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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매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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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매일 기도한다

[정여울의 '마음이 머무는 곳']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탈리아의 아시시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의 힘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머나먼 세상을 느낄 때. 어떤 노력으로도 열리지 않는 문을 발견했을 때. 나의 소원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이 전혀 다를 때.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내 기도를 들어줄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딘가를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내 힘으로는 도울 수 없는 타인을 발견했을 때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 때. 노력이나 의지나 진심만으로는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없을 때. 그럴 때 우리는 기도에 온 마음을 의지한다.

그럴 때는 내가 주체적으로 기도를 한다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기도와 탄식이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마그마처럼 맹렬하게 분출된다. 내 의지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운전할 수 없는 내 무의식이 기도라는 간절한 소통의 언어를 향해 나를 등 떠미는 것 같다. 아시시를 찾아가는 마음 또한 그랬다. 무언가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실 누군가를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마음. 그렇게 시린 마음을 안고 나는 아시시에 갔다. 아침부터 비가 퍼붓던 날이라 먼 길 떠나는 것이 여의치 않았지만, 그날이 아니면 왠지 오랫동안 아시시를 찾을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 아시시의 버스표. 아시시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역내 매점에서 아시시 투어용 버스표를 샀다. 물론 걸어가는 길도 좋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여행자들은 대부분 버스를 탄다. 느릿느릿 완행열차를 타듯 아시시의 명소들 하나하나에 손님들을 정성껏 내려준다. ©이승원

아시시는 피렌체처럼 거리 곳곳이 위대한 건축물과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으로 가득 찬 곳은 아니지만, 골목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곳이었다. 관광지 느낌이 거의 나지 않았고 순례자의 간절함을 향해 활짝 열린 도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내가 아시시를 방문했을 때는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아시시 구석구석을 타박타박 걸어 다니는 동안에 온갖 번뇌로 들끓었던 마음이 천천히 정화되어가는 것 같았다.

▲ 아시시에서 만난 가죽 장인. 그는 가죽 한 장 한 장을 정성껏 마름질하여 패치워크로 가방을 하나하나 만들어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좋을 때나 궂을 때나 항상 그 자리에 꿋꿋이 서있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한없는 믿음직스러움이 느껴졌다. ©이승원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아시시에 오랫동안 살아오신 할머니를 만났다. 나는 옆자리의 할머니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가려면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물었는데, 할머니는 영어를 못하셨다. 순간 아차 싶었다. 다짜고짜 영어로 질문을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할머니는 내 질문에 성심 성의껏 대답해주시기 위해 손짓발짓을 다 동원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강한 이태리어 억양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듣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는 단어 하나만 나와 주길 기다리며. 나와 할머니의 애처로운 바디 랭귀지가 안쓰러웠는지, 근처에 앉아 있던 똘똘한 인상의 여학생이 나에게 영어로 할머니의 의중을 전달해주었다.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버스를 타고 그곳에 곧장 직행하는 것보다는 언덕 맨 꼭대기로 올라가 천천히 내려오면서 골목길 구석구석을 순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아시시는 평지가 거의 없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데, 오르막길 곳곳에는 오래된 돌들로 차곡차곡 지어진 집들과 공방들, 가게들이 즐비하다. 가게들은 별다른 장삿속 없이 대대로, 또는 수십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들이 많다. 나는 비오는 아시시의 골목길 구석구석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몸은 고단했지만 할머니의 조언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편리하게 도착하기만 하는 여행에서는 도시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으니.

▲ 아시시의 골목길. 비오는 아시시는 신기하게도 책이나 사진에서 본 화창한 모습보다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프란체스코 성인의 고행과 믿음의 흔적을 찾아 비오는 날에도 아랑곳 않고 아시시를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승원
비오는 아시시는 처연하고 고즈넉하면서도 더 깊은 속내를 내보이는 듯 했다. 아시시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당시 보름이 넘게 걸렸던 유럽여행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던 두브로브니크와 오래 전부터 가장 가보고 싶었던 몬타뇰라를 제치고 가장 깊숙한 인상을 남긴 건 바로 아시시였다. 아시시가 그토록 풀리지 않는 화두처럼 오래 남아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곳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믿음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저절로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는 '종교를 가지라'고 설득하는 지인들의 말에 자주 상처받곤 했다. 그들은 정말 좋은 뜻으로 조언해주는 것이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너는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 그토록 불안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책망이나 연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자격지심도 한 몫 하겠지만, 주변에 워낙 크리스천이 많다 보니 나는 정말 필요 이상으로 자주 '원치 않는 전도'를 당하곤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평소에는 신앙을 향해 납작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시도 때도 없이 느끼면서도, 막상 믿음을 가지라고 설득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특히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앞 도로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전도를 하시는 분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다. '나는 신께서 지켜주시는 아주 안전한 곳에 있는데, 당신은 그토록 위험한 곳에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냐'는 투로 전도를 하시는 분들이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께서 이렇게 '문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믿음의 울타리 바깥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의 기도도 들어주셨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직 이렇게 어설프게 모든 믿음의 경계 바깥에서 기웃거리며 믿음의 문외한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

외출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하는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는 아예 전도를 위한 천막이 상시 개설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커피와 사탕과 포스트잇과 황사방지마스크까지 나눠주며 믿음을 설파하지만 나는 그 물품들과 그 전도의 메시지를 한사코 거부해왔다. 그때마다 전화를 거는 척하거나 아주 바쁜 척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 성 프란체스코 성당 입구. 여기서부터는 되도록 천천히 걷는 것이 좋을 것만 같았다. 그 장엄한 기운이 아시시 전체에 어디든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대성당 근처로 가니 마치 그곳 자체가 거대한 영혼의 자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무언가 강한 힘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았다. 옆 사람과 수다를 떨던 입 모양새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입 모양새로 바뀌었으니. 이 모든 기도들의 힘이 고스란히 합쳐져, 지금 이 순간 구원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이승원
그런데 며칠 전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속에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던 진심을 고백했다. 모 교회에서 한결같이 전도를 나오시는 그 아주머니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적극성으로 내 믿음의 결핍을 공격하셨다. 아직도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시다니 참으로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나는 또 한 번 상처받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실례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그 아주머니의 전도를 거절하면서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딴청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을 보면서 정확하게 내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내 소중한 고독을 지킴으로써 나는 나만이 열 수 있는 내 마음의 문을 스스로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시시에서 내가 지금 당장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 그 무엇을 느꼈다. 그것은 특정한 종교를 향한 것이기보다는 믿음이 있는 삶에만 깃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눈뜸이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길고 험난한 믿음의 루트를 찾고 있다. 그러니 '좋은 뜻'은 정말 알겠지만 제발 '믿음에 귀의하지 못한 이들'을 너무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는 말아주셨으면. 그리고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꾼'의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매일 나만의 어설픈 방법으로 오늘도 기도한다. 내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지 않기를. 내가 내 절망에 붙박여 스스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절망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의 분노가 우리를 찌르는 칼이 되지 않기를. 우리의 분노가 성마른 증오와 복수의 불길로 타오르지 않고, 이 세상을 치유하는 더 깊고 오래가는 힘으로 타오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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