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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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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취미는 독서] 열일곱 번째 날

▲ <쿨Cool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지음, 어크로스 펴냄). ⓒ어크로스
이명현(천문학자)
: 이젠 더 말하기도 싫다. 야만을 벗고 문명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쿨Cool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지음, 어크로스 펴냄)에 쓰여 있는 그대로 한 마디도 고치지 말고 사과하고 행동하라.

원래 수첩에 쓴 대로 잘 읽는 분이니 그 정도는 충분히 잘 하시리라 믿는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사과할 마지막 기회다.

이정모(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 아마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논어>는 수십 가지 아니 수백 종은 족히 될 것이다. 나는 배병삼 교수가 쓴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사계절 펴냄)를 보기 전까지는 논어는 그야말로 꼰대들이 제 편한 세상으로 몰고 가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읊어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 했던 게 내 주변에서 논어를 논하는 분들은 정말로 꼰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병삼 교수의 책을 보면서 공자가 그리고 논어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한 까닭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느끼는 것이었을 뿐 쉽게 내 손과 눈으로 찾아가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소설가 김탁환이 아침마다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던 (요즘은 왜 안 올리시나요?) 한 구절을 함께 읽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요즘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좌파논어>(주대환 지음, 나무나무 펴냄)를 읽고 있다. 새빨간 표지와 제목의 '좌파'가 신선했다. (성공적인 표지, 성공적인 제목인지는 잘 모르겠다.)

▲ <좌파논어>(주대환 지음, 나무나무 펴냄). ⓒ나무나무
책의 일곱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지금 바로 대한민국에 인(仁)이 필요하다!'이다. 여러 개의 공자 말씀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슴에 다가온 구절은 이렇다.

子曰(자왈) 如有王者(여유왕자)라도 必世而後(필세이후)에 仁(인)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만일 왕자(王者)가 있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세상이 인(仁)해질 것이다."(86쪽)

인(仁)은 객관 세계의 상태, 또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가치다. 우리는 젊은 시절부터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워왔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싸웠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울 때는 공자의 말씀에 무관심했다는 것.

주대환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나라에 살면서, 비로소 자유와 평등의 불안정과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연대의 가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仁)'이다. (88~89쪽)

그나저나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세대는 지나야 한다고 하셨으니, 우린 그런 세상에 살기는 틀렸다. 부디 내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① 쉬고 싶어서 <더 스크랩>(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비채 펴냄)을 읽었다. 나는 미련한 인간으로 남들보다 스스로를 두 배쯤 혹사시켜야 겨우 일이 진행되거나 그 고생 자체를 성취감으로 생각하는 희한한 메저키스트인데, 그래서 궁지에 몰렸을 땐 정 반대의 태도로 쓰인 책을 봐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본인이 별 고생 없이 쓱쓱 썼다(고 밝히)는 데 미덕이 있다. 그런 태도의 책들은 당연히 못 쓴 게 태반일 텐데 하루키는 하루키이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된다. 이 분야에서 태도와 퀄리티의 결합이 산뜻하기론 독보적인데 이것이 그의 소설보다 위대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때에 따라 고생했다면 좀 미안하지만 <더 스크랩> 서문엔 아예 이렇게 쓰여 있다.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1980년대 일본, 젊고 전도유망한 소설가가 미국 잡지를 잔뜩 쌓아놓고 아무래도 좋은 가십들에 아무래도 좋은 논평을 덧붙이는 콘셉트이니 이미 여기에서 게임 오버다. 30년이 지났으니 더 재미있고 말이다.

내친 김에 같은 시기에 쓰인 소설도 봤다. 일본에서 나온 작가의 전집 판본을 번역해 문학동네에서 새로 낸 그의 첫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양윤옥 옮김). 전집 내면서 개정을 좀 했단다. 여기 실린 단편들은 지루한 편이다. 일단 제목을 정하고 생각나는 것을 쓱쓱 쓰는 방식을 택했다는데 그러니 언론사 입사 시험 작문 답안지 같기도 하고…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8/10이나 9/10까지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땅 속 그녀의 작은 개'도 괜찮았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품이라 한다.

▲ <삶을 바꾸는 책 읽기>(정혜윤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② 팔자에 없는 강연 요청을 받아서 완전히 생소한 세대·직업군 앞에서 두 시간을 떠들어야 했다.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이라는 주제였는데, 노하우 이전에 어떤 태도로 책을 읽으면 좋을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미리 긴 원고를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말로 하려니 스스로도 논리의 결함을 느꼈다.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한 내 입장은 여전히 숙제다. 그간의 독서를 돌아보면 내게는 강한 관성인 '일'이 들러붙어 있었으니까.

강연을 준비하면서 정혜윤 PD의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민음사 펴냄)를 많이 참고했는데, 그녀가 이 책에서 밝히는 책에 대한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 길고 깊은 고민을 슬라이드 몇 개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생각이 엉키고 말문이 막혔던 거다. 그러니까…… 결국 내 삶에 대해 앞으로 더더욱 진지하자고 느꼈다. 미련한 대로, 메저키스트인 대로.

(+책에서 최근 우리 상황에 던져도 좋을 만한 구절 하나를 찾아서 옮긴다.

"잘못은 자리를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을 어떻게 전할 수가 있을까요. 제 친구도 한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잘못했으니 난 벌을 받아야 해, 라고요.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아니, 잘못했으면 해결해야지."" (224쪽))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전셋집을 구하려고 부동산을 돌 때마다 가장 짜증스러운 순간은, '여자 혼자 산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아니 근데 왜 자꾸 큰 집을 보여달라고 그래? 혼자 살기 딱 좋은 집 있는데"라는 반응이 튀어나올 때다. "지금 책꽂이가 14개인데 이마저도 모자라서, 이사하면서 4개쯤 더 살 생각이다"라는 정직한 대답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즉각 "아니 뭐하는 사람이길래 그렇게 책이 많아~?"하면서 호구조사가 들어왔다.

▲ <숨고 싶은 집>(우연수집가 지음, 뜨인돌 펴냄). ⓒ뜨인돌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직업을 일일이 밝히거나 왜 책을 버리지 않는지에 대해 낯선 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 필요를 굳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책이 많아서요"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곤 한다. 그러면 부동산 중개업자라든가 보러 간 집의 세입자들은 책이 한 100권 정도 되나 보다하고 지레 짐작하고는, 아주 작은 방을 보여주며 "이 방을 서재로 쓰면 딱 좋겠다"고 권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썩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전셋집이라도 2년 이상 거주해야 하는 '내 공간'이라면 최대한 넓게, 깔끔하게 꾸미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이사를 준비하며 큰 고뇌에 빠진 채 이런저런 인테리어 사이트들을 전전하다가 <숨고 싶은 집>(우연수집가 지음, 뜨인돌 펴냄)이라는 책도 뒤적거렸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내 책꽂이들만 없으면 나도 '좁은 평수 넓게 쓰기'라든가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고 '북유럽풍 카페 느낌'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책은 인테리어의 적이고, '내 집'이 없는 이들의 너무나도 무거운 등짐이다. 하지만 책을 버리라는 건 나보고 밥줄을 끊으라는 얘기다.

일단 <주거 인테리어 해부도감>(마쓰시타 기와 지음, 황선종 옮김, 더숲 펴냄)도 한번 들춰봐야겠다. 후….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어떤 초탈한 시선이라는 게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모든 것을 알고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바 있는 사람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뜨겁게 촉구하지는 않고 있을 때, 그런 시선이 생긴다. <불멸화 위원회>(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에 대해 서평(☞바로 보기 :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을 걱정하는 중생들아!")을 쓰신 윤원화 선생님이 트위터에서 하셨던 표현을 (정확하지 않게) 인용해보자면, 저 우주에서 내려다보거나 묫자리에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초월적 달관자의 눈길.

▲ <불멸화 위원회>(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불멸화 위원회>도 그런 책이다. 우리가 흔히 '영국식 유머'라고, 선망의 뉘앙스를 한껏 담아 언급하곤 하는 그런 식의 비꼬기와 촌평이 수없이 등장하는 이 책은, 사실 (저자가 파악할 수 있는) 맥락 내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고려하고 있기에, 그 중 무엇에 대해서도 손대지 못한 채, 뒤엉킨 맥락과 함께 둥둥 떠내려가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가령 다음 문단을 살펴보자.

"시지윅은 영혼의 사후 지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측면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던 시지윅은 영혼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죽었다."(40쪽)

탁구 치듯 경쾌하게 아이러니를 내꽂는 존 그레이의 필체는, 근대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에,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 및 영혼 불멸에 대한 욕망을 기가 막히게 꼬집어낸다. 하지만 그가 이 문장을 쓰고, 우리가 읽으며, 같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바로 그러한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지어, 자신이 신화와 판타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결국 신화와 판타지를 요청해야만 한다. 이 거대한 칸트주의적 단절에 대해 어떤 대답이 등장하기 전에 인류는 '인류'로서 지속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나도 잠시 존 그레이처럼, 허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서울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열차 추돌 사고가 나던 때, 나는 5호선 전철 안에 있었다. 2호선 합정역 근처에 있는 회사로 가기 위해 열차를 갈아타려는 참이었다. 나도 사고가 난 전철을 탈 뻔 했다. '위험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실감이 물벼락처럼 몸을 적셨다.

▲ <치료받지 못한 죽음>(박철민 지음, 이후 펴냄). ⓒ이후
누구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식으로 죽거나 다칠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누구나'라고 하면 안 된다. 물론, 누구나 사고를 겪는다. 그러나 그 확률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고초를 당했던 석해균 선장을 치료했던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 대표적인 중증외상 치료 전문가인 그는 한 인터뷰에서 "10여 년 간 1300여 명의 환자를 봤지만 에어백 있는 외제차 타는 환자는 딱 한번 봤다"고 말했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 가방끈 짧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고는 더 자주 찾아온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 당시, 국내에 중증외상을 치료할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국종 교수 등 극소수만 활동할 뿐이다. 중증외상이 부유층에게 더 자주 생겨도 그랬을까. 사고가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더 흔히 일어나도 그랬을까. 아닐 게다. 중증외상 치료를 받을 곳을 찾기 힘든 현실은, 계층 간 불균형과 무관하지 않다.

석해균 선장 사례에서 드러난 열악한 응급의료 현실을 분석한 책이 있다.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하는 박철민 씨가 쓴 <치료받지 못한 죽음>(이후 펴냄)이 그것. 살릴 수 있었던 죽음에 눈물 흘렸던 경험이 있는 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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