우리가 익숙한 식민 사관이 들어 있었다. '해방 이후 우리 정치는 계속 파쟁으로 갔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자유가 방종과 무질서로 전락했는데 그걸 막아야 한다', 이것도 박정희 장군의 주장과 아주 유사하다. 이런 것들이 1963년에 가면 '민족적 민주주의'로 나오는데, 학생들이 이걸 강하게 비판하고 시위 때 화형식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튼 김종필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 이 시기에 쓴 글이 참 적다. 그걸 가지고 이야기할 때 박정희하고 크게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프레시안 : 미국이 박정희보다 김종필을 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서중석 : 난 이렇게 생각한다. 김종필은 미국이 통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활동 양상이 상당히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다방면이라는 건 이리 튀고 저리 튈 수 있다는 건데, 말하자면 예상대로 움직이는 사람처럼 안 보일 수 있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 걸 우려한 점도 하나 있다.
더 큰 것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이간질한다고 할까, 떼어놓으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미국은 쿠데타 세력에서 이 두 사람이 핵심이라고 봤다. 정확히 본 것이다. 둘이 강하게 결합하면, 두 사람을 떼어놓지 못하면 미국이 통제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본 것 같다. 그렇다고 박정희의 전력에 직접적인 시비를 걸었다가는, 이건 문제가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자체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김종필만 문제 삼는 모습이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군의 아버지'와 '스네이크 박'의 특별한 인연
프레시안 : 미국이 쿠데타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는 박정희를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지적했다.
서중석 : 그쪽에서 박정희를 제일 잘 알 수 있었던 사람은 하우스만이다. 이 사람은 박정희를 잘 알고 있었다. 1948년 여순사건 때 반란 진압을 지휘하는데,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때 박정희와 함께 갔다고 하우스만 기록에 나온다. 여순사건을 진압할 때 같이 있었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 후 숙군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예의주시했다. 그런 것도 하우스만의 증언에 잘 나타나 있다.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고 숙군을 지휘한 백선엽 대령이 하우스만 자신한테 한 뭉치의 적색 침투자, 그러니까 남로당 프락치 명단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육사 2기, 3기가 프락치로 많이 처형당하지 않나. 이때 프락치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난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었다고 얘기한다. 박정희가 숙군 신문 과정에서 남로당의 군내 비밀 조직을 소상히 불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했던 점을, 그러니까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하는 큰 공을 세웠다는 걸 하우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를 어려울 때 구해준 동료, 선배, 후배들의 발뒤꿈치를 사정없이 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가끔 미군들 사이에서는 스네이크(snake, 뱀) 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참 재미난 표현을 썼더라. 어려울 때 구해준 이들로는 정일권, 백선엽, 장도영 등이 있다. 하우스만은 '그렇지만 군대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적색 조직을 샅샅이 폭로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한 건 확실히 그의 목숨을 건질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 당시에 봤다.
프락치 건으로 박정희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무기 징역 판결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형이 더 맞는 것 같다. 어쨌건 이때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받은 형을 면제해주자는 청원에 자기가 깊이 개입했다고 했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박정희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이것도 보여주고 있다.
프레시안 : 하우스만은 1956년 유엔군 사령관 특별 보좌관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서중석 : 하우스만은 다시 부임한 후 박정희와 계속 접촉했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다. '박정희도 나를 자주 만나는 걸 뭣 때문에 꺼렸겠느냐', 이 사람은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우스만 자신은 박정희를 둘러싼 군부 쿠데타설, 그러니까 예전(1952년) 이용문 쿠데타설도 관련이 되고 특히 1960년 4.19 직전의 쿠데타설일 텐데, 이런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5.16쿠데타 45일 전 '이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도 했다는 하우스만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5월 16일과 17일에 유엔군 사령부 쪽과 쿠데타 주동자 쪽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잘 수습되도록, 양측의 조정 작업이 무난하게 이뤄지도록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박정희를 잘 알고 있었고, 미국 정부나 매그루더 사령관한테 '박정희가 사상적으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매그루더도 '쿠데타군을 원위치시키자'고만 강조했지 '박정희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미국은 박정희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박정희가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 정책을 철저히 수행할 것임을 확신했다고 본다. 남로당 프락치로서 한 박정희의 배신적 행위, 기회주의자로서 면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거기 다시 안 붙는다는 걸 하우스만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측에서 그간 보니 공산당을 배신한 자들이 공산당에 다시 가는 건 못 봤다', 이런 점을 강조하더라.
많은 사람은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때나 대통령 때 반미적 정책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굉장한 착각이다. 박정희가 미국과 빚은 갈등은 이승만 때와 비슷하게 권력 관계에서 발생했다. 개인적으로는 반미적이고 일본 군인 시절 지녔던 군인 정신이 강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책이 반미적으로 나타난 경우는 없다.
미국은 박정희가 반공에 철저할 것임을 확신했다
프레시안 : 한국이 반공의 보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인가, 이것이 미국의 핵심 관심사였다. 이 전제를 뒤흔들지만 않는다면, 박정희 측이 대중에게 숨긴 '은밀한 과거'(좌익 전력)는 미국으로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군국주의 일본의 문화에 젖었는지 여부도 미국으로서는 부차적 문제였을 것이다.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세계 전략에 충실한 일본 우익 지도자들을 미국이 멀리하지 않은 것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서중석 : 쿠데타 세력이 쓴 <한국 군사 혁명사>에 미국은 고도의 미국식 훈련으로 단련된 유능한 한국군 장교가 불안한 한국의 미래를 영도해주기를 바랐다고 돼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뭘 가리키겠나. 그리고 5월 18일 자 <뉴욕타임스>를 보면, '매그루더나 그린이 매우 심하게 쿠데타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쿠데타 당일 오전 10시 18분에 나온 성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쿠데타를 계획한 한국 군부 지도자들은 미 8군 및 대사관의 이러한 태도에 과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돼 있다. '저건 그냥 미국의 공식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우리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면 그전에 뭔가 교감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나. 이건 하우스만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고 본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미국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박정희에게 일정한 압력을 가하고 컨트롤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미국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 문제를 주시하고 있다'는 식의 설명과 주장이 나가게 하는 건 그 뒤로도 계속 보인다. 한국의 친미 세력 사이에서 '미국은 박정희의 과거 이력 때문에 결코 박정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은 칠 것이다', 이런 식의 기록도 1960년대 초중반에 꽤 나온다.
이런 걸 종합하면, 미국이 박정희의 전력 문제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했던가를 하나로 딱 설명하기보다는 '상당히 복합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건 한국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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