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현대중공업에 대한 묘사는 대개 그곳이 얼마나 드넓은지에 대한 서술로 시작한다.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15배 크기에 달하는 부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608만1000제곱미터 땅 곳곳에 놓인 각종 육중한 기계와 철판들. 세계 1등 조선소 그룹의 역동적인 수출 산업 현장. 보통 이런 식이다.
그런 묘사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14일 오전, 조선소 한복판을 들어서니 오로지 육중한 기계와 선박, 건물들만 눈에 들어왔다. 360도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성인 남성 키의 최대 60배에 달하는 높디높은 크레인이 먼저 보인다. 어느 SF영화의 외계인 침공 장면과 닮았다.
그러나 가만가만 보면 '기계'가 아닌 '사람'이 보인다. 점심 때가 되니 무채색 작업복에 쇳가루와 먼지를 잔뜩 묻힌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철판 아래, 크레인 뒤에, 건물 안에, 선박 위에도 사람이 있다. 화려한 외형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조선소의 노동자들이다.
컴컴한 비바람 속에 일하다 사고…"하청이라 벌어진 일"
차를 타고 장시간을 더 달려 조선사업부 2야드 4안벽 근처에 도착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의 눈엔 길이가 200미터를 훌쩍 넘는 LPG 수송선만 보이겠지만, 사실 이곳은 지난달 28일 하청 노동자 김 모(38) 씨가 바다에 빠져 숨진 장소이기도 하다.
김 씨는 300톤 급 트랜스포터 차량 신호수로 일했다. 거대한 선박 블록을 옮기는 트랜스포터는 그 덩치가 워낙 커 신호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함께 이동하며 운전수를 돕는다. 김 씨는 사고 당일 오후 8시 50분께 이곳에서 한 손으로는 자전거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신호를 하며 안벽을 등진 채로 뒷걸음질을 치다 바다에 빠졌다.
"비바람이 불고 깜깜하니까. 바다 색하고 바닥 색이 구분이 잘 안 됐을 거예요. 그러니까 밤엔 일을 안 해야 하는 거지요. 보세요. 난간도 없잖아요."
현장에서 만난 한 정규직 노동자가 사고를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하청 (노동자) 이니까 죽은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규직들은 그런 상황에서 일 안 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소는 야간에 일 안 해요. 물량을 제때 맞춰야 하는 하청만 안전 무시하고 사람을 넣는 거죠. 하청이니까 위험해도 '일 하지 말자'는 말도 못 하는 거고요."
두 달 새 8명 사망…"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조선소가 사고가 잦은 곳이라지만, 그리고 대체로 사고로 다치는 사람은 하청 노동자라지만 최근 현대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심상치가 않다. 두 달 새 현대중, 현대삼호, 현대미포에서 7건의 사고가 터졌고, 8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이렇게 비극적인 사고가 잇따르는 것이 '우연'이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정규직 노동자들, 하청 노동자들은 물론, 고용노동부 또한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최근 조선소들이 물량이 많아져 생긴 일로 보고 있다. 앞으로도 사고가 더 날 수 있어 주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과 관계자)
여기서 '물량이 많아졌다'는 말의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물량을 빠르게 밀어낸다'이다. 경기가 안 좋았던 2~3년 전, 국내 조선업체들은 너나없이 저가 수주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 최근 환율 하락새까지 겹치자, 수주할 때 돈 받고 철판 깔 때 돈 받고 진수할 때 돈 받는 조선업체들로선, 빠르게 물량을 밀어내야 할 유인이 커지고 있다.
이럴 때 조선업체들이 쓰는 방법은 하청 노동자 대거 투입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회사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4월 기준 3만9700여 명의 하청 노동자가 548개 업체에 속해 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약 8000명이 늘어난 숫자다.
노조의 김형균 정책실장은 "(하청 노동자 수가) 완만히 늘어나면 관리가 되겠지만, 이렇게 급격히 늘어나는데 관리가 되겠느냐"며 "안전 교육을 비롯한 인력 관리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고 설명했다. "연말까지는 저가 수주 일감이 이어질 거라,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중대 재해 사고도 계속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분석도 덧붙였다.
몇 명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하청 노동자들 중에서도 특히 위험에 크게 노출되는 이들은 이른바 '물량팀'이다. 이들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다. 주로 단순·반복 작업이 필요한 일감을 하청업체들로부터 받아, 맡은 일만 처리하고 빠지는 10~15명 규모의 단기 공사 팀이다.
이런 물량팀의 규모를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노조의 김 실장은 "최근 현장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 늘어나고 있다"며 "회사가 노동조합에 통보하는 통계에도 물량팀 규모는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며칠 일하고 나갈 사람인데 안전 관리를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의 하창민 지회장도 비슷한 설명을 했다. 하 지회장은 "물량팀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가짜 출입증으로 정문을 통과해 일을 하고 있다"며 "안전 교육을 안 받았음은 물론, 근로계약서를 안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관리가 될 리가 없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도 가짜 출입증 문제를 당연히 알고 있어요.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묵인하는 거지요. 물량팀이 들어와 빨리빨리 일을 치고 가주면, 그게 다 돈이 되는 거니까…. (지난달 21일에 LPG 선에서) 화재사고 났을 때도 그 배 안에 정확히 몇 명이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됐어요. 누가 사고를 당했는지를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리는 거죠."
'이윤 극대화' 전략이 만든 딜레마
현대중공업 측은 "가짜 출입증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물량팀 규모와 작업 내용을 파악하고 있느냐'는 질문엔 "그런 추궁은 받을 필요가 없다. 파악도 못 한다며 문제 삼지만, 파악해서 관리하고 있다고 하면 '위장 도급'으로 문제 삼을 것 아니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더 많은 사고를 당하는 것은 경험이 적기 때문"이라며 "정규직이 더 안전한 곳에서 일하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더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일은 똑같은 걸 하는데 숙련도가 달라 한쪽만 사고를 겪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현대중 역시 문제의 본질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내하청을 통한 생산은 필연적으로 안전 관리의 사각지대를 만든다. 이 사각지대를 없애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위장도급'이란 문제로 이어진다. 현대중 스스로 '이윤 극대화'를 위해 이 딜레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가만히 있으라…"세월호와 다를 것 없는 현대중공업"
원리·원칙적으로는 환율이 어떻든 수주 가격이 어떻든, 생산 현장이 안전하게 운영돼야 한다. 다른 여건에 따라 현장의 안전 수준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은, '안전 관리 체계가 붕괴해 있다'는 것에 다른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붕괴한 안전 관리는 어디서부터 세워야 할까. 현대중이 발표한 대로 3000억 원의 예산을 안전 경영에 투입하면 안전 관리 사각지대의 물량팀 및 하청 노동자들이 지금보단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될까.
하창민 지회장은 이와 관련, "노동자들 스스로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어야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안전보건법 26조의 명시된 '작업중지권'이 정규직 노동자들은 물론, 하청 노동자들에게도 오롯이 보장돼야 한단 설명이다.
"'이대로면 누군가 다친다, 죽는다' 이걸 얘기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최근 사고들도 보면, 최소한의 안전망이나 난간만 있었어도 안 생길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위험하다'고 따지는 사람은 일을 안 시키니까. 다시는 그 업체에서 일 못 합니다.
결국 '안전할 거냐, 아니면 돈을 벌 거냐' 이걸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노동자들한텐 '위험하다'는 말도 못 하게 만들어놓고 '3000억 들여서 우리가 할게'라는 거잖아요.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거고요. 세월호 사고랑 똑같아요."
사내하청 지회가 고인 8명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13일 울산 현대중공업 맞은 편 인도에 세운 분향소는 매일이 위태위태하다. 벌써 두 차례나 울산동구청의 강제철거를 겪었고, 현재는 천막 없이 노상에서 하 지회장 등이 추모객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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