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인종과 명종입니다. 각각 조선 제12대, 제13대 왕이었던 인종과 명종 재위 시절의 실제적인 조선의 통치자는 왕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 윤 씨였습니다. 윤 씨는 1545년 고작 7개월 만에 목숨을 잃은 인종을 대신해 친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시작해 1565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사실상 20년간 조선의 여제였습니다.
이 기간은 흔히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암흑기로 꼽히는 기간이죠. 그러니 당연히 인종과 명종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서는 문정왕후와 이들의 관계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은 인종과 명종의 건강까지 좌지우지한 문정왕후에 초점을 맞춥니다. <편집자>
심약한 왕에 나라는 엉망이 되고…
한의학에선 목소리와 정력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 명종 3년 11월 7일 시강관 정유길이 왕의 목소리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옥음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신하들의 불안한 예측은 후일 맞아 떨어진다. 명종은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그 세자가 13세에 죽자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명종 18년 9월 20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이듬해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이 어지럼증과 곤히 조는 증세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편안하기도 하고 편안치 못하기도 하다. (…)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국가에 경사가 없다. 지난해에 세자를 잃은 뒤, 국가의 형편이 고단하고 약해진 듯하니 심기가 어찌 화평하겠는가."
후계자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종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핏줄을 염두에 뒀다. 그만큼 순회세자의 죽음은 명종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래부터 심열증을 앓던 명종은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명종 20년 9월 15일엔 열이 심해 신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후계자 문제를 절박하게 물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다." (당시에 상이 하답하기가 어려워서 이같이 하교했으나 실은 후사를 정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대신들은 다시 왕비를 압박했고, 왕비는 마지못해 한글로 하성군 이균(선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바로 '을축년의하서'다.
심열증은 명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괴로움이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한 번도 왕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마마보이의 전형이었다.
윤원형의 전횡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임꺽정이란 의적까지 출현한다. 명종 14년 3월 27일 임꺽정 토벌 방안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재상들의 인식은 사태의 본질을 분명하게 환기시켜 준다.
"도적이 출현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엽기적인 일도 많았다. 명종 21년 2월 29일에 전하는 다음 이야기는 단적인 예다.
"사서(士庶)들이 주색을 즐기다 음창(성병)에 걸린 이가 많았다.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그 병이 즉시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통을 받던 이들이 많은 재물로 사람을 사서 죽이고 그 쓸개를 취했다. 종루, 보제원, 홍제원 등에는 걸인이 많이 모였는데 4~5년 새 이들이 다 사라졌다. 나중에 이들은 평민에게까지 손을 뻗쳐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다."
음창은 사타구니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일종의 성병 후유증이다. 이것을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시들에겐 강하고, 신하들에겐 약하고 심약한 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실록의 마지막 졸기다.
"환시(宦侍)를 대할 때에는 매우 질타했지만 외신(外臣)을 대하면서는 조금도 잘못한다고 지적을 못했으니, 공론을 두려워하고 조정을 높이는 것이 지극했던 것이다. (…) 상이 군자를 쓰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상이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좇는 것을 이롭게 여기며 서로 이끌며 보호했다."
이런 졸기를 뒷받침하는 예는 실록 17년 7월 12일의 기록이다.
"상은 성품이 강명(剛明)하여 환시들의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고, 항상 궁중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꾸짖고 매를 치기까지 하였다. 희로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서용하니, 환시들이 상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심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부에 강한 사람은 내부에 약하고 외부에 약한 사람은 내부에 강하다. 심약한 명종은 내시들에게 한없이 강했지만, 외부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중국 사신이야 오죽했겠는가. 22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문제로 왕은 지레 겁을 먹고 고민했다. 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이 평소 심열이 있는 데다 더욱 사신에 대한 생각에 열증을 돕는 징후가 없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왕이 건강할 권리
심열증이 심해지면서 명종의 체질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록 20년, 명종은 자신은 본래 약한 체질로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는데 더욱 심해져서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해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21년 9월 13일에도 명종은 자신이 약질로 본디 심열이 있어 병을 자주 앓는데 세자를 잃고 매우 상심하고 다시 어머니의 상을 만나 마음이 한없이 괴롭다고 호소한다. 22년 6월 9일에도 위는 뜨겁고 아래는 냉한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이렇게 명종이 토로하는 괴로움은 한의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상열하한증이었다.
음양오행론에서 심장은 우리 몸의 엔진이어서 불꽃(火) 같은 힘을 상징한다. 신장은 겨울을 상징하므로 차가운 물(水)을 나타낸다. 불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상열하한을 치료하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은 마음을 다스려 심장의 열기를 하부로 내리고 신장에 저장된 차가운 물을 데워 상승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명종은 스트레스로 심열이 심해져 불이 위로 향하고 정력을 상징하는 신수는 고갈돼 상승할 수 없었다. 평소 의식주 습관도 문제가 있었다. 너무 더운 곳에 거처하고 두꺼운 옷을 입었으며 찬 음식을 즐겼기 때문에 소화 기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도 여름에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 지병을 앓은 명종의 소화 기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명종 22년 6월 27일 실록은 마지막 증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상께서 열기가 위로 치받쳐 올라 인사를 살피지 못한다."
<동의보감>은 이런 증상을 간열과 비허로 파악했다.
"몹시 성 내어 간을 상하면 열기가 가슴에 밀려오고 숨이 거칠고 짧아지면서 끊어질 듯하며 숨을 잘 쉬지 못한다." "지나치게 생각하여 비를 상하면 기가 멎어서 돌아가지 못하므로 중완에 적취가 생겨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오르고 그득하며 팔다리가 나른해진다."
성리학은 본성과 천리를 파악하고 수양함으로써 기질과 욕망을 억제하고 경건하게 살 것을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치유 체계도 공존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은 왕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았다.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던 인종과 심약한 마마보이 명종은 그렇게 조선의 이념적 질곡 속에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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