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이 말은 대개 부정적인 상황에서 혀를 끌끌 차며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바꿔 생각하면 누군가의 재능이나 장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 문장을 중심에 놓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을 보면 후자의 해석을 지지하고 싶어진다. <개과천선>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이가 최희라 작가이기 때문이다. 2010년 SBS <산부인과>, 2012년 MBC <골든타임>, 2014년 <개과천선>, 단순명료한 제목들처럼 닮은 구석이 많은 이 세 작품은 모두 최희라 작가가 썼다. 그리고 모두 탁월한 직업 장르물이다.
<개과천선>의 김석주(김명민)는, 무죄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소송은 피할 수 없으면 이기는 것”이라 믿고 실천하는 변호사다. 그의 뒤에는 단순히 거대 로펌일 뿐 아니라 정계‧재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관련법이 없으면 법을 만들어서라도 이길 수 있는 차영우펌이 있다. 명백한 강간 사건도 김석주가 피의자를 변호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수조 원의 보상금이 발생할 기름 유출 사건도 김석주의 기획에 의해 5%만 보상해도 된다. 어처구니없지만 법이 그렇단다. 아니, 정확히 말해 김석주의 변론에 의해 구성되고 설득되는 법이 그렇다.
이처럼 김석주는 누군가에게는 1심에서 패소한 사건도 뒤집어줄 수 있는 에이스 변호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강간을 당하고도 합의를 할 수밖에 없고, 생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잃고 억울함에 투신 시위를 할 수밖에 없게 내몬 천하에 다시없을 나쁜 놈이다. 어쨌든 아주 유능한 인물이다. 최희라 작가는 이 점만은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도록 <개과천선>을 쓰고 있다. 성실하고 집요한 취재를 바탕으로 극을 쓰고 스스로도 직업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희라 작가의 장점이 변하지 않고 세 번째 작품에도 이어지고 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개과천선>에서 효과적인 설정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변호사였다니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겠지’라고 생각하는 김석주의 말에 차영우펌의 인턴 이지윤(박민영)은 당황해 사레가 걸린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도움이 다른 누군가의 피눈물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산부인과>나 <골든타임>의 의사와는 처지가 다르다. 의사는 누군가를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고, 그의 일이 다른 누군가의 피해를 담보하진 않는다. 하지만 소송은 대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싸움이고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의 직업윤리는 사회 보편의 윤리나 상식, 여론과 충돌하곤 한다.
물론 메디컬 드라마의 클리셰 중 하나처럼 의사도 경찰과 범인 중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와 같은 딜레마 상황과 맞닥뜨릴 순 있지만, 일단 범죄자라도 심장이 멈추면 제세동기를 사용해 살려야 한다. 그래서 범죄자를 살린 의사와 그를 무죄로 만든 변호사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비난의 성격은 다르다. 한편 의뢰인을 위해 일한다는 변호사의 직업윤리는 흥미로운 상황을 가능케 한다. 즉 기억을 잃고 ‘개과천선’한 것같이 행동하고 있는 김석주가, 강간 피의자의 변호사였을 당시 피해자였던 정혜령(김윤서)이 살인 피의자가 되자, 이번엔 그녀의 변호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최희라 작가는 무브먼트도 좋은 돌직구를 던지는 투수를 연상시킨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눈치 보지 않고 하되, 풍부한 취재로 디테일을 살리기 때문이다. <개과천선> 역시 불필요하게 상황을 꼬거나 러브라인을 만사형통의 꼼수로 쉽게 쓰지 않지만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다. 에이스 변호사와 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주도면밀한 차영우 대표(김상중), 아직은 정의를 믿고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은 인턴 이지윤은 물론, 차영우펌의 다양한 구성원들과 법원에서 마주치는 검사, 판사 등을 통해 법조인이라는 전문가 집단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그리고 같은 직업군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라도 각 개인이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다.
기억상실이라는 소재가 식상한 도구로 낭비되지 않는 것도 <개과천선>의 장점이다. 돈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 일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늘 당당했던 김석주다. 그런 그가 사고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내면의 고민이 아니라 불가항력의 변화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야 하는 이 상황을, 수많은 적을 만들며 살아온 아주 똑똑한 남자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기억상실로 업무 내용을 복기해야 하는 김석주의 상황이,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소송 과정을 주변인의 설명이나 플래시백으로 차근차근 풀어주어 시청자의 이해를 돕는 효과도 있다.
기억을 잃고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라며 오열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을 수습하는 김석주의 모습과 변화가 큰 인물을 편안하게 연기하는 김명민은 <개과천선>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닮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호들갑 떨지 않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한다. 강압에 의해서도 통렬한 반성에 의해서도 아니라 단지 몰라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석주가 앞으로 기억을 찾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의 변화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극적이되 자극적이지 않은 묘한 드라마라서 앞으로가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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