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부산 아성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될까. 통합진보당 고창권 부산시장 후보가 29일 후보직을 전격 사퇴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퇴"라고 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부산시장 선거는 또다시 1대 1 구도를 맞이하게 됐다.
친박계 핵심으로 박근혜 정부 실력자이기도 한 서병수 후보, 그리고 부산시장 권한대행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던 '부산시장 도전 3수생' 무소속 오거돈 후보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곳, 부산이다.
"요즘 굿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이 정권 들어와서 왜 이렇게 사고가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거 분위기가 이상하고 복잡해요. 옛날에 구포역에서 사고 난 후에 고사도 지내고 그랬거든요(1993년, 부산 구포역 열차 탈선 사고로 78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 편집자). 그런 분위기 같은 게…. 뭔가 흉흉해요, 사회 분위기가. 속는 셈 치고라도 좀 바꿔볼 필요가 있어요. 이번엔 진짜로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부산에서 30년 이상 택시 운전을 했다는 이상만(가명) 씨가 말했다. 이 씨는 "통진당 후보가 오늘 사퇴했다는데, 오거돈 씨는 통진당하고 성향 자체가 거리가 멀지 않나. 이제 선거가 좀 재밌어지겠다"고 말했다. 부산 서면에서 만난 대학생 박준수(가명) 씨도 "저희 같은 대학생들은 새누리당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다"며 "이번에 꼭 투표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부산이 조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부산 지역 야권의 선거 운동 키워드는 '여당 견제론'이 아니라 '독점 타파론'이다. '정권 심판'이 아니라 '지역 선거'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영춘 전 의원이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오거돈 후보에 힘을 실어준 후, 부산의 전체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제1야당'은 부각되면 안된다(새정치연합 부산시당 고위 관계자)"는 것이 야권의 현재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선거 운동 주도권도 오거돈 후보에게 모두 넘어간 상태다.
오거돈 후보는 최근 "나는 보수이기도 하고 진보이기도 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실제 새누리당 박민식 후보 캠프에서 정책을 총괄했던 동의대 김가야 교수, 권철현 후보 캠프 정책단장이었던 동아대 김승환 교수는 경선 패배 후 오거돈 후보 캠프에서 자리를 잡았다. 새누리당 서병수 후보 입장에서는 뼈아픈 일이다.
"오거돈 후보는 그냥 행정가가 아니냐. 일은 잘할 것 같다"고 또 다른 택시기사 유영천(가명) 씨는 말했다. "부산은 항상 새누리당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유 씨는 "그렇지도 않아요"라며 웃었다.
'박근혜 동정론'도 고개…"잘못은 했지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고 후보의 사퇴가 오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서 후보는 현재 오 후보에 대해 '위장 무소속 후보'라며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에 대한 입장을 집요하게 묻고 있다. 고 후보의 사퇴가 오히려 새누리당 지지자들의 위기의식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3~7%를 꾸준히 기록해왔던 고 후보의 지지층이 오 후보로 쏠릴 경우 오 후보 측에서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25년 만에 야권 성향 후보가 부산시장을 탈환할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정국 운영에도 빨간불이 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누리당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서병수 후보는 권철현, 박민식 전 후보 지지세력을 폭넓게 끌어안는 데는 실패했지만, 부산에서 "힘 있는 여당론"은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부산역 앞에서 만난 60대 권순분(가명) 씨는 "오거돈 후보는 어찌 됐든 새정치연합, 통진당하고 같은 편 아니겠나"라며 "그래도 서병수 후보가 시장이 돼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고 잘라 말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박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도 고개를 들 조짐이다. 권 씨는 "세월호 사고가 박근혜 때문에 났나? 야당이 해도 너무 심하다. 국무총리도 막 몰아내고, 이 정도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정부가 잘못했어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론조사를 보면, 말 그대로 혼전 양상이다. 부산 지역 언론인 <국제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26, 2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오 후보가 43.0%, 서 후보가 40.1%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후보 사퇴 전 통합진보당 고창권 후보는 3.0%의 지지율을 보였다. 모름·무응답은 13.9%였다. (만 19세 이상의 부산 지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유선전화와 무선전화를 섞어 실시.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는 ±3.1%포인트.) 이 신문 여론조사에서 오 후보가 서 후보의 지지율을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53.5%가 서 후보를 꼽았다. 오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답한 비율은 33.5%였다. 후보 지지율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야권의 기대감이 '바이어스(편중 현상)'로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른바 '착시 효과'일 수 있다는 것.
선거 무관심층도 변수다. 부산 동구 지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영자(가명) 씨는 "이번 선거는 예전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것 같다.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그런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허남식) 시장도 지금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쓰고, 12년 했는데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죠. 이제 뭐 한다고 하는데 다 부질없는 일이죠. 그러면 부산이 바뀌냐고? 모르겠어요. 선거 관심 별로 없어요. 세월호 사건 때문에도 그렇고, 투표 안 한다는 소리가 많아요. 부산에서는 투표율이 별로 안 나올 거 같은데…."
새누리당 아성에 작은 구멍 뚫릴 수 있을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이 또 있다. 지역의회 구도의 변화 여부다. 지난 2000년 이후 치러진 세 차례의 부산시의원 지방선거 결과는 124대 0, 새누리당의 압승이었다. 비례대표를 제외한 지역구 시의원 기준이다. 현재 부산시의회도 지역구 기준으로 42대 0의 상황이다. 여기에 부산시 구청장도 모두 새누리당 소속이다.
그러나 바닥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말이 나온다. 새정치민주연합 부산시당 전진영 대변인은 "일단 야당에서 후보 자체가 많이 나왔다. 과거에는 후보가 없어서 많은 선거구를 포기해야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매머드급 선대위를 꾸린 '문재인의 친구' 황호선 후보가 나선 부산 사상구청장 선거 등도 관전 포인트다. 일부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무소속 돌풍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 2010년 선거 당시 민주통합당(현 새정치연합) 김정길 후보가 1대 1 구도에서 44.6%의 득표율을 기록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부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들이 나왔었다. 그 후 4년이 흘렀다. 이번에도 "부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또 나오고 있다. 단단한 새누리당 아성에 작은 구멍이 뚫리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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