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과 유족들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이 나라를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혁파할 것을 함께 다짐합니다.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내포지방(內浦地方)의 고을로 당(唐)의 선진문물이 유입되었던 백제(百濟)의 국제무역항(國際貿易港), 충남 서산(瑞山)을 찾아갑니다. 제9강으로, 서산은 마한(馬韓)과 백제의 문화적 원형질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 지역입니다.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몰락 이후 웅진(熊津), 사비(泗泌) 지역으로 천도(遷都)하면서부터 서산지역과 가야산 일대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강 답사지인 선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서산의 산줄기는 동쪽으로 높이 400~600m 내외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가야산군(伽倻山群)이 예산(禮山)과 경계를 짓고, 서쪽으로 팔봉면의 팔봉산(八峯山 362m)과 부석면의 도비산(島飛山 352m)이 태안(泰安)과 근접해 있으며 북서쪽 해안가로는 대산읍의 황금산(黃金山 156m)이 나지막이 봉긋 솟아 있습니다.
가야산(伽倻山)은 금강 북쪽의 충남 땅에 솟아오른 산줄기인 금북정맥(錦北正脈)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태안반도(泰安半島)의 안흥진(安興津)에서 서해(西海)로 들어가기 전에 남은 기운을 한껏 펼쳐서 솟아오른 봉우리로서, 서산을 포함한 충청도 서북부 지역의 10개 고을을 일컫는 내포지방이 그 넓은 품에 안겨 있습니다.
가야산이라 불리게 된 연원은 예로부터 바닷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을 ‘개산’이라 부르며 항해와 관련하여 지표로 삼았기 때문에 개산이 있는 지역은 해상교통이 매우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선진문물이 유입되는 길목이기도 하였는데, 당나라의 불교문화도 이곳을 통하여 들어오면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인 ‘부다가야(Buddha Gaya)’의 이름을 빌려 불교식으로 가야산으로 표기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야산(677.6m)은 서산의 동쪽에서 예산과 경계를 이루며 내포지방을 지켜주는 진산(鎭山)이면서 해미현(海美縣)의 주산(主山) 역할도 하는데 서산 쪽 산록에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하여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등 불교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도비산(島飛山 352m)은 부석면의 주산으로 산허리엔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부석사와 동사가 있으며 정상에는 옛날의 봉수대 터가 남아 있고 옛 서산군지(瑞山郡誌)인 <호산록(湖山錄)>에는 날씨가 쾌청할 때 도비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해로(海路)가 분명하게 보여 중국의 ‘청제(淸帝)의 지경(地境)’을 볼 수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해상교통의 중심
팔봉산(八峯山 362m)은 팔봉면의 주산으로 서산의 서쪽에서 태안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하늘과 바다 사이에 놓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여덟 봉우리가 장관을 이루고, 정상에 서면 태안지역의 가로림만 일대가 한눈에 펼쳐져 있으며, 가뭄이 심하면 수령(守領)이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던 천제단(天祭團)도 남아있습니다.
황금산(黃金山 156m)은 서산의 북서쪽 바닷가에 낮게 솟아 있는 산으로 해송(海松)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숲길과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금을 캤던 2개의 동굴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산 정상에는 예로부터 풍년과 안전을 기원했던 당집을 복원하여 매년 봄, 제향(祭享)을 지내고 있으며 황금산의 원래 이름은 ‘항금산(亢金山)’이었다는데 옛날에는 평범한 금을 뜻했던 ‘황금’에 비해 ‘항금’은 고귀한 금으로 여겼기에 마을의 선비들이 ‘항금산’으로 표기했다고 전해집니다.
서산의 물줄기는 가장 큰 하천(河川)인 용장천과, 해미천과 합류하여 시내 중앙을 가로질러 간월호(看月湖)에 유입되는 대교천, 그리고 서산의 남동쪽 외곽에서 발원하여 석림천을 받아 안은 청지천이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또한 서산은 해안가 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퇴적평야를 이루고 있어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북동쪽의 잠홍저수지, 남서쪽의 풍전저수지, 서산시내에도 중앙지(中央池)라는 소규모의 저수지가 있습니다.
한성백제는 해상교통의 중심이었던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겨 해외교류가 막히자 이를 대체할 새로운 항로를 찾는야만 했는데, 한강 유역의 항로와 가장 유사한 경로가 바로 태안반도의 서산 지역으로부터 덕물도(德物島, 지금의 덕적도德積島)를 거쳐 서해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산은 중국으로 향하는 기항지이자 선진문물이 백제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바닷길로 서산에 도착한 선진문물은 다시 육로를 통해 당시 도읍이었던 웅진과 사비로 전해졌으므로 태안반도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가야산은 육로 교통의 장애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가야산 협곡의 교통로는 오히려 선진문물이 전해지는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서산은 바다를 통해 대륙의 문화를 일찍 받아들여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어 고려 이후 내포지방의 해안 고을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의 문화권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지역문화를 발전시켜 왔으며, 최근 중국과의 교류확대에 따른 이른바 서해안시대의 개막과 함께 서산의 지리적 위치는 갈수록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서산의 역사는 문화적 원형질을 간직한 마한시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산은 물산이 풍부하고 바다를 통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마한연맹체(馬韓聯盟體)의 일원으로 지금의 지곡면 일대에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3세기 말에서 4세기 중반 무렵 백제가 아산만 일대로 진출할 시기부터 백제의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였고 백제의 지방으로 편입된 것은 4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한시대의 치리국국(致利鞠國)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는 백제 중앙으로부터 사여(賜與)된 금동관모, 금동신발, 환두대도, 중국제 자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서산의 토착세력이 백제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방을 통치했던 방식으로 가능했으며, 서산이 백제의 서남해안 진출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성백제 이후 웅진백제, 사비백제를 거치면서 서산은 중국과의 해양교통에 있어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와의 해상 군사활동 접경지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백제 지방통치제도의 핵심인 방군성제(方郡城制)의 오방성(五方城) 가운데 서방성(西方城) 치소(治所)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활발히 전개된 백제부흥운동이 가야산을 경계로 내륙의 예산과 해안의 서산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가야산 일대에 꽃피웠던 백제불교와의 일정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당나라가 멸망한 백제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체제에서 지곡면 일대를 ‘오랑캐를 평정하였다’는 의미의 평이현(平夷縣)으로 불렀던 것은 서산 지역이 백제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신라 말에 서라벌의 왕족 중심의 교종(敎宗)에 반하여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는 선종(禪宗)이 유행하면서 충남의 서북부에는 보령의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크게 세를 떨쳤으며 이때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崔致遠)이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의 비문을 썼을 정도로 서산과 성주산파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습니다.
후삼국이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 서산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 속했고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직후에는 일시적으로 후백제에 귀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의 개국공신들 가운데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 등이 운산면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서산이 친고려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한편, 통일신라시기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던 서산은 고려 건국 후에는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맺으면서 불교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야산록에 자리 잡은 보원사로서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에 의하면 승려 탄문(坦文)이 말년에 가야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탄문국사가 보원사로 들어갈 때 선승(禪僧)과 교승(敎僧) 천여 명이 영접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보원사의 위세가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산은 삼남지방(三南地方)의 미곡(米穀)을 수도인 개성(開城)으로 조운(漕運)으로 수송할 때 반드시 거치는 곳으로서 고려 13조창(漕倉)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 지금의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일대)이 있었으며, 태안반도 앞바다인 안흥량(安興梁)은 조수(潮水)의 물살이 거세고 뱃길이 복잡하고 풍랑이 심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자주 침몰하였기에 고려 정부는 육지와의 거리가 짧은 서산과 태안 지역의 경계를 관통할 운하(運河)를 굴착하여 안전한 뱃길을 내고자 천수만(淺水灣)과 연접해 있는 태안읍 인평리와, 가로림만(加露林灣)과 연접해 있는 팔봉면 어송리 사이의 약 7㎞에 이르는 거리를 개착(開鑿)하여 굴포운하(掘浦運河)를 건설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서산군수 고경명(高敬命)
조선시대에 서산을 포함한 충청지역은 호서사림(湖西士林)의 근거지로 많은 사림들을 배출하였으며 초기에는 ‘향서당(鄕序堂)’으로 불렸던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사림들의 향촌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사림에 대한 훈구계의 반발로 유향소 복립운동(復立運動)이 실패로 돌아가고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겪으면서 사림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어 갔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에서는 많은 사족(士族)과 주민들이 의병에 참가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 서산 군수로 부임한 고경명(高敬命)이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서산에서 활동하면서 서산 향촌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여 임진왜란 발발 후 그의 격문(檄文)이 서산에 도착하자 많은 사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싸움터에 나가거나 혹은 군량미 조달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은 임진왜란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향촌활동을 통해 사족지배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성씨(姓氏)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문중들이 혈연 중심의 촌락을 형성하고 그들의 결속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족보편찬, 문중서원과 사우(祠宇)의 건립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서산에는 성암서원(聖巖書院), 송곡사(松谷祠), 진충사(振忠祠), 부성사(富城祠), 숭덕사(崇德祠), 모송사(慕松祠) 등이 건립되었는데 국가의 사액(賜額)을 받은 성암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중사우입니다.
성암서원(聖巖書院)은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대의 문신 사암(思庵) 유숙(柳淑)과 조선 후기 인조(仁祖)부터 효종(孝宗)대의 문신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을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유숙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절의계(節義系) 인물들을 다수 배출한 서산 지역의 토착 성씨인 서령유씨(瑞寧柳氏) 가문이며, 김홍욱은 원래 안동(安東)에 세거(世居)하다가 그의 증조부 김연(金堧)이 명종(明宗) 때 만년의 은거지로 서산을 택한 이후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서산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김홍욱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왕을 호종(扈從)한 인물입니다.
송곡서원(松谷書院)은 서산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배향한 향현사(鄕賢祠)인데, 서산에서 1694년 최초로 건립된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늦게 건립된 사액서원인 성암서원보다 격이 낮을 뿐만 아니라 ‘송곡향사(松谷鄕祠)’ ‘송곡사(松谷祠)’ 등으로 불리며 여러 성씨들을 함께 배향하는 문중사우(門中祠宇)였습니다. 처음에는 서령 유씨(瑞寧柳氏)와 서산 정씨(瑞山鄭氏)의 인물만 배향하다가 경주 김씨(慶州金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남원 윤씨(南原尹氏)도 합향(合享)하여 정신보(鄭臣保), 정인경(鄭仁卿), 유방택(柳方澤), 윤황(尹璜), 유백유(柳伯濡), 유백순(柳伯淳), 유윤(柳潤), 김적(金積), 김위재(金偉材) 등 모두 9위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충사(振忠祠)는 정충신(鄭忠信), 부성사(富城祠)는 최치원(崔致遠), 숭덕사(崇德祠)는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을 한 사람씩만 배향한 사우(祠宇)로서 이들도 서산의 입향조(入鄕祖)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동학(東學)이 성행하다
한편 19세기 들어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피폐한 농민들이 고통을 여의기 위한 안식처로 종교를 받아들였는데 내포지역의 개방적인 주민성이 기폭제가 되어 천주교와 동학(東學)이 무척 성행하였으며, 중앙정부에서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들 종교를 억압하였고 그 결과 1868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등으로 3,0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산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해미성지 등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서산의 주민들 대다수는 지주층과 관료층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는 농민들로서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전쟁에 북접농민군으로 적극 가담하여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일본군·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려, 전쟁 초기에는 태안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서산·해미를 장악하였으나, 관군과 현대화된 일본군의 화력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궤멸되었습니다.
서산 지역에는 서산군(瑞山郡)과, 정해현(貞海縣), 여미현(如美縣)을 합친 해미현(海美縣)의 두 곳에 읍치구역(邑治區域)이 있었는데 서산군의 읍치구역은 주산인 부춘산(富春山) 아래 있으며 읍성(邑城), 객사(客舍), 관아(官衙), 향교(鄕校) 등이 남아있고 해미현의 읍치 구역은 주산인 가야산의 정상으로부터 그 맥이 흘러 상왕산(象王山), 문수산(文殊山) 등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 산줄기 아래 있으며 읍성과 관아건물 그리고 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서산읍성은 여말 선초에 축조된 대부분의 읍성이 그러하듯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1452년(문종 2)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의 건의에 의해 석성(石城)으로 축조되었는데 성벽의 둘레는 1,200m,이며, 높이는 3~3.9m로 거의 평지에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남북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작은 시냇물이 성내로 흘러들어 왔다고 하며 성안에는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곡성(曲城 성벽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구부러지게 쌓은 성), 동, 서, 남의 성문(城門), 우물, 창고, 그리고 객사와 관아에 딸린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산읍성은 서쪽은 명림산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으로는 봉화산, 부춘산, 옥녀봉 능선이 병풍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시가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나 지금은 성벽 안에 서산시청이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서산시청의 담장처럼 보이는데 성곽은 도로건설과 함께 민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120m 정도뿐입니다.
왜구 침입 방어한 해미읍성
서산객사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서산시청에 남아 있는 외동헌(外東軒)과 관아문(官衙門)의 기법과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함께 세워진 건물로 보이며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 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상징인 궐패(闕牌)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청(政廳)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이 머물렀던 좌우 익실(翼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령관아(瑞寧官衙)는 조선시대 서산군의 관아로 객관(客館), 동헌(東軒), 누정(樓亭)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관아문(官衙門)과 외동헌(外東軒)만 남아 있으며 조선 고종 4년(1867)에 당시 서산 군수 오병선이 다시 지은 것으로, 오병선은 대원군 섭정 때 복원한 경복궁과 경회루 공사를 총지휘했던 사람이며, 서령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붙여진 서산시의 옛 지명인 '서령부(瑞寧府)'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서산향교는 1406년(태종 6)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1415년(태종 15) 유백유(柳伯濡)가 지은 서산향교 창건시(創建詩)에 의하면 군수 조종생(趙從生)의 재임 시절(1412~1415)에 격식을 갖춘 향교가 건립되었다고 하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은 남아 있지 않고 강학공간인 명륜당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거느리고 있으며 높은 석축과 계단 위로 내삼문을 세워 그 안에 배향공간인 대성전이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거느리고 공자(孔子)를 비롯한 5성(五聖)과 송조2현(宋朝二賢), 그리고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서산향교에는 수령 약 500여 년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1574년 서산향교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올 때 심은 4그루의 은행나무 중 한 그루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1416년(태종 16)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이 덕산(德山)에서 서산으로 옮겨진 뒤, 1652년(효종 3)에 청주(淸州)로 옮겨 가기 전까지 약 230여 년간 군사권(軍事權)을 행사하던 곳으로, 왜구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세운 거점성(據點城)인데 해미가 새로운 병영지로 선택된 이유는 이산(伊山), 순성(蓴城), 남포(藍浦) 3진(鎭)의 중간 지점에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사전략에서 수도방비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병영이 청주로 옮겨졌고, 읍성에는 해미현의 관아가 옮겨졌으며 본래는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라 부르던 것을 이때에 해미읍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고, 성의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다 하여 달리 ‘탱자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면적은 19만 4102.24㎡이며, 둘레는 약 2,000m로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內托)되었고 성문(城門)은 주 출입구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동문, 서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어사(御舍), 교련청(敎鍊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백제의 미소’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
해미향교(海美鄕校)는 건립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 초 각 지방의 군현에 일제히 향교들이 건립된 1407년(태종 7)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해미향교도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外三門) 없이 곧바로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거느린 명륜당이 있고, 8개의 계단위에 세워진 내삼문(內三門) 안에 5성(五聖)과 송조4현(宋朝四賢), 그리고 동국18현(東國18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이 있습니다.
상왕산 기슭의 보원사지(普願寺址)는 서산마애삼존불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로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 법인국사탑, 석조(石槽) 등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여러 시설물들은 고려 초 광종 때 가람 경영의 산물일 것으로 생각되며 그 중심에는 광종대에 왕사와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보원사 터는 기본적으로 고려 초의 가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절이 처음 창건된 시기는 백제 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절터의 위치가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서 백제 시대의 금동불이 발굴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된 마애불(磨崖佛)로서, 중앙의 소탈한 모습의 본존불상과, 좌우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보살입상은 일반적인 삼존불상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의 파괴, 즉 초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박한 새김기법과 자유로운 불상의 배치는 백제인들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엿볼 수 있고 마애불의 순박하고 푸근한 미소에서는 시종일관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철학이 묻어나는 것 같아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백제인들의 진취성과 역동성, 그리고 포용력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백제의 미소’라는 말은 한국 역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고(故) 김원용 박사의 저서 <한국미의 탐구>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서산마애삼존불이 갖고 있는 ‘온화하고 고졸한 미소’와 ‘형식의 파격’은 ‘백제다움’을 나타내는 이미지로서 공감하게 되어 비로소 ‘백제의 미소’가 서산마애삼존불을 가리키는 별칭이 된 것입니다.
개심사(開心寺)는 북쪽에 있는 상왕산과 남쪽에 있는 가야산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서쪽 산록에 위치하며 654년(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여 1350년(고려 충정왕 2년)에 처능대사(處能大師)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웅전은 산불로 소실(燒失)된 것을 백제시대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아름다워 건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심검당과 종각은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오르는 길에 규격화된 돌계단을 시설하지 않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의 고향
광해군 11년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湖山錄)>에 의해 출신지가 서산시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은 조선 초기 산수화풍을 창출한 한국화의 대가로 신라의 솔거(率去), 고려의 이녕(李寧)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로 손꼽힙니다.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현존하는 작품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탁을 받고 단 3일 만에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뿐입니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설천도(雪天圖)>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의 <산수도(山水圖)> <설강어인도(雪江漁人圖)>와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소장의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근역화휘(槿域畫彙)> 속에 있는 <산수도> 잔편 등도 안견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견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기에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에 많은 수를 차지한 북송(北宋)대의 화가로 삼원법(三遠法)을 창안한 곽희(郭熙)의 화풍을 접할 수 있어 그 화풍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 산수화, 초상(肖像), 화훼(花卉)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습니다. 안견기념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의 유품이라고 전해지는 <적벽도>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 등 모사품(模寫品) 18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기념비에는 <몽유도원도>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고을학교 제9강은 6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해미IC(09:00)-해미읍성-해미향교-해미순교성지(10:00)-개심사(11:00)-서산마애삼존불-보원사지(13:00)-점심식사 겸 뒤풀이(고향가든,14:30)-서산읍치구역(서산향교/서산객사/서령관아문/동헌,16:00)-성암서원(16:30)-안견기념관(17:30)-서울(19:30예정)의 순입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점심식사가 늦어지니 꼭 준비),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9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입장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고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 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 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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