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를 좌담 및 대담의 형식으로 검토하고 있는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가라타니 고진 지음, 최혜수 옮김, 도서출판b펴냄)와 박가분의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자음과모음 펴냄)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앞의 책은 <세계사의 구조>가 출간된 이후 일본 지성계에서 전개된 대담과 좌담 형식의 글들을 모은 것이고, 뒤의 책은 한국의 젊은 지식인이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기 식으로 독해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이다.
어떤 사상가의 저작을 체계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담론의 장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장에서 적극적인 개입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에라야 가능하다. 특히 <세계사의 구조>와 관련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제출된 여러 형태의 반응들은 아마도 이것이 이행기의 사유와 관련해서 어떤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박가분의 경우, 가령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나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과 같은 저작의 한국적 수용을 중심으로, 가라타니 사상이 주로 문학계에서만 논의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한국에서도 문학계말고도 다양한 분야에서 가라타니의 담론을 분석, 적용, 비판하는 흐름이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다만 그것이 저널리즘의 장이 아니라 논문의 형태로 발표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유통이 안 되는 실정일 뿐이라는 것도.
가라타니를 고유명으로 사유하려는 시도가 가령 사상계의 스타 반열에 오른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하여 구미의 철학자나 사상가에 대한 열띤 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이유는, 가라타니 사상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일본의 문화사나 사상사에 대한 한국에서의 이해의 폭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실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의 독자와 지식인들의 구미지향성에 비해서, 일본에 대한 관심은 일본학 전공자를 제외하면 자못 미약한 편이다.
가령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나 <근대문학의 종언>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글들은 표면적로는 문학론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그것의 지양과 관련된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논의의 성격이 일본에서 전개된 서구 사상의 번역과 그것의 자기화라는 문제를 밀도 높은 수준에서 거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일 비교문학이나 비교사상에 대한 관심을 얼마간 견지하고 있는 연구자나 비평가들에게나 접근이 용이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반면, <트랜스크리틱>(이신철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나 <세계사의 구조>와 같이 칸트나 마르크스, 프루동과 크로포트킨의 논의를 선용하고 있는 저작들은 그것이 한국에서도 익숙한 '서양사상'의 번역과 오랜 사유의 전통과 맞물려 있는 동시에,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향방을 점치고자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전망 섞인 화두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추상도가 높은 데도 불구하고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가라타니가 '교환양식D'로 명명하고 있는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시스템에 대한 설계는 발터 벤야민이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에세이에서 제기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비판적 아이디어와 상당 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지구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대안지구화 운동을 여러 국면에서 모색하고 있는 사회 운동의 변화와 맞물린 관심의 소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 번역된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를 읽으면서, 나는 일본의 사상계 또는 독서계와 한국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대담이나 좌담 등의 출전을 보면, <중앙공론(中央公論)> <군상(群像)> <문학계(文學界)> 등 시사월간지나 문학잡지들이다. <세계사의 구조> 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주요한 근대사상의 탈구축(deconstruction)에 해당되기 때문인지, 가라타니와 대담하고 있는 지식인들 역시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심지어는 전직 외교 관리까지 등장한다.
일차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한국적 상황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다. 한국의 문학계나 저널리즘적 상황에서는 이렇게 높은 추상도를 보이는 논의를 대중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전개하고 심층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말은 한국의 사상계나 지식인 사회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육화된 언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중들에게는 안전하게 완화된 당의정과 같은 '힐링 교양'이 넘쳐난다. 하지만 대중으로부터는 거의 차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과학문의 폐쇄적 강단학계에서는 과잉 추상화된 담론의 훈고학적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통의 채널에서 전혀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악명 높은 담론의 양극화 상황을 상기시킨다.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을 전체의 차원에서 횡단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가능케 하려면 그것을 독해하는 자 자신이 분절된 지식생산의 장을 횡단하고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야 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본에서는 문예비평가로 활동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작업을 담당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문학비평가 역시 일본과 유사한 방식을 가끔 시도하곤 하지만 그럴 경우 "네 전공은 뭐냐?"하는 식의 영역다툼 시선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풍경의 차이점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의 장에서 '말'과 '글'에 대한 차별적 가치평가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좌담과 대담은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부수적인 것, 의례적인 덕담의 자리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어떤 좌담이나 대담이 한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거나 담론장 안에서의 '사건'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담과 좌담은 '글'로 쓰인 저작의 위족(僞足)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며, 그 자체가 새로운 사상의 자극제가 되거나 글을 쓸 때 고려하기 힘들었던 살아 있는 타자와의 '대화'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일본의 출판계를 보면, 대담이나 좌담이라는 담론 형식이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면서 저작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그런데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런 대담이나 좌담 형식의 중요성은 가령 일제말기에 <문학계>나 <중앙공론>에서 교토학파가 진행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서도 이미 발견되듯, '시국적인 것'을 '사상적인 것'과 결합시켜 논의하는 어떤 전통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가라타니와 좌담을 진행하는 일본의 지식인과 저널리스트, 또는 사회 운동가는 가라타니 사상에 대해 저마다의 고유한 독해법을 제시하면서도, '교환양식D'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는 공통적인 합의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좌담과 대담에서 개진되는 의견들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수정 없이 요약적으로 재진술되거나 반복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커다란 장점도 있다. '글'을 쓸 때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시대적인 것'과 '사상적인 것'의 혼효(混淆)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추상화된 담론이 '시대적인 것'에 비추어 구체화되고, '시대적인 것'의 경험적 구체성이 개념적 추상화를 통해 새로운 담론적 형식을 갖추게 되는 방식. 여기에서 '말'과 '글'의 상호보충성이 강화된다.
물론 대담이 일종의 자화자찬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자본-네이션-국가 개념을 보로메오의 매듭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라캉의 논의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발상법이 글이 쓰인 당시가 아니라 먼 훗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라는 발상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는 진술 등이 그러하다. <세계사의 구조>에서의 교환양식, 통치양식, 주체양식, 소통양식에 대한 논의 역시, 가령 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이나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와 같은 발상법에 대한 대항적 차별화와 내면화된 영향의 산물이라 생각하는데, 그 자신은 명확하게 자기 주장의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을 긋는 등의 태도가 그러하다. 한편 '교환양식D'로 상징되는 원시적 호혜성의 고차적 회복이라는 관점 역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서의 관점이 매우 중요한 사상적 기원이 된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미약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제기하고 있는 논의는 담론의 콘텐츠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령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그동안 자본에 대한 저항의 영역에서 '교환양식'이 간과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임금노예'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환양식'에서의 주인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박가분이 비판한 대로 얼마간의 낭만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세계 동시 혁명'을 말하는 가라타니는 일국 혁명의 불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이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발견인 것처럼 놀라워하는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는 인터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혁명'의 문제를 사유했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과제를 뒤늦게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구조>가 놀라운 느낌을 갖게 한다면 이 저작의 근저에 깃들어 있는 구조주의적 사유의 미끈한 완결성과 체계성 때문이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항대립을 축으로 하는 인식론이며, 이러한 인식론에 의해 세계사를 건축하게 되면 그 논의가 진리성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담론 자체적으로 유기적이고 완결된 형식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생산양식과 교환양식, 세계제국과 세계공화국, 상품교환과 호수(/혜)성, 세계종교와 보편종교, 주변과 아(亞) 주변 등의 대당개념을 설정하게 되면, 분석되는 현실이 불가피하게 환원주의적으로 단순화된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개념적 프레임을 명료화하고 투명하게 느끼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가라타니의 대담집을 읽으면서 내가 또 한 가지 생각한 것은 '교양인'이랄지 '자유로운 지식인'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다. 한국 저널리즘과 일본 저널리즘의 차이, 또는 한국 학계와 일본 학계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 '교양인' 내지는 '자유 지식인'의 실존적 존재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나 자신도 그런 곤란을 나날이 경험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지식인 모두가 체계적으로 자신의 사유와 지적 탐구를 완만한 리듬으로 전개시키는 일의 '구조적 불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대학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식인 모두 폐쇄적인 분과학문의 틀과 논문 발표를 포함한 업적 경쟁에 휘둘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실정이며, 자유로운 지식인의 대표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평가들의 활동 영역은 한정된 분과예술의 저널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동시에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유난히 전공 학문의 영역 본능이 강해서, 경계를 좀 뛰어넘으려면 "네 전공이 뭐냐?"하고 다그치기 마련이며, "최종학위는 뭐냐?"라는 물음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인문학적 지식인 개념에 기반을 두고 많은 문학비평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저널리즘의 장에서 활동했던 1970~80년대가 지식 생산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이 시기 청장년기로서 활동했던 지식인들은 오늘날 한국의 비평계나 지식인 사회에서 '원로'가 되어 있으며, 어쩌면 최후의 근대적 교양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의 담론장 혹은 지식인 사회를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적 역량이나 발상법의 과감함이라는 차원, 이론적 논의의 수준에서 보더라도, 한국의 소장 지식인들이나 비평가들의 담론 생산의 역량은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완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이번에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을 출간한 박가분의 경우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상 번역의 대중적 인프라와 토대만 구축된다면, 20대의 청년도 얼마든지 사상의 숲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의 저작을 정독해 보면 알겠지만 그가 인용하거나 논의하는 서구 저작은 일본 번역자들의 번역서를 기반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칸트와 마르크스를 읽으려면 독일어 원전을, 프루동이나 라캉을 읽으려면 프랑스어를, 또 가라타니 고진을 읽으려면 일본어 원전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 지적 역량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하겠지만, 정작 가라타니를 포함한 일본 사상가들의 각주나 참고문헌을 일람해 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저작들을 자국어 번역판으로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번역에 대한 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한국에서 번역자의 작업에 대한 홀대와 번역 문화의 허약한 토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은 상대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이나 좌담에 대한 논의가 주가 됐지만, 마지막으로 박가분의 책의 서술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밝히면서 글을 맺고 싶다.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은 가라타니에 대한 분석자의 열정이 돋보이며 그 열정은 매우 좋은 글쓰기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라타니를 분석하고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데 있어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서술은 많은 경우 가라타니의 저작을 장별로 제시하고 그것을 요약적으로 논평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정작 박가분 자신의 가라타니에 대한 관점이 예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만약에 나 자신이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비평적 저작을 쓴다면, 나는 가라타니가 생산한 저작 각각을 분절해서 논의한 후 다음 저작으로 넘어가는 식의 서술이 아니라 개념이나 의제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해체-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 같다. 동시에 가라타니의 저작에 나타난 개념의 '균열'과 '모순'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가라타니의 사상과 담론 안에서 지속, 변형, 발전되고 있는 '문제설정'과 '무의식'이 무엇인지를 밝혀보려 했을 것이다.
가라타니 자신이 문예비평가로 출발한 까닭인지 몰라도, 담론 개진의 '내러티브' 형식 역시 그의 사상에 공명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사상'의 내용적 측면에 대해서는 깊은 탐구를 진행하지만, 담론의 내러티브 형식에 대해서는 둔감함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이 '말하기 방식' 또는 '서술방식'에 주목해 보면, 왜 어떤 사상은 한 시대에 중요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다른 사상은 그 내용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간과되는가 하는 비밀에 대해서도 더불어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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