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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쿠데타'와 민주주의의 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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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쿠데타'와 민주주의의 퇴행

[주간 프레시안 뷰] 아시아의 민주국가 태국은 왜?

지난 5월 20일 새벽 태국의 군부가 기습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00년도 더 된 태국 헌법에는 군이 정부의 승인 없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나라 법으로는 어쨌든 합법적인가 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쿠데타 성격이 강합니다. 태국의 군부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태국에서 군부는 그 자체가 강력한 정치세력입니다. 1932년 태국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끝낸 것도 군부이고, 지금도 군부가 기득권에 속하는 세력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군부가 민주적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정부의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면 쿠데타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총칼로 민간정부를 무너뜨리고 얼굴마담을 내세우거나 군부 실세가 직접 최고지도자에 오르는 게 쿠데타라면, 정치의 중심에 군부가 등장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태는 '소프트 쿠데타'라고 표현도 하는 모양입니다.

▲ 태국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 ⓒ연합뉴스

그런데 '소프트 쿠데타'라고 하니 지난해 7월 이집트에서 군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축출하고 과도정부를 내세운 사례와 비교가 됩니다. 이집트 군부는 최고 실세가 당선이 확실시되는 후보가 되도록 정국을 다진 뒤 5월 말 있을 대선에서 승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경우, 호스니 무바라크라는 독재자가 군부를 등에 업고 40여 년간 철권통치를 휘둘러온 곳이고, 민주적 선거를 제대로 해본 경험도 없는 곳이니 '소프트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요. 태국의 경우는 언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집트조차 군부 실세가 군복을 벗고 어떡해서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권을 잡으려고 하는데, 태국에서는 야권이 된 기득권 세력이 선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지난 5월 7일 기득권 세력이 장악한 헌법재판소가 태국의 최고지도자인 총리를 전격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법 쿠데타'죠.

반정부 세력이 당시 잉락 친나왓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잉락 총리가 조기 총선을 타협책으로 내놓고 버티자 헌법재판소가 나서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총리를 해임해 버린 것입니다. 2월에 치른 조기 총선은 반정부 세력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무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시 정부가 7월에 총선을 하자고 했는데, 총리 해임으로 사실상 7월 총선은 물 건너갔습니다.

지난해 11월부터 반정부 시위를 벌여온 야권은 총선 자체를 거부하면서 총리뿐 아니라 내각이 총사퇴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래도 시기가 문제일 뿐 야권이 선거 자체를 끝까지 거부하지는 못할 것으로 기대한 친정부 세력도 '사법 쿠데타'로 총리가 해임되자 행동에 나섰습니다.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의 충돌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 국가에서 보면 태국의 정치적 분열은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반년 사이에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습니다. '사법쿠데타' 이후 친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정면 충돌하면서 지난 2010년 92명이 사망하고 1700여 명이 부상당한 사태보다 악화될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군부는 계엄령 선포의 명분으로 '법과 질서 유지', '평화와 안정 유지' 등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군부가 정치적으로 중립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들이 많습니다.

군부가 계엄령 선포 즉시 친정부 민간 방송국을 접수한 것이나, 특히 군부 최고 실세인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60)은 현 정부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에 속하는 왕정주의자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태국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지난 2006년 9월 19일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국 76개 주에 계엄령을 선포한 바 있는데요. 이번에 '사법 쿠데타'로 축출된 잉락 친나왓 전 총리의 오빠 탁신 친나왓이 총리일 때도 쿠데타로 정권 교체를 주도했습니다.

사회 모순 앞에 초라해진 민주주의

태국 군부는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11차례나 '성공한 쿠데타'를 주도한 전력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혼란이 극심할 때 군부가 일시적으로 수습에 나서고, 가급적 민주적 질서로 복귀하는 것을 돕는 역할에 그친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면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태국 정부는 군부의 계엄령 선포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7월로 예정돼 있던 총선을 다시 8월 3일로 늦추자는 제안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야권은 탁신 진영에 속하지 않은 임시 총리를 임명하는 등 최대한 선거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총선에 응할 뜻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태국의 경우는 민주주의가 역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태국 군부는 자기가 지지하는 기득권 세력이 정권을 쥐고 있을 때는 정부 편을 들어 반정부 세력을 진압하고, 기득권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한 경우는 친정부 시위를 억압하고 반정부 시위에는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군부가 자기편이어서인지 야권이 된 기득권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내건 요구는 반민주적입니다. 총리를 축출하고도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과도정부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고, 총선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 고약한 점은 기득권 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는 민주적 선거 제도를 인정하다가 이제는 "태국에서 민주적 선거는 시기상조"라고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기득권 세력이 선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입장을 바꾸게 된 사연은 어떤 것일까요?

이처럼 태국에서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작동하지 못하게 된 배경은 아이러니합니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형태로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훨씬 전인 1897년 남녀가 지방선거에서 동등한 투표권을 가질 정도였는데요. 미국이 투표권의 성차별을 폐지한 수정헌법보다 20년 앞선 것입니다. 그만큼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로 꼽히죠.

문제는 민주주의 제도의 형식은 도입됐지만 기득권세력과 서민세력이 나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은 계속 곪아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지난 2001년 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업가로 꼽히는 탁신 친나왓이 서민층에 대한 포퓰리즘 공약으로 지지를 끌어낸 이후 서민층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했고, 시간이 갈수록 탁신 세력은 오빠에 이어 여동생 잉락이 총리에 오를 정도로 난공불락이 되었습니다. 2001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탁신 세력'이 승리해 왔습니다. 태국의 야당은 선거로 이길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전통적인 기득권층은 "태국은 민주주의보다는 차라리 왕의 신임을 받아 대리 통치하는 시스템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로 대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반적으로 야권이 민주적 선거를 주장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태국은 정반대의 상황인 된 것이죠. 야권은 선거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자, 현재의 정권이 나라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민주적 선거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아니면 ' 탁신 세력'이 지배하는 과도정부 자체가 퇴진하는 등 선거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태국의 사태는 나라가 더 잘살게 되어도 불평등과 분열이 극심한 사회는 민주주의 자체가 언제든지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총선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부하는 반정부 시위대 지도부의 명칭이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라는 점이 보여주듯 태국의 민주주의는 시대를 역행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를 비롯해 미국·유럽연합(EU) 등 40여 개국이 태국의 정정 불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민주주의와 법의 원칙에 맞는 평화적 위기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시민들의 '민주항쟁'으로 얻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을 국제적으로 듣고 있으니 자기반성부터 먼저 해야 할 형편이 아닐까요.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 창간 이후 조합원 및 후원회원 '프레시앙'만이 열람 가능했던 <주간 프레시안 뷰>는 앞으로 최신호를 제외한 각 호를 일반 독자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 내려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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