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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제안과 새로운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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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제안과 새로운 진보정치

[김윤태 칼럼] 어떻게 불평등과 싸울 것인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다. 빈부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상위 소득자 1%가 전국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상승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졌지만, 부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었다. 1950년대 최상위 1%의 부는 전국 부의 약 12% 수준이었는데, 현재 20%에 육박했다. 같은 시기 미국 기업의 최고 경영자의 급여는 노동자 평균 급여의 50배에서 현재 400배 수준으로 상승했다.

한국에서도 최상위층 1%의 부의 가공할 수준이다. 최상위 1% 부자는 전체 부의 18%를 차지한다. 세계 2위다. 최근 대기업 임원 640명의 5억 이상 연봉은 공개했지만, 미등기 임원과 배당 소득이 많은 주주의 명단은 빠져 있다. 주목할 사실은 ‘상속형’ 부자가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2013년 재벌닷컴 자료에 따르면, 상장사 상위 1% 주식 부자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78조 원에 육박한다. 스스로 기업을 세운 ‘자수성가’ 부자는 10명 중 3명에도 못 미친다. 반면에 소득 불평등을 측정하는 상대적 빈곤율은 악화되고 있다. 2013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5%를 기록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6위를 차지했다. 1000명 중 165명의 연 소득이 1068만 원(월 89만 원) 미만이라는 이야기다.

세습 사회의 등장

부의 집중 현상은 미국과 한국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21개 국가의 자료를 활용해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영국·호주·뉴질랜드·중국·인도·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도 최고 소득자가 나머지 계층보다 훨씬 많이 수입을 얻게 되면서 지난 25년 동안 불평등이 빠르게 확대되었음을 증명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부의 세습이다. 피케티는 세습된 부와 권력에 의해 과두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부의 세습은 투자로 인한 소득과 자본이득에 대한 조세가 감소한 반면, 임금과 급여에 대한 조세는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피케티가 말한대로, ‘세습 사회(inheritance society)’의 등장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자유로운 사회이동은 사라지는 반면, 가문의 자본축적에 따른 경직된 계급구조가 출현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대안은 있는가?

진보 정치의 프로젝트에서 부의 재분배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이다. 피케티는 자본에 대해 ‘세계세(global tax)’를 부과하고 최고 75% 수준으로 소득세와 상속세 세율을 인상하지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합의 없이 실행하기는 힘들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부유층에 대한 80% 세율 인상을 2012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취임 직후 포기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부유층에 대한 과감한 증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최고 소득세율은 80% 수준에 달했다. 서유럽의 복지국가도 대공황과 세계대전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그 후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복지국가는 흔들렸다. 더욱이 노동조합이 약화되면서 노동자의 실질임금과 복지급여는 점점 낮아졌다.

조세 개혁이 시급하다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소득불평등이 더 악화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적 부와 소득을 가진 강력한 초부유층(super rich) 세력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부가 정당하다고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다수의 보수적 싱크탱크, 대학,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능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도덕적으로 정당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보통사람에게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조세정책의 개혁을 뒤로 미룰수록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최근 ‘해밀턴 프로젝트’의 요청을 받은 예일대학교의 로버트 쉴러 교수, 부르킹스 연구소의 레너드 버먼과 제프리 로핼리 연구원은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면 최고 소득자에 대한 한계 세율을 자동으로 인상하는 ‘밀물 조세(rising tide tax) 제도’를 제안했다. 사실 누진적 소득세의 세율을 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결정이다.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일정 수준의 빈곤율 또는 지니계수가 넘으면, 이에 따라 의회에서 조세 인상율을 결정할 수 있다. 증가하는 세수는 교육과 직업훈련 등 기회의 평등을 강화하는 정책과 기술개발 및 미래 투자를 위해 지출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의 가치를 찾아서

오늘날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진보정치에 가장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모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면서 ‘평등’은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졌다. ‘경쟁력’과 ‘경제성장’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시장경제는 성장을 위한 효율적인 제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부의 분배를 위한 효과적 장치는 아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부자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장기적 차원에서 시장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진보정치는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어떻게 증가하는 불평등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불평등은 학자뿐 아니라 정치인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가 되었다.

이 글은 2014년 6월 출간 예정인 <한국 정치, 어디로 가는가: 새로운 정치를 찾아서>(김윤태 엮음, 도서출판 한울)에 게재한 ‘새로운 정치의 가치와 전략’의 일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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