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1.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는 일의 연쇄라고 답하겠다. 다니구치 지로의 <개를 기르다>(박숙경 옮김, 청년사 펴냄)의 표제작은 아이가 없는 부부가 기르던 개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15년의 생을 마감하기 한 달 전, 걸을 힘도 먹을 힘도 잃은 늙은 개가 얇고 긴 신음만을 마지막 남은 숨의 한 조각처럼 붙들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개를 기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그러니 신중히 생각하라는 교훈을 얻으려는 건 아니다. 그 역시 소중한 교훈이지겠지만, 나는 작품에서 아주 잠깐 보여줄 뿐인, 부부가 개를 기르기로 결심한 15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젊은 부부였던 이들은 그들보다 짧게 살도록 설계된, 그래서 살아 있는 자기들을 남겨두고 갈 것이 뻔한 개를 기르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를 견디기로 한다. 그 구체로 인한 몸과 마음의 수고와 큰 고통이 될 언젠가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그 개'를 관계 속으로 들인다. 그리고 개와 개가 있었던 시간들에 책임을 진다. 책임질 무엇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가지 못한다. 혹은 그런 것을 삶이라 부르지 않는다. 개는 그들을 살게 했다.
2.
"책임감이란 게 대단한 구속력 있는 거 아니잖아요? 다만 "한상균 그 사람은 무슨 책임감을 가지고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면 어떤 미사여구로도 담지 못하는 가슴의 단어들은 있겠지요. 이것들은 끄집어내 보일 수는 없고 섣불리 저울로 달 수도 없는 거겠지요. 제 입장에선 누구보다도 책임감의 굴레가 셉니다. 한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170쪽, 한상균)
5년 전 어제 시작된 옥쇄파업에 참가했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도 책임을 지려고 했다. 가족들에, 살아온 시간에, 자신이 없으면 안 되었던 자동차 공정에, 그 완성품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배신감과 두려움을 오가는 동료들에, 그리고 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정혜윤의 <그의 슬픔과 기쁨>(후마니타스 펴냄)은 그들이 선택한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 책임의 연쇄, 즉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 곁에 있었던 사람들, 책에 써져 있는 것의 '구속'으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지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파업의 맥락 속에서 '산 자'는 아픈 말이었지만, 본디 의미에 다가서자면 이들은 누구보다 살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안인희 옮김, 돌베개 펴냄)은 '삶을 살지 않은' 한 남자에 대해 말한다. 이 책 첫 장에 붙은 제목은 '생애'이지만 우리는 삶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을 만나게 된다.
"히틀러는 그 어떤 직업을 가진 적도, 구하려 애쓴 적도 없다. 오히려 직업을 구해야 할 때마다 피해버렸다. 직업을 꺼리는 성향은, 결혼을 꺼리고 친근한 관계를 꺼리는 그의 성벽만큼이나 눈에 띄는 점이다. (…) 뒷날에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지도자(=총통)였다." (32쪽)
이 책들을 통해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가? 삶을 살고 있는가? 끝까지 책임을 지려 하는가?
하지현(건국대학교 교수·신경정신과 전문의) : 뉴스를 볼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칠 일만 있는 요즈음이다. 세월호 사건, 지하철 탈선, 구원파의 기기묘묘한 종교와 사업의 결합, 청와대의 난형난제의 인선, 지방선거에 나온 후보자의 반 가까이가 전과자라는 현실 등등. 분노를 느끼기에도 에너지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사안이 많아서 허탈할 뿐이라는 마음이 든다.
이럴 때 한 번 들춰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은 <분노의 숫자-국가가 숨기는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동녘 펴냄)다. 우리나라의 불평등, 청춘의 실업률, 임시직 노동자의 비율, 과중한 근로시간, 성별 임금 격차와 남녀 차별, 일하는 여성의 가사노동, 가계부채, 부동산 문제, 노인 문제 등에 대해 감정적 울분을 토하는 대신 통계자료라는 객관적 숫자로 냉정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각각의 주제마다 세심하게 만든 일러스트는 한 눈에 통계자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돕고 있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역시 화가 난다. 그러나, 이때의 분노는 차가운 분노다. 이성적으로 차곡차곡 다져진 분노.
이정모(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 요즘 대학생들에게 부러운 걸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서로 만지며 뽀뽀하는 행위를 용납하는 사회 분위기와 학교에서 제공하는 글쓰기 수업이라고 대답하겠다. 나도 나름 글쓰기로 먹고 살지만 단 한 번도 글쓰기를 배워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도 이 모양이다. 혹자는 얘기한다. 글쓰기 수업이 별 것 있냐고. 많이 읽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본인은 그렇게 글쓰기 능력을 획득했는지는 몰라도 딴 사람도 그렇게 될 거라고 단정 짓지는 마시라.
그러면 당신은 글쓰기 수업 시간에 뭘 가르쳤냐고 물으실 독자가 계실 거다. 나머지 하나 '구성'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다양한 전략이 있다. 나는 그냥 도식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덕택에 술집에서 저자에게서 받은 책에 근사한 비유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면 이렇다.
"큰 돌은 글의 주요 내용이고 작은 돌은 주요 내용을 자세하게 해설하거나 예시 따위를 덧붙이는 것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큰 돌과 작은 돌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 추상적 개념이든 구체적 사실이든 글의 논지를 펴나가는 데 근간이 되는 것들이 큰 돌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작은 돌이라고 할 수 있다. (…)
큰 돌 방식의 글쓰기는 구성이니 논리의 흐름을 잡을 때 큰 돌에 해당하는 의미 덩어리를 먼저 골라내는 것이다.
그 덩어리는 논리로만 혹은 이야기로만 구성되기도 하고 논리와 이야기가 섞여 있기도 하다. (…) 양동이에 큰 돌을 쌓듯이 덩어리를 놓으면 된다. 큰 돌 놓기가 끝나면 작은 돌을 그 틈 사이에 적당히 부으면 된다." (<글쓰기가 처음입니다>(백승권 지음, 메디치 펴냄) 91~92쪽)
내가 대학 글쓰기 수업 강사라면 교재로 쓰고 싶은 책이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나는 그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기 전부터 그의 책을 접했었다.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해준 출세작은 <남자의 탄생>(푸른숲 펴냄)인데, 2003년에 나왔고, 그 무렵 나도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창 주목받기 시작한 직후, 2005년 8월 1일, 그는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학자 전인권이 그랬다는 것이다. <1898, 문명의 전환>(전인권‧정선태‧이승원 지음, 이학사 펴냄)은 그가 남긴 원고 및 기획을 살려 만든 여러 유작들 중 하나다.
하나의 진리가 있고 그것은 중국으로부터 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 중국의 고전으로부터 왔다. 성경으로부터 진리가 솟아나던 서양의 중세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데 순식간에 열강들 앞에 놓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세속의 나라'로 전환해야만 했던 시점이 바로 개화기 무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평이한 소리지만, 전인권의 책이 대체로 갖는 장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이야기를, 놀라울 만큼 솔직하고 진지하게 풀어내는 힘 말이다.
나는 어떤 원고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묘한 감흥이 들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인권이라는 학자가 지니고 있는, 어쩌면 '비학술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이명현(천문학자) :
"그 호숫가 한편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로버트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인 빌 게이츠의 저택 건설 현장이다. 그 건물의 75%는 지하 공간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경치가 좋은 호반에서 굳이 지하로 들어가려는 까닭을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기사 그동안 그보다 더한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의 기이한 행동으로 충격을 받은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창조의 신비와 세상의 고통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하게끔 해주는 영성의 외향적 표현인 신앙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인간의 지성적 소양이 아무리 높이 쌓아 올려지고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두텁게 쌓여간다고 해도 신앙,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오직 고립과 절망만이 있을 뿐이며, 인류는 영원히 단절된 고리로써 남게 될 것이다."
오호! 스티븐 호킹이 자서전에서 제인과 이혼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해 놓은 것이 있다. 호킹의 건강 악화에 불안을 느낀 제인이 결혼 생활이 진행되던 중에 아이들과 자신을 돌봐줄 다른 남자를 선택했고, 나중에는 그 남자를 호킹과 제인의 살림집에 불러들여서 호킹 가족과 그 남자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으며, 결국 호킹과 제인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인이 자신의 책에 써놓은 이 구절을 보니 그들의 파국이 단순한 불륜의 문제는 아니었나보다. 이제 <스티븐 호킹, 천재와 보낸 25년>의 본문을 읽어봐야겠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지난해 조금 비는 시간이 생겨서 국립중앙박물관을 몇 번 찾아갔었다. 날씨 좋은 날, 바로 옆에 있는 용산가족공원까지 한데 묶어서 산보하기 좋은 곳이다. 사실, 너무 잘 가꿔져 있어서 편하게 어슬렁거리기는 좀 부담스럽다. 지나치게 크고 인공적이랄까.
그렇게 돌아다니다, 내가 딱 꽂힌 것은 철제 갑옷과 마구를 갖춘 가야 무사의 모형이었다. 금관가야가 있던 땅, '김해(金海)’. 우리말로 풀면, '철의 바다’가 된다. 그만큼 가야에선 철이 흔하고, 제철기술이 뛰어났으며, 철기 무역이 활발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가야는 왜 소국 연맹체에 머물렀을까. 어릴 때 국사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더듬기 시작했다.
달리 생각해보면, 경제와 기술이 발달해서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으면, 굳이 강력한 중앙권력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도 될 듯했다. 숱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정복전쟁을 벌일 만큼 강력한 중앙권력이 나온 배경에는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절망과 굶주림이 있다는 뜻도 될 게다. 그렇게 보면, 국사 시간에 자랑스럽게 배웠던 강력한 정복군주, 예컨대 광개토대왕이나 진흥왕이 꼭 자랑스럽지만도 않다.
강력한 철기와 약한 권력이라는 대비가 꽤 강렬해서, 혼자 한참동안 생각을 했더랬다. 마침 시간도 좀 생긴 김에, '가야'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고 마음도 먹었다. '쇠'와 '활'의 대립이라는 이미지를 머리에 담고 쓰기 시작했는데, 딱 10페이지 쓰고 멈춰버렸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무렵, 가야 역사에 관한 책을 몇 권 들춰봤다. 그때 읽은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소개한다.
"가야는 작은 나라였다. 넓은 영토, 강력한 지배, 화려한 문화, 탁월한 영도력 등 우리가 은연중 역사적 미덕으로 삼고 있는 요소들과는 거리가 멀다.
(…) 가야는 그 작았던 실체만큼이나 만만한 존재이기도 해서,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쉽게 감염시키기도 했다. 신라중대에 이미 불교적 색채로 가야 일부분을 채색하였으며, 8세기 초 일본에서는 천황주권 아래 가야를 재편해버렸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임나일본부설'로 식민사학의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다. 심지어 1980년대 말에는 기독교와 가야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황당한 견해까지 등장하였다.
(…) 가야사를 무리하게 강조하는 이면에는 은연중 힘의 논리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으며 작고 약한 실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깔려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크고 강건한 것만이 미덕이 아니다.
(…) 가야는 저들 나름대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공동체였다. 다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 감각과 그에 부응하는 힘을 기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독특한 물질문명과 가치관, 내부 운영질서, 부정할 수 없는 자체 오류와 모순까지 차분하게 관찰하면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역사의 주체가 민중에게 넘어온 지 오래지만, 여전히 영웅주의·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 역사 속 작은 실체로 존재했던 가야의 본모습을 조용하게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야인의 삶과 문화>(권주현 지음, 혜안 펴냄)이라는 책의 머리말 가운데 일부다. 내가 소설 습작을 하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주 명료하게 정리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 습작을 또 접었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내가 가장 열광하는 시공간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이다. '진보'가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던 시대, 광기와 몽상과 독단과 허영이 자기 몫을 다하며 조금만 손을 뻗으면 새로운 영역으로 마음껏 달려 나갈 수 있었던 시대.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펴냄)의 1부 '비상의 죄'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내 심장은 마구 뛰었다.
하지만 2부 '평지에서', 3부 '깊이의 상실'로 넘어가면서, 각 챕터마다 되풀이되는 주문,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의 의미는 완연히 달라진다.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 비상했던 이들은, 높이와 깊이의 신세계에 눈멀었던 이들은 어느 순간 반드시 평지로 추락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랑의 은유이기도 하다. 줄리언 반스 그 자신이 30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아내 팻 캐바나를 뇌종양으로 잃고 난 뒤 느낀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추락의 시점에서, 우리는 구름 위로 올라가며 새로운 시각 이미지를 발견하며 흥분했던 19세기 사람들과 또 다르게, "느낌과 고통만 있을 뿐, 다른 어떤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지형에 들어선다.
"'상실의 사막' '(무풍지대인)무심의 호수' '(말라서)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동굴' 등을 표시한 17세기 지도와 흡사한 그 지도에서 당신은 당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두 존재가 하나로 합쳐지고, 그중 하나가 먼저 사라지는 순간, 그 빈자리는 단순히 1만큼의 상실이 아니다.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과 사랑과 분노의 총합은 훨씬 크다. 추락한 후의 인간은, 누구나 겪게 되지만 누구나 똑같을 순 없는 낯선 상실감과 비탄의 지도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생은 어느 시점에 달하면, 상실의 지점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뤄진다. 지금껏 만났던, 읽었던, 기억했던, 획득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그 소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그에 대한 가장 사려 깊고 아름다운 책이자,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성숙하고, 마음을 울리며,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다. 진심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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