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1.
장르소설에 익숙하다는 건 결국 내재된 규칙과 맥락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거대한 바다와 같은 소설 속에서 장르소설을 건져내는 뜰채는 결국 규칙인 셈이다. 근대적 미스터리는 하나의 '발명품'처럼 등장했기에 오랫동안 규칙과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늘날 복잡한 미스터리의 면면은 이러한 규칙에 대한 반발과 희구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딱딱한 규칙들이 여전히 미스터리 장르를 옭아매던 1930년대, 딱히 맥락과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작가가 등장했다.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섬이었고, 스스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미스터리 장르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 어떤 대륙보다도 넓은 섬, 바로 조르주 심농이다.
거듭 언급하는 <블러디 머더>(줄리언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서, 온전히 한 장을 차지하는 작가와 탐정은 단 두 명뿐이다. 한 명은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이고 남은 한 명이 바로 조르주 심농과 매그레이다. 줄리언 시먼스는 '심농과 매그레' 장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조르주 심농은 별도의 장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럽 작가들 중에서 극히 드물게 외국에서도 유명해진 작가였다."
2.
당연히, 고집스러운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조르주 심농은 여전히 낯선 존재이다. 영국식 고전 미스터리와 비교하자니 그 구조가 왠지 어설프고, 미국식 하드보일드처럼 전형적인 탐정의 모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르주 심농이 등장했던 1930년대는 굳이 미스터리 장르에서 문학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범죄 소설이라는 개념도 아직 정립되지 않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르주 심농은 순식간에 스스로의 문학적 성취를 증명하며 장르의 한계를 가뿐하게 넘어선다.
물론 불가사의한 생산 능력도 거기 한몫했다. 그가 20여 개의 필명으로 남긴 저작은 400편에 달한다. (SF계의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는 데려와야 겨우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쥘 매그레는 조르주 심농과 동의어이다. 1931년에 출간된 <수상한 라트비아인>(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라트비아인을 미행하며 처음 등장한 쥘 매그레 반장은 이후 102편의 작품(장편 74편, 단편 28편)에 등장한다.
180센티미터, 110킬로그램,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거대한 체구. 잇자국이 새겨진 파이프로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고 앉은 자리에서 너덧 잔의 맥주를 들이켜는 매그레 반장은 천재성이나 기벽 따위는 없는 영락없는 서민의 모습이다. 연역과 귀납 같은 일반적인 탐정의 방법론으로 매그레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매그레는 범죄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그것을 드러내는 탐정이었다.
3.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콩카르노. 라미랄 호텔을 막 나선,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듯한 지역 유지가 갑작스런 총격을 받는다. 시장의 다급한 요청으로 젊은 형사 르루아와 함께 콩카르노로 달려온 매그레는 숙소인 라미랄 호텔 카페에서 지역 유지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계산대 아래 웅크린, 주인 없는 누런 개 한 마리를 목격한다.
이어 대담한 독살 시도가 발견되고, 신문기자가 행방불명되는 등 불안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사람들은 사건 현장 근처를 떠도는 누런 개에 두려움을 느끼고, 익명의 투고 기사는 거기에 불씨를 당긴다. 공포와 불신이라는 전염병이 콩카르노에 번지기 시작한다.
초조해하는 르루아 형사와 달리 매그레 반장은 느긋하기만 하다. 독이 든 술잔을 분석해보자는 형사의 요청에 시큰둥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고, 시장의 닦달도 그저 흘려보낼 뿐이다. 정작 매그레의 시선은 사건들이 아닌 불안해하는 카페의 웨이트리스와 상처 입은 누런 개 그리고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한 사내에게 향하고 있었다.
4.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가능한 한 간결한 문체를 추구해 왔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언젠가 프랑스 인구의 절반 이상이 6백 단어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통계를 읽었다. 그러니 내가 추상적인 단어들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추상적인 단어는 두 명의 독자 머릿속에서 다른 의미를 띠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선정적인 범죄는 조르주 심농의 글을 통해 어떤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심농은 범죄가 일어난 사회의 단면에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매그레 반장이 필요하다. 범죄 현장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인간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며 범죄자의 처지에 쉽게 공감하는 매그레의 모습은, 미스터리의 규칙 안에서 마치 탐정의 능력처럼 포장돼왔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매그레 반장은 범죄로 인해 상처 입고 멍든 시공간에서 공감할 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의 구체화된 모습이다.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미스터리 장르에 조르주 심농을 굳이 욱여넣는 건 쓸데없는 고집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심농은 심농일 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스터리 장르가 조르주 심농을 아우르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갈레 씨, 홀로 죽다>(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호텔에서 일어난 한 남자의 죽음. 먼 거리에서 총을 맞고 심장에 칼이 찔린 채 발견된 시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구도를 그려낸다. 매그레 반장은 죽은 남자 에밀 갈레에 집중한다. 클레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중적인 삶, 살해당하기 직전에 방 안에서 태우려 했던 서류들. 한 남자의 비밀스러운 삶을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작품.<타인의 목>(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펴냄)명백한 증거로 잡아넣은 범인이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다. 결국 동기를 납득하지 못한 매그레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다. 범인을 일부러 풀어주고 뒤를 쫓는 매그레. 그리고 그 앞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한 젊은이. 아무 동기도 없이 타인의 목을 노리는 남자와 동기 때문에 사건을 의심하게 된 메그레의 승부가 펼쳐진다.<제1호 수문>(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은퇴를 신청한 매그레 반장이 공직에서 겪는 마지막 사건. (하지만 훗날 매그레 반장은 출판사를 달리해 다시 돌아온다.) 두 남자가 운하에 빠졌다가 살아남는다. 한 명은 등에 칼을 맞고 한 명은 취해 있었다. 운하를 지배하는 거물의 살인 미수. 차근차근 은퇴를 준비하는 매그레와 두 남자의 비틀린 관계 속에 당대 성공한 중년의 서글픈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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