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민주의 곤경
지난 석 달여 대만(타이완)의 정세를 눈여겨 지켜보았다. 발단은 3월 18일, 대학생들이 입법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초유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과의 서비스 무역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집합적 행동이었다. 이 협정이 발효되면 대만 경제의 중국 종속화가 심해지고, 중국 노동력의 대거 유입으로 대만 청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럼직한 명분이다.
제도적 대안 강구도 솔깃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양안 간 협의를 감독하는 상설 기구의 마련이 눈에 띈다. 양안 간 주요 합의는 행정부 단독으로 처리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국회 의결을 거쳐야 함을 요구했다. 시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국민당 정권과 중국 정부와의 공모, 이른바 '제3차 국공합작'을 제어하겠다는 것이다.
2300만 대만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중국과의 관계 설정에 참여하고 개입하겠다는 뜻이니, 언뜻 보면 퍽이나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얼핏 '시민 참여형 통일'을 실천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국민당만큼이나 민진당에도 어지간히 실망했던 나로서는 양당 정치의 외부에서 신세대를 중심으로 등장한 새 운동의 발기에 크나큰 호기심을 품었던 것이다.
혹여 대만에서부터 '새 정치'의 장이 열리는 것인가? 기대감이 좌절감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비스 무역 협정은 뒷전이었다. 학생 지도부에게 정작 경제 문제는 중요치 않았다. 당면한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체결에 대해서도 별다른 행동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요체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구호를 그대로 빌자면 '대만 민주 수호'가 핵심이었다. '대만 사랑(愛臺灣)'이라고도 했다. 운동의 기저에 깔려 있는 핵심 정서는 기실 반(反)중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대만 '병합'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들렸다. '대만독립군 행진곡'을 부르고, '대만인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시민 참여를 통한 반통일, 반중국 운동에 가까웠다.
반중, 반화(反華) 감정은 대륙을 적대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내부의 적도 겨냥했다. 대만 안에 자리하는 잠재적 타자를 향한 배타성이 극렬하게 분출했다. 타이난 대학생들의 타이베이 상경 투쟁은 두 눈을 의심케 했다. '支那賤畜 外來種滾'. '지나의 천박한 짐승, 외래종은 꺼져라!'라는 뜻이다.
저 육두문자가 새겨진 것은 외성인 출신 마잉주 총통의 사진 위였다. 아찔하고, 아연했다. '대만인'의 대척점에 있는 '비대만인'의 범주는 제법 폭이 넓다. 통일파, 외성인, 육생(대륙 출신 유학생), 육부인(대륙 출신 부인) 등. 어느덧 중국 공산당의 '빨갱이'들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전체에 대한 적대 의식으로 악화된 것이다. 종족적, 인종적 편견이라고 할 정도이다. 대만의 민주화는 역설적으로 분열적 대만의 심화로 귀결되었다. 사실상의 '민주 내전(內戰)' 상태이다.
그래서 혹자는 국민당 독재 시절의 백색 테러를 연상키도 한다. 오랜 민주화 투쟁을 거쳐서 계엄령 체제를 탈피할 수 있었다. 1987년이었다. 그런데 그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청년들이 종족주의와 배타주의로 무장한 채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세력들을 '간첩(通匪)'으로 내모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도착적인 주체성의 발현은 수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미국 백악관에 제출한데서 정점을 찍는다. 온라인 모금으로 미국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래서 티파티(Tea Party)의 지지를 얻는 어처구니없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반중국에 기대어 대만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미국을 향해 지지와 성원을 구하는 상반된 태도가 가관이다.
몸은 점점 중국과 섞이는데,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난처한 형국. 도래하는 '차이완(Chiwan)' 시대의 그늘이자, 대만 민주의 곤경이고 곤혹이다.
탈냉전과 후기냉전
현재 대만의 대학생들은 1990년대에 태어났다. 내부적으로는 포스트 민주화 세대이며, 세계적으로는 탈냉전 세대이다. 헌데 '탈냉전(Post-Cold War)'이라는 말이 썩 고약하다. 일방이 제풀에 허물어짐으로써 집합적 성찰을 일구어 내지 못했다. 쌍방 모두 냉전 의식을 극복했다고 하기 힘든 것이다.
도리어 그 반대이다. 다른 일방의 냉전적 인식이 더욱 확산되고 심화되었다. 대만의 신세대들 또한 냉전 의식의 한계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국민당 독재 시대의 반공(反共) 정책에 리덩후이, 첸수이볜 정권의 대만화 및 탈중(脫中) 정책이 결합됨으로써 작금의 '반중(反中)'으로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 마잉주조차도 '신대만인'을 자처하지 않고서는 총통에 당선될 수 없었다.
즉, 이번 운동을 주도하며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신청년'들은 1949년 이후 누적된 대만 현대사의 총화이자, '냉전형 민주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동방 문명과 격절된 '전반서화(全般西化)'의 완성품이기도 하다. 중국과 단절된 채, 일본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반공주의의 소산으로 길러진 신인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푸른 청춘에도 불구하고 사상은 고루하고 낡디 낡았다. 민주·자유·다원의 '대만 문명론'을 전제·낙후·야만의 '중국 문명론'과 대비시키는 식이다. 교조적이다 못해 고답적이다. 아쉽기보다는 안타깝다. 딱한 노릇이다.
돌아보면 민주화 이후의 정치 지형이 통일·독립 구도로 재편된 것부터 냉전의 극복이 아니라 냉전의 지속에 가까웠다. 대만이 분단 국가로 등장한 1949년의 유산을 계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중화민국의 대만화는 냉전·내전의 토착화에 가깝다.
그리하여 대만 내부에서 비판적 도전 세력이었던 민진당조차도 대만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냉전기의 국민당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과거 국민당이 분단 체제에 기대어 대륙 낙인으로 정권을 연명했듯이, 민진당 또한 중국과의 적대를 바탕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아니 친미에 친일까지 보탰다는 점에서 더욱 퇴행적인 측면마저 있다. 중국과 다른 대만의 출발점이자 근대화의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우호적으로 회고하는 것이다.
대만의 민주화 세력이나 포스트 민주화 세대의 반중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가혹했던 국민당 독재의 명문이 '중국' 수호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기호 자체가 독재와 억압의 상징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만의 (재)중국화 프로젝트를 강화시켰던 것은 명명백백 냉전이라는 맥락의 소산이었다.
국민당과 미국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대만은 군사 기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연구하는 교육 기지였다. 대만은 작지만 진정한 중국이자 자유중국이며, 중화 문화의 보루여야 했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에 맞서 중화 문화 부흥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북방 러시아의 영향으로 적화(赤化)되고 오랑캐화 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중화민국이야말로 도통(道通)을 쥐고 있다고 강변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세력조차 대만의 (재)중국화를 요구하고 지원했던 빅브라더(Big Brother), 미국을 질문하지 않고 더욱더 기대고 있음은 여러모로 석연치 않다. 탈냉전의 과제를 방기한 채 반중(反中)의 전위 역할을 대리 수행하는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대만은 여전히 분단 국가로서 후기냉전을 앓고 있다. 아니 분단을 자각적으로 의식하여 역사화하기보다는 자연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지병이 더욱 깊어진 측면마저 있다. 골병(骨病) 수준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한다.
대만 민주의 출로
대만 민주의 출로를 좌향좌에서 구하는 견해가 있다. 일리가 있다. 국민당 독재 체제에 대한 중산층의 민주화 요구가 '대만'이라는 상징으로 수렴된 것에는 분단 체제로 말미암아 좌파 사상의 발육이 부진했다는 점이 한 몫 했었기 때문이다. 실로 정치적 언어와 담론이 부재한 곳에서 정치의 실천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좌선회를 통한 중국 혁명, '붉은 중국'과의 재회가 양안의 미래를 담보해 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근대화를 목적으로, 좌·우를 수단으로 삼아 '100년의 급진'으로 내달렸던 20세기의 구도 자체에서 탈피해야 한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두 개의 중국'으로 상징되는 협애한 정치 대립이 아니라 장구한 중국사의 관점으로 지난 100년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일이다. 관건은 재차, 좌우합작 너머 고금합작이다. 그래야 양안의 재결합 또한 더 큰 중국으로 하나 되기, 대일통(大一統)의 완수에 그치지 않고, 동방 문명의 갱신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마침 올해는 적기(適期)이다. 대만이 중국에서 분리되어 일본에 할양된 것도 갑오년 청일전쟁(1894년)의 결과였다. 100년을 지속하는 동아시아 천하대란의 원점이었다. 이후 대륙은 급진으로 내달렸다. 변법(變法)으로 모자라, 신문화운동으로, 문화대혁명으로 크고 급히 치달았다. 전통의 부정, 자기 부정으로 100년을 지새웠다.
좌우를 다투었던 대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4 운동 이래 전통 부정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했다. 국민당 독재의 명분으로 '위대한 중국', '위대한 중화문명'을 설파함으로써 일상에서 유리된 박제화된 전통만이 남았다. 동방 문명의 내재적 발전을 통한 근대화와 민주화는 양안 모두에서 방기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양안 분단 체제의 핵심 또한 좌·우 간 대결이 아니다. 양안 공히 고·금 간에 만리장성을 쌓고 말았다. 주체성의 상실이야말로 20세기 동아시아의 치명적인 병통이다.
예외적인 인물도 있었다. 가령 모종삼(牟宗三) 같은 이들이다. 그는 대만을 택했다. 자유와 민주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자유와 평등이 곧 인(仁)과 예(禮)를 낳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민주 사회가 곧 대동(大同) 세상은 아니라고도 했다. 따라서 근대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중국은 유학의 전통 문화로 현대 세계에 공헌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자유와 민주가 보편적 가치임을 수용하되, 그것이 곧 역사의 종점임을 인정치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학의 근대화를, 유학의 민주화를 평생토록 꾀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기개와 줏대가 있는 신유가의 사상에 바탕을 둔 반체제 세력, 대안적 정치 세력은 크게 자라나지 못했다. 으레 시대착오적인 '수구파'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그들은 대학과 연구실에서 내연(內燃)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년이나 고독하셨다.
작금 대만 민주의 궁핍은 대만의 예외 상태가 아니다. 강 건너 불도 아니다. 일본과 한국과 태국(타이)의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987년을 전후로 민주화로 이행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히 '87년 체제'의 저열화를 경험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난국에 빠져 향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역시나 '근대화'가 독배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앞서 일구었다는 자부심과 자만심이 부메랑이 되고 있다. 사상의 부재, 가치의 부재, 정체성의 위기가 자욱하다. 인과 예가 무너진 도리 없는 세상에서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이다.
대오각성할 때이다. 동방 문명에 바탕을 둔 재건과 갱신이 갈급하다. 고금합작을 통한 동방 민주의 복원을 동아시아의 집합적 과제로 삼을 일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만 민주의 출로 또한 이쪽에 있을 것이며, '새 정치'의 씨앗 또한 이편에 묻혀 있을 것이다. 다시금 21세기 첫 갑오년의 의미를 무겁게, 무섭게,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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