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달 14일 개헌발의 의사를 철회했다. 이에 대해 '여론과 각 정당의 무관심에 사실상 무릎을 꿇은 것이며 제 아무리 노 대통령이지만 임기 말 안정적 국정운영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하지만 최근 노 대통령의 목소리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2일에는 정치권 전반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이 담긴 두 편의 글이 공개됐다.
개헌발의 철회 이후 더 높아진 목소리
노 대통령은 개헌발의 철회의사를 밝힌 지 불과 사흘 뒤인 지난 달 17일 국무회의에서부터 "왜 개헌을 미루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아무리 대의명분이 뚜렷한 일이라도 그를 뒷받치는 세력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 정치의 또한 냉정한 현실"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달 29일에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청와대브리핑에 실어 "정치는 죽었다"면서 "여론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며 개헌 무산의 아쉬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치권 전반을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 본관 돌계단 앞에서라도 강행하려 했다 취소한 연설문 전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후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 때마다 개헌 무산에 대한 아쉬움, 한나라당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내놓았다.
급기야 이 날은 한나라당 대선주자들과 구 여권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가 두 편의 글을 통해 펼쳐진 것.
'정운찬 비토론'이 뒤늦게 공개된 이유는?
노 대통령 본인이 직접 작성한 원고지 28매 분량의 이 두 글은 몇 가지 지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지난 달 23일 작성했다고 청와대가 밝힌 첫 번째 글은 정운찬 전 총장에 대한 '비토론'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포함됐다.
노 대통령은 "나섰다가 안 되면 망신스러울 것 같으니 한 발만 슬쩍 걸쳐놓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가 될성 싶으면 나서고 아닐성 싶으면 발을 빼겠다는 자세로는 결코 될 수 없다"면서 "거저 먹으려 하거나 무임승차를 해서는 안 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고 건 전 총리가 낙마하게 된 데 큰 영향을 미친 '총리 기용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는 지난 연말 발언 보다 훨씬 강도가 높다.
결국 청와대가 노 대통령의 글을 작성 직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노 대통령이 정운찬을 비토했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이 대권포기를 선언한 마당에 '부관참시'격이 될 수 도 있는 이같은 글을 왜 공개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는다.
'다 마음에 안 든다'
노 대통령은 이날 글에서 차기 대선주자의 덕목을 몇 가지 제시했다.
△"주위를 기웃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투신해야 한다" △ "저울과 계산기일랑 미련없이 버려야 한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분은 정당에 들어가야 한다" △ "경선을 회피하려 해선 안 된다 △"정치적 이익만을 셈해 정치를 해선 안 된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두 번째 글을 통해 "(열린우리당 몰락의) 책임을 따진다면 이미 당을 깨고 나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여전히 '통합노래'를 부르며 떠날 명분을 만들어 놓고 당을 나갈지 말지 저울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통합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없이 당을 깨자고 한 것을 보면 각자 살 길을 찾자는 속셈"이라며 "정치에서 후보보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기본을 바로잡고 다질 때"라며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정치는 상생과 통합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탈당파, 통합파, 후보중심통합파, 그리고 탈당을 공언하고 있는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까지 범여권 내의 거의 모든 세력을 싸잡아 비판한 셈이다.
결국 이날 공개된 두 편의 글은 '다 내 맘에 안 찬다'로 요약될 수 있다.
정치권 비판의 다음 단계는?
노 대통령의 거침없는 발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수개월 전 한 자릿수 까지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와는 그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전날엔 한나라당을 향해서 '인질 국회, 파업국회'를 벌이고 있다고 맹비난 했고 이날은 범여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이명박 전 시장의 인기도 주춤한 현재, 정치권의 중심에 노 대통령이 서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이제는 노 대통령이 정치권 비판이라는 예열을 넘어 새 깃발을 꽂는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지로 관심사가 이동하고 있다. '레임덕 없는 대통령'이라는 신기원을 개척하고 있는 노 대통령의 영향력이 어느 수준, 어느 시기까지 지속될 지 두고 볼 일이다.
'원칙'을 입버릇처럼 강조해왔던 노 대통령이지만 최근엔 '원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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