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바로 가기)에서 랄프 네이더에 대해 살펴봤다. 랄프 네이더는 '교통'부가 아니라 '노동'부 차관의 보좌관으로 워싱턴에 입성했다. 상원의 자동차 안전 소위 자문역도 맡았지만, 그건 노동부에 들어간 다음의 일이었다. 노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동차 안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다른 길, 하지만 아주 쉬운 길 하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자동차 생산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길이다.
아무리 GM의 사장이 자동차 안전 문제는 등한시하고 디자인이나 가격, 싼값의 부품만을 고집한다 해도, 결국 생산 현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것은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들이다. 만일 현장 노동자들이 운전 시 문제를 야기할지도 모를 설계상 또는 조립상의 오차를 잡아내고 폭로할 수 있다면?
만일 당시 미국의 완성차 생산 현장의 분위기,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력이 그 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면, 랄프 네이더는 소비자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이건 복잡한 도면을 그리는 데 참여하는 소수의 설계사들 중에서 내부 고발자를 찾는 작업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수천 또는 수만 명의 노동자 중 문제점과 결함을 발견한 누구라도 나서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장 작업자들이 운전자가 느낄 불편한 점까지 세세하게 잡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직접 조립된 차를 운전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 문제를 야기할 결함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내가 조립한 차를 내 가족이나 친지가 몰고 다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운전하면서 느낄 불편함까지는 관심 밖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목숨과 안전 문제는 완전히 다르게 느낀다.
예를 들어 시트 조절 레버가 너무 아래로 깊숙이 위치해 허리를 많이 굽혀야 한다든지, 스피커 품질이 좋지 않아 좋아하는 음악의 음색이 다르게 들린다든지 하는 문제와 선루프에서 물이 조금 새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앞의 2가지 문제는 좀 불편한 것일 뿐이지만, 물이 새는 문제는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심각한 결함이다.
시트나 승객 옷이 젖는 문제야 좀 불편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계기판과 내비게이션을 비롯한 전자 제품에 물이 스며드는 것은 기계의 결정적인 오작동 원인이 된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물에 빠져도 아무 문제없이 구동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신차들에서는 블루투스를 이용해 전자 제품들 사이에도 무선 신호를 주고받는 시대다. 그래서 현대차 싼타페 트렁크에 물이 새 '수(水)타페'라는 오명을 얻었을 때, 민간 기업 문제지만 국회 국정감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가.
네이더는 왜 '소비자' 운동의 대부가 됐을까
네이더에게 협조하는 노동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네이더가 노동자 운동을 대안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얘기는 그가 노동자들 속에서 그러한 내부 고발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노동조합을 통해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운전자의 불편한 점까지는 몰라도, 승객의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를 결함에 대해서라면 현장의 조립 작업자들이 가장 잘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대규모 리콜이 벌어질 만한 결함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작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물론 차량을 조립하는 노동자들이 설계상의 미세한 결함까지 잡아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설계자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조립상의 미세한 오차를 잡아내는 게 현장 노동자들의 능력이다. 게다가 1960년대의 미국이라면 이미 현장 노동자들 상당수가 차 1대씩은 몰고 있던 시절이므로, 조립할 때 발견한 문제가 운전 시에 어떤 오작동을 야기하는지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왜 이런 문제에 대한 내부 고발이 활발하지 않은 것일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런 문제점들을 지적해도 회사 측이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회사 측 관리자들은 대부분 귀찮아하거나 쓸데없는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은 괜히 무시당하느니 차라리 알고도 침묵하는 길을 선택하고 만다.
만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회사 외부로 폭로해 버린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회사 이미지가 실추되기 때문에? 아니다. 오히려 GM의 점화장치 불량 문제처럼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면 회사 이미지는 더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차라리 조기에 폭로하는 게 회사 이미지에 타격이 덜하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해고'와 '손해배상' 등 민형사상 책임이다. 즉, 회사 외부에 폭로할 경우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며 회사가 협박을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내부 고발과 결함 시정에 소극적이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런 일을 벌였을 때 상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벌이 돌아오거나 자신에게 불리한 손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공정 일부의 개선 또는 작업 방법을 좀 더 정교하게 하거나 작업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회사는 늘어나는 작업량을 그냥 현장 작업자들에게 떠넘겨 버린다.
작업자를 한두 명 더 추가해 주기만 해도 작업량은 늘지 않을 텐데, 회사는 인원 충원에 비용이 많이 든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다보니 현장 작업자들 사이에는 이런 정서가 지배적이게 된다. "괜히 입바른 얘기 했다가 일만 더 힘들어진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지나? 결국엔 회사가 책임지는 문제인걸 뭐. 그냥 입 닫고 일이나 하자."
시스템 전체가 이렇게 현장 작업자들을 '수동화' 시켜버리고 만다. 이게 어디 완성차 공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문제만 놓고도 수도 없는 사례를 들 수 있다.
노동자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
세월호에는 30여 대의 화물차량이 실려 있었다. 당연히 차량 운전자들도 동승했다. 그렇다면 화물차 기사들은 과적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 그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에 하루 이틀 타본 것도 아닐 것이다. 이미 언론 보도에 나오고 있는 것처럼, 세월호라는 배가 워낙 과적을 자주 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기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믿지 않았고,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탈출 경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에 탑승한 화물차 기사 몇몇이 탑승자 일부를 구할 약간의 여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침몰의 원인 중 하나였던 과적 문제를 제기하면 운송회사에서 잘릴 게 뻔했다. 옆자리에 짐을 함께 부릴 후배를 앉혔지만, 승선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괜히 명단에 올렸다간 일당이나 다름없는 운임을 물릴 테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화물 트럭 기사들, 비겁하지만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꾸 문제 일으키면 잘라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건, 비겁하게 제일 먼저 도망간 선장도 포함된다. 선장도 1년짜리 계약직 노동자 신세였고, 69세라면 당연히 은퇴해서 노후를 즐겨야 할 나이임에도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뻔한 것 아니겠는가. 떼돈을 벌어보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이렇게 계약직 신분으로 일이라도 해야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컨테이너와 차량 실은 거 제대로 결박하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 네 월급의 몇 배가 까진다. 그냥 나갈래?" 아마도 회사 측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 일등 항해사도 범죄에 동참했을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으니. 그걸 쳐다보는 선원들도 비겁하게 입을 다물 수밖에. 그런 문제를 제기하면 다음부턴 절대로 배에 오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선박의 불법 개조에 참여한 업체의 노동자들은 몰랐을까? "이거 이렇게 증축하다간 배가 옆으로 넘어갈 텐데…." 본능적으로 이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닫는다. "에이, 뭐 평생 살다가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인데 뭘. 그리고 내가 탈 배도 아닌데 내가 해고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른 말 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이렇게 비겁하게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선박을 검사하는 노동자들은 몰랐을까? "이거 사실은 검사도 안 한 배인데 '양호'라고 쓰라고 하니 어떻게 하지?" 하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내가 쪼끔만 비겁하면 내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어"라는 생각에 진실을 덮었을 것이다.
그대들 중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시라
비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돌을 던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진짜 범인은 목구멍을 저당 잡아 이들을 침묵하게 만든 놈들이다. 바른 말 하면 오히려 손해만 볼 뿐이고, 비겁해져야만 편하게 살 수 있다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도록, 수동적인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사기를 쳐온 제도다.
비겁했던 이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비난이나 책임이 아니다. 이제 그렇게 살지 말자고, 우리 노동자들이 먼저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다독이는 것이다. 아니, 솔직하게 얘기해도 손해 보지 않고 불이익이 없도록 시스템과 제도를 철저하게 개조하는 것이다.
안전과 국민의 행복? 현재의 시스템과 제도를 가만히 둔다면, 그런 거 다 허상일 뿐이다. 세상을 만들고 수리하고 운영하는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말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노동자들의 이 비겁함을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본의 부정을 폭로하고 고발해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다. 그래서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정당을 비롯한 저항의 조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과적을 폭로하고, 부정한 선박 개조와 부실한 점검을 폭로해도 잘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훨씬 안전해질 것이다.
이윤을 늘리는 데에만 신경 쓰느라 견고하지 않지만 값싼 점화장치 부품을 장착하라고 할 때, '이건 사람 죽이는 일이니 나는 조립을 거부하겠다'고 노동자들이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때, 자동차는 잠재적인 살인자가 아니라 인류의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다.
물론 아주 어려운 길이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길이다. 랄프 네이더 역시 한번쯤은 생각해 봤겠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봐서 소비자 운동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 네이더가 선택한 소비자들의 운동이 모래알을 묶어내는 작업이라면, 작업장의 응집력 있는 노동자들을 묶어내는 것이 훨씬 가능성 있는 일이 아닐까?
이제 솔직히 고백하자.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우리 아이들 생각에 매일같이 잠 못 드는 노동자들, 우리에게 솔직히 고백해도 되는 권리가 필요하다고. 비겁해서 … 비겁하고 또 비겁해서 … 예쁘기만 한 그대들을 차가운 물속에서 구해내지 못한 우리 자신을 구원할 길을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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