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가 쓴 '서평'들은 주로 책의 내용을 검토하고, 책의 덕목과 아쉬운 점을 따져보고, 책이 던져주는 시사점들을 간추리는 식의 글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살펴볼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다. 나는 지금 서평을 쓸 수 없는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서평을 쓸 수 없는 책이라니, 무슨 말인가? 책의 내용이 내 지식의 깜냥을 넘친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 책은 애초에 '앎'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차라리 '삶'에 대한 책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은 '삶' 자체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을 펼치자 처음엔 문자가 보이더니 이윽고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읽으면서 동시에 듣는다. 나는 어떤 목소리들을 만난다. 그 목소리들 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삶을 목격한다. 내 눈앞에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적 고향 풍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 "매화가 먼저 피고, 그게 마무리될 무렵 벚꽃 피고, 벚꽃 마무리 좀 될 때 산수유 피고, 산수유 마무리될 무렵 지리산 쪽에 철쭉 피고…"(68쪽), 그렇게 꽃 이야기를 하면서 울고 웃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비평할 수 없다.
<의자놀이>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미디어들은 쌍차 해고 노동자들에 대해 하나의 지배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 "부정의의 희생자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그들은 희생자에 불과한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된 운명을 순순히 수용했는가?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또 다른 명칭을 부여한다. 우리는 그들을 투사라고 부른다. 자본과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는 영웅들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떻게 투사가 되었는지, 어찌하여 영웅이 되었는지.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가정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자신들이 처한 계급적 상황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행동이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은 그러한 가정을 전적으로 무시하지 않은 채, 하지만 잠시 접어두고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지금의 당신이 되었나요?" 그러자 그가 말하기 시작한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나의 삶 전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스물여섯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그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책 제목은 '그들'이 아니라 '그'라는 단수 인칭을 사용한다. 책 표지에는 제목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부제도 정보도 없다. 이 책은 원래 쌍차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와 시민이 연대하는 "쌍용자동차 희망지킴이"의 활동으로 기획됐다.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다소 불친절하다. 표지만 보면 이 책은 쌍차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책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불친절이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민을 잘 보여준다.
<그의 슬픔과 기쁨>은 언제나 '쌍차 해고자'로, '선도투'로 불렸던 집단의 범주에서 한명 한명의 이름과 목소리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기존 미디어들이 채택하는 휴먼스토리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러자 그는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그'들이 엮여 있는지, 가족에 대해, 친구에 대해, 동료에 대해, 시민들에 대해, 책임감에 대해, 우정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274쪽)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타인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다른 인간의 이야기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진술하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진실이 우파의 경제주의와 개인주의뿐만 아니라 좌파의 회의주의와 보편주의에 의해 외면당해왔음을 새삼 확인한다. 이 담론들은 온갖 이론과 분석을 제시하며 연대의 불가능성과 당위성을 역설해왔다. 그러나 이 담론들은 핍박과 투쟁의 현장에서 '그'가 온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번민하며, 주저하며, 감행하는 말과 행동들, 그 말과 행동들로 한 명 한 명의 '그'가 다른 '그'들과 함께 공통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는 왜 싸움에 합류했는가?
<그의 슬픔과 기쁨>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해고된 이후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을 한다. 스물두 번 째 해고 노동자가 죽고 난 후 대한문 앞에 분향소가 생긴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한문 앞에 가 택시 안에서 동료들을 지켜본다. 그는 결국 택시운전을 그만두고 투쟁에 참여한다. 그는 말한다. "저는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의 슬픔과 기쁨>은 묻는다. 왜 싸우는 거죠? 다양한 이유와 동기를 대지만 결국 그 대답들은 모두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에 관한 것이다. 그는 공장에서 배운 대로 했다고 답한다. "돌아보면 어깨 너머에 누군가 있다." 그는 책에서 읽은 대로 했다고 답한다. "책에 다 나오잖아요." 그리고 다른 '그'들이 대답한다. "말한 거 바꾸면 쪽팔리니까." "몹쓸 책임감 때문에." "미안하고 미안해서 그래서 결국 같이 가는 거야." "그냥 조금이나마 가치 있게 살아 보고 싶어서." 일과 공부, 우정과 자존감, 염치와 양심이 섞여서 삶이 되고 그 삶에서 투쟁과 연대가 빚어진다.
왜 싸움을 멈추지 않는 거죠? 그가 말한다. "내가 포기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잘못했다는 깨끗한 포기여야 하는데 그게 맞느냐? 지금까지 살아온 것, 살면서 해온 것 다 부정하는 게 맞느냐?"(173쪽) 그렇다. 싸우는 이유가 삶 전체라면, 싸움을 그만두는 것은 필연적으로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5년을 거리에서, 법정에서 싸웠다. 5년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들이 지키려는 삶 전체에 비하면 얼마나 짧은가? 5년은 피곤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들을 이미 떠나간, 혹은 앞으로 떠나갈지도 모르는 동료와 친구들의 삶을 생각하면 얼마나 절박한가.
그렇다면 그가 지키려 했고, 그가 만들어 온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인가? 그 삶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삶, 안정적 생계와 평화로운 일상으로 표상되는 소위 보통의 삶을 말하는 것인가? 해고 전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영위해 왔던 그 삶을 말하는가?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삶이 바로 그 삶인가? 그는 그렇다고 말한다. "아무도 죽은 사람 없이, 아무도 우는 사람 없이, 라인에서 일하다 소주 한잔하고 퇴근"하는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그는 말한다.
"'과연 내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을까? 내가 일상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정말 돌아가고 싶은 일상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 무엇이 내 목적인지가 불분명해졌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상식은 가진 자에 의해서 언제든지 바뀐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만날 노동만 하고 술이나 한잔하고 연애나 하고 그냥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암만해도 안 될 것 같고, 저는 평생 이렇게 싸우면서 살게 될까 봐 두려워요. 그래야 한다면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평생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되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199쪽)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확고한 신념과 의식으로 무장한 투사의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가? 그가 말하는 복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직, '빼앗긴 몫 되찾기'와 얼마나 다른가? 그는 오히려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자신이 투쟁을 통해 발견한 진짜 삶에 대해서는 확신하기는커녕 두렵고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다른 그가 간절하게 말한다. "우리가 이명박 정권에 대항해서 혹은 어떤 정권에 대항해서 싸운 게 아니에요. 우리는 살려고 했어요. 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새로운 사람이고 싶어요. 지난 5년 동안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새로운 사람이고 싶어요."(233쪽) "우리가 함께할 형식들! 그게 뭔지 찾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허무하잖아요. 복직하고 나서 일상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236쪽) 이 모든 '그'의 말들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확고부동한 전망이 아니다. 내가 발견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 하지만 뭔지는 잘 모르겠다는 고백, 그럼에도 그것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다른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 그와 그의 삶,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씩 준비되고 있다.
나는 그의 목소리들, 그의 삶 이야기들을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가정해온 노동자 계급의식이란 단지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슬픔과 기쁨들이 뒤섞이는 삶의 연금술 속에서 탄생하는 인간성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의 목소리들, 그의 삶 이야기들을 들으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가정해온 노동자 계급의식이란 단지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슬픔과 기쁨들이 뒤섞이는 삶의 연금술 속에서 탄생하는 인간성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의 슬픔과 기쁨>을 쓴 정혜윤을 저자라고 부르는 게 망설여진다. 그녀는 스물여섯 명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이야기를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녀를 르포 작가라 불러야 할까, 구술기록가라 불러야할까?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나와 정혜윤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공농성 중인 송전탑 옆에서 진행된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집회 도중 농성 노동자인 최병승 조합원이 송전탑 위에서 연설을 했다. 그때 정혜윤은 송전탑 아래로 가더니 한 손으로 마이크를 높이 올려 들고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연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번개 파마머리와 치켜든 마이크가 만든 실루엣을 보고 나는 마치 "쭈그려 앉은 자유의 여신상"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재밌는 사실이 숨어 있다. 녹음을 잘 하자면 소리가 나오는 앰프 앞으로 녹음기를 들고 가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녀는 왜 굳이 송전탑 아래로 가서 연설 내내 불편한 자세로 녹음을 했던 것일까? 베테랑 라디오 PD 치고는 너무 아마추어스럽지 않은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는 사람에게,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이다. 웅변적인 연설조차도 정혜윤에게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기에 그녀는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마치 대화를 하듯이 말이다. 정혜윤은 똑같은 대화의 방식으로 스물여섯명의 이야기를 듣고 옮겨 적어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이 책은 권위적 교사처럼 독자를 교육시키지 않는다. 이 책은 밤의 이야기꾼이 그러하듯 모닥불 주변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그 삶들이 다른 삶들과 어울리며 만들어가는 희미한 다른 세계의 형상을 보여준다. 정혜윤처럼 독자들 또한 최대한 가까이서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 세계를 들여다본다.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정혜윤이 들려준 해고 노동자의 목소리 하나를 가슴 속에 간직한다.
"저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조명이 꺼지지 않아서예요. 그 빛이 밖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 모르겠어요. 빛이 안 꺼져서 해요. 빛이 꺼지면 저도 어딘가 도망가겠지만 빛이 안 꺼져서 도망 못가요."(281쪽)
나는 그가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고 조명이라고 말한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 빛이 밖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말대로 그 빛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 희미한 빛 아래서 펼쳐진 무대를 지켜야 한다. 그 무대가 아니라면 우리는 암흑 속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쓰러져도 그 무대 위에서, 일어나도 그 무대 위에서, 받쳐주는 손이 있고 일으켜 주는 손이 있는 그 무대 위에서, 오로지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끝내 인간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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