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최근 파국의 위기로 몰린 한나라당의 내분 사태 속에 유난히 두드러진 현상이다. 대표적인 '친박(親朴)'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를 비난하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의원이 박 전 대표의 편을 드는 기이한 형국이다.
이런 혼란은 당의 중진의원들로부터 소장세력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 특히 지도부 내에서조차 친소관계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지는 등 당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강재섭-이명박 vs 박근혜
이런 혼선의 정점에는 강재섭 대표가 서 있다. '중재안' 논란과 관련해 강 대표는 10일 "폭풍우가 몰아쳐도, 풍랑이 일어도 선장은 배를 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중재안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난해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될 때부터 최근까지 '친박 지도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강 대표다. 특히 4.25 재보선 패배 후에는 박 전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사격에 힘입어 당내의 거센 사퇴 요구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명박 전 시장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재안을 들고 "더 이상 협상은 없다. 어느 한 쪽이 반대하더라도 추진할 것"이라면서 배수의 진을 쳤다. 의외라는 지적이 많다.
당 일각에선 재보선 책임을 둘러싸고 '지도부 총사퇴론'이 제기됐을 때 이명박 전 시장이 이재오 최고위원을 만류하면서 '강재섭 체제'를 용인해 준 뒤부터 기류가 바뀌었다는 수군거림이 있다. 이와 관련해 홍준표 의원은 "강 대표가 턱도 없는 방식으로 접근하니 답답하다"면서 "당 내에선 실제로 '중재안이 아니라 담합안, 보은안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의구심에 가득찬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강 대표가 중재안을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9일 발표한 점도 의심을 샀다. 중재안 발표→이명박 전 시장의 '고심 끝 수용'→이 전 시장의 대선출마 공식 선언이 모두 전격적으로 이어지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당장 '강재섭-이명박 연대설'까지는 아니더라도 강 대표에 대한 '배신감'은 우선 박근혜 캠프 내에서 일파만파로 번졌다. 박근혜 캠프의 유승민 의원은 이날 오전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묭룡입니다>에 출연해 "같은 편으로 생각했던 강 대표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강 대표는 이명박 전 시장의 반칙과 억지에 끌려 다녔고, 지지율 1등을 달리고 있는 분에게 더 유리하게 룰을 만들었다. 납득할 수 없다"고 맹공했다.
강재섭 편드는 이재오?…박근혜 비판하는 전여옥?
일각에선 대선주자-지도부 간 '4자회동' 하루 전인 지난 3일 비밀리에 열렸던 강재섭-이재오 회동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됐다. 실제로 '강재섭 중재안'이 나온 뒤 강 대표와 이재오 최고위원의 관계는 느닷없이 '협력모드'로 전환됐다.
김학원 의원이 이날 지도부 회의에서 상임전국위원회에 중재안을 안건으로 상정하는 방안에 난색을 표하자 이 최고위원은 "전국위 의장이 먼저 안건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받아치며 강 대표를 두둔했다.
이런 모습은 사실 현 지도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크고 작은 갈등 현안에서 '박근혜-강재섭 대 이명박-이재오' 라인이 사사건건 대립각을 펴 왔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 최고위원은 특히 재보선 참패 직후만 해도 자신의 직을 걸고라도 강재섭 사퇴론을 관철할 태세였다.
강재섭 중재안이 나오기 전엔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꼽히던 전여옥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를 비판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 박 전 대표가 지도부 사퇴론을 일축했음에도 전 의원은 끝내 최고위원 직을 던졌다.
전 의원은 "얼굴을 붉히면서 토론도 하고 '이렇게 가자'는 지도자 나름대로의 생각과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 모든 프로세스에 큰 문제가 있다"며 "지도자라면 모든 것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고 박 전 대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도부의 '투 톱'도 사이가 벌어졌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이날 강 대표의 중재안에 대해 "상식적으로,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비교적 계보색이 엷은 것으로 분류되던 김 원내대표가 이제 드디어 한쪽 편을 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홍준표도 '엇박자', 원희룡-고진화도 대립
이런 현상은 지도부 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 전 시장과 가까운 홍준표 의원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 진영의 주장이 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만석꾼이 쌀 한 섬 더 갖겠다고 애쓰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홍 의원은 "솔직히 나는 이명박 선배와 훨씬 더 친하다"면서도 "원칙은 그게 아니다"고 강재섭 중재안을 비판했다. "원칙대로 해야 한다"는 논리로 중재안을 거부하고 있는 박 전 대표의 손을 들어준 것.
마이너 대선주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엇갈렸다. 원희룡 의원은 "강재섭 대표의 중재안은 후보들 간의 첨예한 유·불리를 적절히 배려한 고뇌에 찬 결단"이라며 "최선의 안"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고진화 의원은 "강 대표가 제시한 중재안은 결과적으로 20만 명에서 23만 명으로 계수조정만 반영된 '줄 세우기 확장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봉책"이라면서 "전면적인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를 통해 국민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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