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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통제형' 부모? '조절형' 부모?

[민들레 교육 칼럼] 육아 특집 ③ 과잉 양육과 아이 길들이기

보호 대상이 된 아이들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만남

아동기 길들이기, 그리고 아이의 자아 길들이기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한 세기 이상에 걸쳐 꾸준히, 그러나 점점 가속이 붙으면서 진행되다가 최근에야 아동기가 머지않아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험 신호가 대중의 감시망에 들어왔다. 길들이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지 길을 찾고자 한다면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엄청난 변화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시작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의 이미지는 천성이 순수하고 건강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경험으로 배우면서 꾸준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역사학자 피터 스턴스(Peter Stearns)와 동료 학자들에 따르면 19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몇 가지 변화가 연달아 일어나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아이들의 이미지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변화의 시작은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에 따라 임신 조절이 가능해져 출생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나타났다. 가족 규모가 작아지면서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다. 동시에 심리학이 과학적인 학문으로 입지를 굳히고 아이들도 그 연구 범위에 들어갔다. 행동주의는 바람직한 행동을 보상하고 환경을 관리하여 나쁜 행동을 예방한다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프로이드의 심층 심리학은 무의식의 힘이 아이들을 쉽게 압도할 수 있으며, 부모와의 사이에 갈등이 풀리지 않고 남아 있으면 상처받기 쉬운 아이들의 영혼에 잠재적으로 나쁜 영향을 준다는 개념을 도입했다. 시인이자 사회 비평가인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가 말했듯이 "이제 수백만 명의 부모가 상처주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눈앞에 펼쳐진 노다지를 차지하기 위해 주저않고 뛰어들었다.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수십 권짜리 육아지침서를 쏟아냈고, 미국 곳곳의 중산층 가정에 월간 육아 잡지를 배달하면서 최신 육아 정보를 제공했다. 광고회사가 부모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는 메시지를 퍼부으면 곧이어 의약품과 보호 장구, 아동용품 시장이 마찬가지로 붐을 이루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Christopher Lasch)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신의학은 부모를 만성적으로 불안 속에 가두고, 광고업계가 한 가지 걱정을 없앨 새로운 상품을 쏟아내면 또 다른 불안거리를 만들어 희망을 꺾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들의 건강과 안전, 하루분의 영양, 정서적·지적 발달, 인기와 성공을 두고 또래와 경쟁하는 능력, 이 모든 것은 비타민, 일회용 밴드, 충치 예방 치약, 시리얼, 구강청결제, 완하제를 얼마나 소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광고산업의 집요한 마케팅이 통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과거에는 튼튼하고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던 아이들의 이미지가 세균과 각종 질환 또는 예기치 못한 환경이 닥치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가냘프고 의존적인 존재로 완전히 탈바꿈해버렸다. 하루아침에 아동기는 일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고의 시기로 변했고, 스턴스가 말한 것처럼 "보통 같으면 정부 규제에 적대적이던 미국사회가 안전, 경고 표시와 울타리, 그리고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온갖 종류의 간섭에 집착했다". 텔레비전은 '당신의 자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라는 공익광고를 저녁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주문처럼 읊조렸다. 20세기가 잔뜩 겁에 질린 채 밀레니엄을 향해 갈 즈음, 아이들을 집 주변이나 놀이터와 놀이방에 가두려는 부모들의 경향은 거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양육 방식을 지배하는 두 가지 심리, 공포와 통제

아이들 길들이기의 과정은 아이들의 이미지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바뀜과 동시에 자녀를 잘 키우려는 부모의 근심이 커지면서 이 두 현상이 강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에 일부 기인한다. 두 현상에 존재하는 공통분모는 공포와 통제이며, 이제 이 두 가지 심리가 부모의 양육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자녀의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심리학자 데이비드 엘킨드(David Elkind)가 말하는 이른바 '과잉 양육' 현상이 생겨서 부모는 각종 과외활동으로 아이들의 자유 시간을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 아이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신세대 학부모인 심리학자 포스터 클라인(Foster Cline)이 말하는 소위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의 주변을 맴돌며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든지 내려앉아 구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가리는 일이 없다. 아이들의 길을 열어주고 대신 싸우며, 아이들 스스로 성공 또는 실패를 겪을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스리슬쩍 찾아온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생물학적 유인 작용 때문에 우리는 선천적으로 아이들의 복지에 매달리게 마련이라고 사회심리학자 웬디 그롤닉(Wendy Grolnick)은 말한다. 가족의 생존에 대한 포유동물 특유의 유대감과 진화과정상의 본능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욕구로 바뀌며 이는 또 아주 쉽게 공포와 통제로 바뀔 수 있다. 어머니이기도 한 그롤닉은 부모 통제 형태를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녀는 부모가 갖는 본능적인 관심과 염려는 경쟁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제도 탓에 겹겹이 두터워진다고 설명한다.

그롤닉과 엘킨드 모두 점점 번져가는 통제형 양육 방식에서 스트레스의 영향을 중요하게 꼽는다. 부모로서는 단지 아이들이 고분고분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통제하려 들 때도 있지만 과도한 부담감이 부모를 짓누르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경제 사정, 아이를 고려하지 않은 취업 계획, 한 부모 가정에서 오는 어려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으로 인해 아이들을 자율적으로 키우기에는 부모의 심리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 아이들이 스스로 배워가며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더욱이 스트레스에 짓눌린 부모는 아이들을 "상징으로 단순화"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엘킨드는 말한다. 아이들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면서 부모는 아이를 전인적 인간으로 알아가야 하는 고된 일에서 손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아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온갖 과제로 옭아맨다.

스트레스가 있으면 부모는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결국 자녀를 '또 다른 자신'으로 보게 된다. 이런 부모는 아이들의 옷차림이나 학교생활이 자신이 보호자로서 어떻게 비치는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압박감을 덜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자녀를 몰아부치면서 자신을 대신해 남에게 지위를 증명해주는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방식의 양육은 아이들을 아이답게 키울 여지는 조금도 남겨두지 않은 채 전적으로 어른이 정한 대로 몰고가는 또 다른 형태의 길들이기이다.

그롤닉은 부모의 스트레스가 종종 과민반응으로 터져나와 통제 행위로 나타난다고 설명하면서, 가정 복지를 주제로 한 자신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재정적인 어려움과 처벌적 양육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농촌 가정을 주제로 한 다른 연구에서는 가난, 자녀 수, 저학력, 한부모 가정 같은 스트레스 요인이 많을수록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덜 주며, 경멸적인 발언을 더 많이 하고 위협하며, 신체적 정서적으로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롤닉은 통제형 양육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밝히기 위해 엄마와 아기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고 몇 가지 연구를 진행했다. 한 실험에서는 엄마들에게 장난감을 주고 첫 돌이 된 아기와 놀게 하면서 일부러 명확하지 않은 이런 내용의 지시를 전달했다.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아기 옆에 앉아 계세요." 그러고 나서 숨겨놓은 카메라로 아기와 엄마를 3분간 촬영했다. 몇 명은 이 지시를 아이들이 장난감을 '제대로' 가지고 놀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이들 엄마는 장난감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 심각하게 아기의 놀이에 거듭 끼어들었다. 다른 엄마들은 이 지시를 '필요할 때 돕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풀이해서 아기들이 혼자 놀다가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때만 도움을 주었다.

그롤닉은 통제 성향의 정도와 아기의 자율성에 도움이 되는 정도에 따라 엄마들을 구분했다. 자율성에 도움이 되는 엄마들은 아기가 하는 대로 봐주면서 격려하고, 막힐 때는 딱 알맞은 만큼만 도와주었다. 통제 성향의 엄마들은 아기와의 상호작용을 주도하면서 늘 필요 이상으로 도와주고 무엇을 해야 할지 사사건건 개입하려고 했다.

이어서 연구자들은 다시 아기와 엄마를 떨어뜨려 놓고 아기의 활동지 속성을 측정하기 위해 아기에게 어려운 과제를 주었다. 통제 성향의 엄마를 둔 아기들은 쉽게 포기하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에 자율성에 도움이 되는 엄마를 둔 아기들은 주어진 과제를 풀려고 계속 애썼다. 그롤닉은 통제 성향의 엄마들이 관리 단속하고 강요하는 행동은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과 동기를 손상시킨다고 결론 내렸다.

조절형 부모와 통제형 부모의 차이

지금 이 논의를 위해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부모 통제의 적절한 선은 어디일까? '사회화'가 '길들이기'로 변해 결국 부모의 육아 방식이 아동기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롤닉은 '조절하는' 부모와 '통제하는' 부모의 차이를 설명한다. 조절한다는 말은 나이에 따라 한계를 분명히 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며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허락함으로써 자율성을 키우도록 돕는 행동을 말한다. 조절하는 부모는 아이가 특정 행동을 하는 데 최소한으로 개입하며, 아이가 스스로 자기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게 한다. 이들은 부모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이가 성장하면 점차 아이와 의견 조정도 한다. 반면에 통제한다는 말은 복종에 큰 가치를 두고 특정한 결과가 나오도록 아이를 이끌며, 대화는 좀처럼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처벌하고 평가를 내리며, 기한을 정해 압박하거나 아이의 죄책감을 자극해 스스로 순종하게 만든다. 이런 모든 행위는 아이의 자신감에 상처를 준다.

아이들은 풍부한 내재적 동기를 갖고 태어나지만 나쁜 환경에서 이 동기는 쉽게 다칠 수 있다. 그롤닉은 "아이들이 간섭 받지 않고 자기 흥미를 찾아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야말로 내재적 동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한 바에 따라 행동할 때에만 내재적 동기가 작동할 수 있다. 위협, 뇌물, 마감 시한, 지시, 남이 설정한 목표는 물론 심지어 칭찬과 보상 같은 외재적 강화 요인은 내재적 동기를 손상시키기 쉽다.

칭찬은 의도에 따라 통제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풀이될 수 있다.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칭찬은 아이가 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조종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으며, 끝까지 마치도록 압박한다. 통제성 칭찬은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칭찬보다는 아이에 대한 칭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숙제를 다 마쳤으니 넌 착한 딸이야"라는 식의 칭찬은 칭찬하는 사람의 기준에 맞춰야 인정받고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내재적 동기를 해친다. 한편, 칭찬하는 사람이 솔직히 자기 의견을 말하고 격려해준다면 칭찬은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일의 수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끌어주기와 내버려두기의 적절한 때를 알기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학교 운영자로서 매우 다양한 가족들과 밀접하게 작업하며 얻은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디시와 라이언의 연구는 타당하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조건 없이 애정으로 보살피되 일관적이고 단호하게 제한을 두면서도 가능한 한 아이를 구속하지 않는다면, 물질적 대가나 위협보다 충분한 정보를 주고 아이가 책임감 있게 선택할 수 있도록 신뢰한다면, 그리고 자발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 깊은 곳 욕망을 존중한다면, 아이들은 종종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험이야말로 그롤닉이 말하는 적절한 개입과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유 사이에서 부모가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와 아내를 포함해서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가 저지른 실수는 우리가 1950년대 전후로 아동기를 보내면서 겪어야만 했던 권위적 양육에 대한 과민 반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는 데 너무 인색했고, 아이들이 스스로를 제대로 관리할 만큼 성숙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두려고 했지만, 권위를 지나치게 많이 포기하다가 아이들에게 허황된 자아의식을 심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이들 스스로 방향 감각을 가다듬을 수 있게 돕기보다는 의도치않게 부모 자식 사이의 힘겨루기에 힘을 쏟도록 부추긴 셈이다. 데이비드 엘킨드가 관찰한 사실에 따르면 "아이는 스스로를 조절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부모를 통제하려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 흥미를 찾아가기보다는 부모 주변을 맴돌면서 부모를 더 잘 조정할 궁리를 한다. 우리는 아이가 어른을 지배하려고 할 때 사실은 아이가 세상을 무서워하며 그로 인해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탄탄한 발판을 만드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런 식의 과잉 보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 부모들은 너무도 아이들의 호감을 사고 싶어 "안 돼!"라는 말을 하기 꺼려한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처럼 아이와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랑이를 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결국 아이들이 진짜 욕구에 끌리기보다 미숙하고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충동에 휘둘리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부모와 아이 사이에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역동성에 초점을 두고 깊이 살펴보았다. 내면의 야성이 살아남기 위해 일찌감치 거쳐야 하는 시험대가 바로 여기에 얼기설기 엮여 있기 때문이다. 부모인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여러 방면으로 지지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훗날 아이들이 타고나는 지식을 부정하며 길들이려는 세력에 꿋꿋하게 맞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도록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는 미국의 대표 대안학교인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40년 넘게 아이들을 만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국내에 번역·출판된 책으로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살아 있는 학교 어떻게 만들까>·<프리스쿨> 등이 있다.

글은 그가 최근 펴낸 책(가제)에서 뽑은 것이며, 오필선 씨의 번역으로 <민들레> 92호 "육아, 시장의 유혹을 넘다"에 실렸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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